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49화 (1,033/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9화 >

    "소개하지. 레이 바프라다."

    "바······!"

    그 짧은 소개말에,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게 됐다고 하는 게 맞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레이의 피부색이나 긴 귀를 보니 도저히 그런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속내를 형상화하듯이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자세로 굳어진, 아저씨들의 동공을 지진이 일듯 흔들렸다.

    바프라가 순혈주의라는 사실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뭐, 내 예상이 정확하다면 그 순혈주의라는 것도 사실은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하지만.

    "레이. 네가 지금 몇 살이었지?"

    "······32살인데."

    조금 전에 난교 현장을 보고 착각한 것 때문에 그래도 긴장이 조금 풀어졌는지, 레이는 방에 들어오기 전보다 훨씬 덜 긴장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얘가 나보다 연상이라니.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다시 들어도 적응이 안 된단 말이야.

    "성에서 탈출한 건?"

    "······2년 전."

    "그렇다고 하네. 바프라는 이미 32년 전에 아이를 가졌고, 30년이나 그 존재를 숨기며 길러왔지. 그 후 2년간 몰래 얘를 찾아내려고 온 나라를 들쑤시고 다닌 건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이 중에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았던 사람?"

    내 태연한 질문에 대답하는 아저씨는 물론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아니. 내 생각 이상으로 레이의 존재는 바프라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레이가 정말로 바프라의 딸이 맞느냐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어차피 그런 말이 나올 걸 대비하고 준비도 해놨었지만, 필요 없는 준비였나. 다른 무엇보다도, 레이의 이 외모가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얘기다.

    "아무도 없나? 흠. 그거 이상하군. 바프라는 왜 자식이 있으면서도 아저씨들 같은 중신들에게조차 그 존재를 알리지 않고 숨겨왔을까?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아차! 그렇지! 혹시 바프라 그놈······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섹스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이 낳

    기라는 명목으로······."

    "수, 순혈주의자로 유명하신 바프라 님이 그럴 리가! 보통은 짧은 기간에 여러 여자를 동시에 안아서 누구든 하나 빠르게 임신시키는 게 편하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 그러나 바프라 님께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까지 감안하면서도 아내분만을 안으신 것은 유

    명한 일화! 심지어 아내분께서 돌아가신 후 크게 낙심하여 주변을 피로 물들이신 것 또한······!"

    과연. 여성을 천대하기로 한 바프라. 그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 또한 금기시됐고, 남녀 간의 사랑에 눈을 뜬 사람은 은사모라는 조직을 만들어 이렇게 은밀히 활동할 수밖에 없게 됐다.

    즉, 원래라면 은사모에게 있어서 바프라는 가장 원망해야 할 대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아까부터 이 아저씨들은 바프라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히 높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는데, 나는 드디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섹스를 한 번도 안 했다고?"

    "저, 적어도 몇 년은······."

    뭐야 그거.

    "그 말은 결국 했다는 거잖아."

    바프라 그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대놓고 섹스 중독인 걸 티 내고 다녔잖아? 대체 주변 놈들은 뭐가 모자라서 의심조차 안 한 거지?

    이게 바로 고정 관념의 힘이라는 건가.

    반드시 그렇다는 고정 관념이 한 번 생기면, 사람은 그 사실에 좀처럼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흔하디흔한 얘기로군.

    "대단하신 순혈주의자께서, 주변에 더 이상 순혈 다크 엘프가 없는데도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라며 자신의 사상까지 꺾고 섹스를 하셨다는 거 아니야."

    "그, 그건······."

    듣고 보니 자신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아저씨들의 얼굴에서 불신감이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렇게 원하던 순혈 다크 엘프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뭐, 처음부터 원하는 건 순혈 다크 엘프 자식이 아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말이야."

    "그,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얘기를 들어 보니 알겠어. 그러니까 너희는 바프라가 자기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리고 그런 바프라라면, 언젠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남녀 간의 사랑을 지지해줄 수도 있다. 우리 은사모가 꾸준히 노력하면 그런 미래를 분명 맞이할

    수 있다. 그렇게 착각하는 거잖아?"

    "······!"

    역시나 그랬는지, 아저씨들은 정곡을 찔린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아쉽게도 전부 틀렸어. 바프라는 순혈주의자도 아니고, 자기 아내를 사랑했던 건 더더욱 아니야. 너희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다크 엘프에게는 첫 경험을 가진 상대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특기가 있어. 그리고 그걸 섹스에 응용하면, 서로가 느끼는 흥분을 공

    유하여 더욱 큰 쾌락을 얻을 수 있게 되지. 다른 섹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쾌락을. 바프라가 자기 아내한테 원한 건 바로 그거야. 아이를 얻는 게 늦어지는 걸 감수한 게 아니야. 단순히 다른 여자들이랑 하는 것보다 아내랑 하는 섹스가 훨씬 기분 좋았으니까

    아내만 안은 것뿐이야."

    내 말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는지 몇몇 아저씨들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고, 또 몇몇 아저씨들은 눈에 핏발까지 서기 시작했다.

    뭐, 여러모로 제대로 배신당한 기분일 테니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 내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그리고 아내가 죽은 후 주변을 피로 물들였다고 했지? 그것도 아내를 사랑해서가 아니야. 앞으로 더는 자신이 원하던 쾌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뿐이지. 그리고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아마 놈은 곧바로 정신을 차렸을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말했잖아? 다크 엘프의 특성으로 다른 사람들과 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쾌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리고 아내가 죽은 후, 놈의 바로 앞에는 순혈 다크 엘프의 여자 아기가 있었지."

    "읏······!"

    옆에서 몸을 바들바들 떠는 레이의 허리에 팔을 감고, 나는 그 몸을 부드럽게 껴안아 줬다.

    "서, 설마······!"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아저씨들도 드디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 여기 모였다는 건 다들 한가락 하는 놈들일 테니까. 그 정도로 머리가 안 돌아가지는 않겠지.

    특히나 여기 바프라는 다른 두 곳과 달리 이기기 위해서는 비열한 수도 아무렇지 않게 쓰는 나라라고 하니까. 강자존의 세계라고 해도, 다른 두 곳에 비하면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이 많은 게 당연했다.

    "그래. 그 설마야. 바프라의 아내가 자식을 무사히 낳고 나서야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죽여버린 점. 이 녀석을 성에서 애지중지 키우면서 30년 동안이나 그 존재를 공표하지 않은 점. 대는 이어야 한다면서 계속해서 섹스를 한 점. 전부

    이어지지?"

    사실 나도 얘기가 이렇게까지 잘 풀릴지는 몰랐지만, 바프라 그놈이 생각보다 대놓고 티를 내준 게 정말로 도움이 됐다.

    뭐, 그 녀석도 레이가 성장하길 기다리느라 30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했고, 심지어 30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목적을 달성하려는 순간 레이가 도망가기까지 한 거다.

    사람이라면 허점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겠지.

    "바프라 그놈이······우리들 몰래······!"

    이렇게까지 되자 드디어 아저씨들도 이성을 잃기 시작했는지, 방 전체에 흘러넘칠 듯 살기가 팽배하기 시작했다.

    아까 콘돔 섹스를 알고 좋아하던 푼수 같은 아저씨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살기였다.

    굳이 애널라이즈를 써보지는 않았지만, 역시 이 세계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아저씨들답게 나름대로 레벨은 높은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레벨이 250을 넘는 아저씨는 없는 것 같았지만.

    던전 6계층을 여유롭게 돌파하려면 레벨이 250은 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우리 여신님 던전 레벨 디자인을 너무 신중하게 하신 거 아니야?

    "그래. 그런 거야. 어째서 바프라를 조심해야 하는지, 이제 알겠지?"

    아무튼 드디어 일이 제대로 풀려간다는 생각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해줬다.

    하지만 여기까지 듣고도, 아직 설명이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노하는 아저씨 중 그나마 냉정한 얼굴을 한 아저씨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구원 님."

    "왜?"

    "바프라 그놈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개새끼라는 건 충분히 알았습니다."

    우와. 이 아저씨. 아까는 그렇게 바프라를 옹호했던 주제에 말하는 것 좀 봐.

    "그런데?"

    "하지만 그놈이 아무리 섹스에 미쳤다고 해도, 걸레년의 끄나풀이라는 건 아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를 낳고도 섹스를 계속하는 건 그 걸레년을 추앙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놈 자신이 그렇게 말했는데도?"

    "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입니다."

    쳇. 귀찮기는. 어차피 이쯤 되면 굳이 여신의 끄나풀이 아니더라도 은사모는 바프라에게 돌아설 것 같지만, 이왕이면 확실한 게 좋겠지.

    "사실 그건 나도 확실한 건 아니야. 너희가 원하는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지. 그러니까 그냥 내 말을 믿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지만······."

    "그런 것이라도 좋습니다. 놈이 걸레년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아마 레이 얘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30년의 기다림 끝에 맞이한 결과를 감당할 수 없었던 걸지도 몰라.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지만, 놈은 미약에 손을 댔어. 여기 찾아왔던 직속 부하라는 놈들이 쓰는 걸 봤지."

    "미약이라 하심은?"

    "사람을 강제로 발정시키고 흥분하게 하는 약을 말하는 거야. 그 약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강제로 안을 수 있었을 거고, 별다른 노력이나 사랑 없이도 섹스를 더 기분 좋게 즐길 수 있겠지."

    "그, 그런 약이······!"

    역시 중간에 사랑 없이 강제로 하는 섹스라는 점을 강조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은사모의 면면들은 모두 분노를 터뜨렸다.

    "존재해. 실제로. 그리고 그 미약의 재료는 바로······."

    "망할 걸레년의 마나······로군요."

    "그래. 바로······응?"

    나보다 먼저 대답을 내놓은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신이 있었다.

    아마 슬슬 난교 파티가 일단락됐다고 생각하고는 유리와 같이 모임에 재참석하려고 했던 거겠지.

    문앞에서 유리와 나란히 서 있던 신은, 참담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신? 그걸 네가 어떻게?"

    내가 얘한테 그런 얘기까지 했었나?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실비아도 물론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을 거고, 쓰레온 저건 헬레나랑 붙어있느라 그럴 틈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러면 얘가 대체 어떻게 미약 얘기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형님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군요. 그 옛날 전쟁신님과 걸레년과의 전쟁이 있었을 때, 그 걸레년의 세력을 상대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을 고안한 주술사들이 있었습니다. 저는······저희 가문은 그 주술사들의 후손입니다."

    저건 또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지금 이 타이밍에 그 얘기를 왜 꺼내는데?

    그리고 여신님의 세력을 상대하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라니. 그건 또 대체 뭐야? 아니. 잠깐만. 설마······.

    너무도 갑작스러운 잠깐 당황했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주술사라는 건 주술을, 그러니까 저주 같은 걸 쓴다는 거잖아?

    그리고 여신님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저주라고 하면,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금도 마틸다의 하복부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 검은 상흔 말이다.

    설마 이렇게 가까이 그 저주의 원흉이 있었을 줄이야.

    아니. 마틸다의 저주는 다른 모험가가 고대 유물을 조사하다가 걸린 거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흉의 후손이라고 해야겠지만.

    "지금도 저희 가문은 다가올 때를 대비하여 그 주술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죠.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몇몇 주술들은 실전되고 말았고, 저희 가문은 그 주술들을 복원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를 위해······."

    "걸레년의 마나에 접할 기회가 있었다는 얘기군."

    이놈 앞에서 성자의 힘을 안 쓴 게 진짜 천만다행이지.

    하마터면 적진 한가운데에서 여신님의 사자라는 걸 들키고 그대로 끝장날뻔했네.

    아니. 물론 성자 스킬이 생물 상대로는 최강의 스킬인 만큼 싸워도 이길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는 전쟁을 멈추거나 은근슬쩍 여신님의 사상에 감화시키거나 하는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네. 그렇기 때문에 그 걸레년의 마나라면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압니다. 구원 님의 얘기는 전부 사실입니다. 걸레년의 마나에는 사람을 강제로 흥분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 년 전부터 바프라는 저희가 가진 걸레년의 마나를 농축시

    켜 그러한 약을 만들도록 지시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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