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56화 (1,04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6화 >

    아니.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오해를 풀고 싶어 했던 실비아가 굳이 오해를 부추기는 것 같은 말을 할 리가 없지.

    또 레이 이 녀석이 멋대로 이상한 추측을 해서 그걸 혼자 기정사실로 하고 있는 게 틀림 없······.

    "······흥."

    어, 어라? 실비아야? 나 실비아가 저런 표정 짓는 거 처음 보는데. 야. 레이. 너 대체 실비아한테 뭘 했길래 애가 저런 표정을 지어?

    그래. 실비아는 놀랍게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리며 심통이 단단히 난 표정으로 레이를 말을 무시해 버렸다.

    물론 실비아 외모에 저런 표정을 지어봤자 귀엽기만 할 뿐이었지만. 심지어 은근히 내 눈치를 보고 있기도 해서 더 귀여웠지만. 그래도 그 실비아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흐으응?! 뭐야 그 태도! 너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긴 아는 거야?!"

    "······그 말, 그대로 똑같이 돌려 드리겠습니다."

    "으으윽!"

    실비아의 말에 찔리는 게 없지는 않았는지, 레이는 이를 앙다물고 실비아를 노려봤다.

    물론, 실비아도 물러서지 않고 그런 레이를 똑바로 노려봤다.

    대체 어제 둘이서 무슨 얘기가 오갔길래 이러는 걸까?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물론 나는 끼어들지 않았다. 끼어들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아니 말이지. 나도 여러 여자랑 같이 부대끼고 지내다 보니 빠져야 할 때와 끼어들어야 할 때 정도는 파악하고 있거든.

    지금은 흥미진진, 아니. 침착하게 캣파이트, 아니.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걸 기다려야 할 때야.

    "그, 그건 네가 남자인 줄 알아서······!"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다르잖아?! 그보다 너! 그러면 그동안 매일 밤······!"

    "문제 있습니까?"

    "있는 게 당연하잖아!"

    "어젯밤은?"

    "어, 어젯······!"

    우와. 대단해. 실비아. 단답형으로 레이의 말을 전부 쳐내고 있어.

    마치 최소한의 동작으로 회피와 동시에 카운터를 날리는 아웃파이터형 복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레이가 온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두르다가 자기가 자기 힘에 못 이겨 고꾸라지는 느낌도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하여튼 역시 실비아도 할 땐 하는구나.

    뭐, 지금까지 나뿐만 아니라 내 여자들 사이에서도 사랑받는 포지션이었으니 저런 모습을 볼 일이 없었을 뿐,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기사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지.

    아무튼 레이의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말싸움은, 이제 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 난 저 자식이랑 사, 사, 사랑하는 사이니까······!"

    "······그,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아."

    야. 둘 다 말싸움하던 도중에 갑자기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지 마라.

    특히 레이 너. 넌 부끄러워하면 나한테까지 전염되니까 그만둬.

    "애, 애초에! 한 남자를 여러 여자가 공유한다는 사실부터가 이상해!"

    야. 아픈 데 찌르는 것도 그만둬라. 왜 갑자기 옆에서 보고만 있던 날 공격하는 거야.

    자, 실비아! 이번에도 가볍게 제압해 버려!

    "그러면 당신은 포기하겠습니까?"

    "왜 내가 포기하는 게 되는 거야?!"

    "단순히 계산해도 8대1입니다."

    "8······!"

    야. 그런 귀신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보지 마라. 나도 일단 많다는 자각은 있어.

    조, 좋아. 그러면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 나도 슬슬 끼어들어까.

    "한 명만 더 채우면 두 자릿수 되는 건데. 그치?"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한 명만이라니! 나까지 포함시킨 거야?! 난······!"

    역시 이런 때에 이런 장난은 안 통하나.

    "참고로 말하자면."

    계속해서 전해져오는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소리 지르는 레이.

    나는 그런 레이에게 다가가서, 그 허리를 꽉 껴안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느니 없던 일로 하자느니 해봤자 소용없어. 넌 내 여자야. 결정 사항이야. 이제 못 물러."

    이런 걸 나쁜 남자 스타일이라고 하나? 아니. 조금 다른가?

    아무튼 실비아의 비밀을 알게 된 데다가 내가 여신의 사자라는 의심까지 품고 있는 애다.

    지금 여기서 확 잡아놓지 않으면 상당히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조금 강압적인 태도로 나서기로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부드럽게 회유하면서 서서히 다른 여자들의 존재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줬겠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

    "무, 무, 무슨······!"

    사실 이렇게 나쁜 남자 스타일로 여자 마음을 휘어잡으려는 건 나도 처음이라서, 아니. 굳이 따지자면 미리엘을 조교 한 것도 그런 식으로 여자 마음을 휘어잡은 것으로 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미리엘은 그거니까. 알잖아?

    아무튼 그런 이유로 조금 불안했지만, 게다가 얘 성격이나 과거가 강압적인 걸 싫어하는 스타일 같아서 더 불안했지만, 레이가 나한테 느끼는 감정과 내 매력을 믿어 본 보람이 있었다.

    레이는 명확하게 좋은 의미로 설레고 있었다.

    감정 공유로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이럴 때는 참 좋네.

    "왜? 싫어?"

    "시, 시······."

    "잘 생각해서 대답해. 다른 여자는 생각할 거 없어. 내 얼굴 제대로 보고, 나랑 있으면 좋은가 싫은가. 그것만 생각해. 싫어? 좋아?"

    "······싫지는······않지만······."

    그리고 내 추궁에, 결국 레이는 꺾이고 말았다.

    부끄러워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것 좀 봐. 귀엽기는.

    "그럼 문제없네. 그렇지?"

    "······있잖아. 문제는."

    내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걸 느꼈는지, 레이의 뺨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말대답은, 그런 부끄러움을 얼버무리기 위한 투정 같은 거라고 봐야지.

    "내 여자가 되지 않을 수준의 문제는 없어. 아니야?"

    그래도 이왕 나쁜 남자 스타일로 가는 거니까, 조금 더 몰아붙여 볼까.

    "······."

    "아니야?"

    "······몰라."

    내 끈질긴 추궁에, 레이는 결국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명확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너무 몰아붙이면 불쌍하니까 이 정도에서 봐주기로 할까.

    "어차피 있다고 해도 놔줄 생각은 없지만."

    "······뭐야 그게."

    "잘못 걸렸다 생각하고 포기하라는 거야. 아무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희 둘 다 내 여자니까 앞으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 실비아도. 알았지?"

    "네, 네헤······죄송합니다아······."

    내가 혼낸다고 생각한 건지, 실비아는 한껏 풀이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아도 내가야 한 장난 칠 때 말고는 그렇게 강압적으로 행동하는 건 별로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딱히 혼내는 건 아니었는데.

    애초에 실비아가 그렇게 행동할 정도면, 분명 레이 이 녀석이 뭔가 했을 테고.

    "······왜 그 여자한테만."

    내가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옆에서 그런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자기한테는 강압적으로 행동해놓고 실비아한테는 미소 지으면서 머리 쓰다듬어주는 게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질투하지 마. 자, 이거 봐. 이런 애한테 어떻게 모질게 구냐."

    "햐응! 흐냐아아······."

    "보긴 뭘······뭐야 그거."

    뭐긴 뭐야. 녹아내린 실비아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던 레이는, 내 품에 안겨서 어쩔 줄 몰라하는 실비아를 보고 바로 표정이 변했다.

    하긴. 아까까지 무뚝뚝하게 단답형으로 자기 말을 꼬박꼬박 반박하던 애가 갑자기 이렇게 녹아내리면 그야 당황스럽겠지.

    "그 여자, 뭐 하는 거야?"

    "보면 몰라? 너무 좋아하는 나한테 안겨서 행복해 죽으려고 하고 있잖아."

    "······원래 그래?"

    야. 그 말투는 뭔가 너무하지 않냐?

    뭐, 그렇게밖에 표현할 말이 없다는 건 인정하지만.

    "원래 이래."

    "나하고 있을 때랑 인상이 너무 다르잖아."

    "그것도 원래 그래. 이 모습은 나랑 있을 때 한정이야. 뭐, 그렇다고 해서 아까 같은 모습은 나도 처음 보지만. 네가 너무 실비아를 싫어해서 그런 거 아니야?"

    "그, 그건······."

    레이도 일단 찔리는 게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저쪽에 가 있는 동안 있었던 해프닝이 아니더라도, 레이 얘는 처음부터 유독 실비아한테 많이 틱틱댔으니까 말이야.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자의 감이라는 녀석이 본능적으로 라이벌을 감지하고 경계한 건지도.

    어느 세계에서도 여자의 감이라는 건 무서운 법이라는 얘기다.

    "어제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사, 상관없잖아. 딱히."

    대답해 줄 마음은 없다는 건가.

    하지만 네가 그럴 생각 없어도 다 알 방법이 있거든.

    "실비아."

    "네, 네헤!"

    "어제 무슨 말 했어?"

    "저, 저 샤람이······더는 구원 님께 접근하지 말라고······으읍······."

    "꺄아아악! 왜 말하는 거야?!"

    실비아가 진짜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건지, 실비아가 바로 대답하자 레이는 비명까지 지르며 실비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중요한 얘기는 다 나왔으니, 막아봤자 소용없었지만.

    이거 아쉽게 됐네. 실비아는 보다시피 내 말에 절대복종이라서 말이야.

    "호오. 과연. 흐음. 얘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그, 그건······! 난 그때는······! 호, 호모한테서 지켜주려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

    아니. 딱히 잘못이라는 말 안 했는데.

    진짜로 호모한테서 지켜줄 목적만으로 그런 말을 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진짜 그랬다면 실비아가······.

    "그, 그 여자도 나한테 자기랑 잔 주제에 널 독점하려 하지 말라고······!"

    저거 봐. 저럴 줄 알았어. 혼자 자폭하기는.

    분명 레이 이 녀석도 날 독점하기 위해 뭔가 센 발언을 했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실비아가 그런 말까지 했을 리가 없지.

    "독점하려고 했다고?"

    "아앗! 그, 그게······."

    이제야 자기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레이는 황급히 자기 입을 가렸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실비아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쳐도, 다른 곳에 내 여자가 더 있다는 건 알았을 텐데? 그 몸으로 절실히."

    축 늘어진 실비아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혀주고, 나는 레이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레이는 거리를 유지하듯한 걸음 뒷걸음쳤고, 그를 따라가듯 나도 다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거리를 유지한 우리였지만, 방 안에서 그러는 건 한계가 있었다.

    "으읏!"

    결국 레이의 등이 먼저 벽에 닿고 말았고, 거기서 내가 한 걸음 더 옮기자 레이의 그 가슴 끝이 내 가슴이 살짝 맞닿게 됐다.

    "무, 무, 뭐야. 할 말 있어?"

    일단 센 척해 보는 레이였지만, 아까 나한테 확 휘어 잡힌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그 목소리에는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눈동자도 엄청 진동하고 있었고.

    "독점하고 싶어?"

    "그, 그러니까, 그게······."

    이거 봐. 원래 성격 같으면 그냥 솔직하게 독점하고 싶다고 말할 법도 한데, 엄청 망설이잖아.

    의외로 나쁜 남자한테 휘둘리는 성격인 걸까.

    "왜 그래? 솔직하게 말해 봐."

    이번에는 아까같이 강압적인 말투가 아니라 부드럽게.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하자, 레이가 살짝 기대를 담고 내 눈을 엿봤다.

    "소, 솔직하게?"

    "그래. 솔직하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줄 생각이었는데, 어째선지 그 미소를 보고 레이의 표정이 변했다.

    "······절대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는 미소잖아······."

    얘가 설마 이 타이밍에 이런 눈치를 발휘할 줄이야.

    어떻게 알았지? 독점하고 싶다고 했으면 바로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기절할 때까지 몇 번이고 섹스해 준 다음에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냐고 몰아붙일 생각이었는데.

    "쳇."

    혀를 차면서 그 몸에서 살짝 떨어지자, 겁에 질린 것처럼 움츠러들어 있던 레이가 겨우 해방됐다는 듯한숨을 내쉬었다.

    "무, 뭐야 진짜······. 혀는 왜······잠깐."

    하지만 그러다가 또 뭔가를 깨달았는지, 내 앞으로 돌아와서는 이번엔 자기가 내게 몸을 밀착하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

    그리고 내 태연한 표정을 보고 점점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바들바들 떨더니.

    "너, 너 또 날 가지고 논 거야?!"

    드디어 진실에 도달했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야. 그러니까 넌 왜 일일이 표현이 그러냐. 그래선 내가 진짜 나쁜 짓 한 것 같잖아.

    "가지고 놀다니. 그냥 내 여자랑······."

    "누가 네 여자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거까지 부정하면 안 되지.

    하는 수 없지.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야. 말해두는데 장난은 조금 전 그거뿐이야. 널 놔줄 생각 없다는 건 장난이 아니야. 넌 내 여자야. 알았어?"

    "으, 으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는 또 움츠러들어 버렸다.

    "알았냐고 물었어."

    "아, 알았어······."

    역시 보기완 다르게 나쁜 남자한테 끌려다니기 쉬운 성격의 레이였다.

    "좋아."

    "······진짜 뭐야."

    아까 실비아한테 했던 것처럼 레이도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레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투덜대지 마라. 속으로는 은근히 좋으면서. 난 네 감정이 느껴진다니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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