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48화 (1,032/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8화 >

"그, 그러고 보니. 바프라 님을 직접 뵌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군. 자네는 어떤가? 본성에서 일하니 얼굴 마주칠 일도 많지 않은가?"

"아니. 나도 그렇게 자주 뵙지는 못했네. 명령은 끊임없이 내려오지만, 대부분 부하를 통해서였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것은······그렇군. 일 년 가까이 된 것 같군."

내가 던진 작은 돌은 큰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갔고, 이윽고 방에 있는 전원의 얼굴에 미혹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걸로 내 말에 더욱 신빙성이 생기겠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프라가 여신님에게 줄을 댔다는 말을 쉽게 믿어줄 정도로 이 아저씨들이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혹시 바프라 님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얼굴을 자주 못 봤다고 하면, 제일 먼저 그런 생각부터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아니. 얼굴을 못 봤지만, 목소리라면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도 들은 적이 있네. 문 너머로 들은 것뿐이고, 어째서인지 알현실 안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네만······."

"혹시, 바프라 님의 숨이 조금 거칠지 않았는가?"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자니, 본성에서 일한다는 아저씨가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파란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그렇게 추궁했다.

"음? 흐으음. 듣고 보니. 자네가 그것을 어찌 알았는가?"

"나도 몇 달 전에 본성에 간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 자네와 마찬가지로 문 너머에서 바프라 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네. 그때부터 줄곧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네."

"그렇다면······!"

"그러니까 섹스라고."

아까 바프라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니냐는 의혹을 던진 아저씨가 또 뭔가 말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는 황급히 끼어들어서 화제를 다시 돌렸다.

파란이 마련해 준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지.

"너희랑 중요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놈은 섹스를 멈출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모습을 보이지 못한 거고, 그래서 숨을 헐떡인 거야. 섹스 중독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하,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증이 있는데도 못 믿겠다는 거야? 너희도 각자 나름대로 지위가 있는 몸이니, 알 사람은 알겠지. 혹시 20대에서 30대의 젊은 여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없어?"

"그,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자들을 모아둔 마을을 제일 먼저 습격하는 것은 전쟁의 기본입니다!"

여자만 모아둔 마을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약할 수밖에 없고, 여자가 줄어들면 대를 잇지 못하게 하는 효과와 더불어 아군측 병력을 더 생산 할 수 있기에 후대의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하는게 이 아저씨들의 주장이었다.

일리는 있는 말이지만, 진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쓰레기 같은 세계잖아.

"전쟁이 활발히 일어나는 국경 근처를 말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적이 쳐들어올 수 있을 리 없는 수도 근처에서 그런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묻는 거야."

"그, 그건······!"

역시 예상대로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군.

짐작 가는 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저렇게 심각한 반응을 보인 거겠지.

"하지만! 콘돔 섹스라는 환상적인 방법을 알려주신 구원 님께는 감사해 마지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구원 님의 말씀이라도 바프라 님이 섹스에 빠지셨다는 건 믿을 수 없습니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심증이나 구원 님의 말씀만 듣고······!"

"적어도 며칠 전에 찾아왔던 바프라 님의 직속 부대라는 놈들이 젊은 여자들을 나르고 있던 것은 사실일세. 그건 나도 직접 확인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프라 님이 그년에게 끈을 댔다는 증거는 되지 않네! 파란 자네는 어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지만, 시끄러워 죽겠네.

"있으니까 그렇지."

침까지 튀며 외치는 아저씨들에게, 나는 짧게 대답해 줬다.

파란이 쉽게 넘어왔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 파란은 이것저것 본 게 있으니까 쉽게 넘어와 준 느낌이었지만, 이 아저씨들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하지만 내게는 아직 남겨둔 수가 남아 있었다. 사실 웬만해서는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이 아저씨들, 정말 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런 의미로 파란에게 눈짓을 주자, 파란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조금 불안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 나라를 뒤집어엎으려는 거다. 어느 정도 도박수도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거겠지.

"네, 네?"

"그러니까 그냥 말만 하는 게 아니라, 확실한 증거도 있다고. 파란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날 믿는 거고."

"그, 그건 대체?"

"너희는 지금까지 섹스는 대를 이을 때를 제외하고는 금기시해왔지?"

"네? 네. 그렇습니다만."

"즉, 대를 이을 아이를 한 명 낳은 시점에서 섹스는 끝. 그 이상의 섹스는 더러운 걸레신을 추종하는 행위나 다를 바 없다. 맞지?"

"······네."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아저씨들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져 갔다.

"낳은 자식이 여자여도 그 섹스를 멈춰야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맞지?"

"······네. 언제 낳을지도 모르는 남아를 낳을 때까지 전 국민이 계속해서 해대면, 결국 여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저씨 중 하나가 원하던 대답을 들려줬다.

뭐, 나도 알고 말한 거지만 말이야. 구미호 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신이랑 유리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놨으니까.

여자가 천대받는 세계에서도 유리처럼 높으신 집안의 딸은 존중받는 것 또한, 이것과 상통하는 얘기였다.

"그런 방침을 정한 건 누구지?"

"물론 바프라 님께서······."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

원하는 대답을 전부 들은 다음, 나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물론 레이의 방이다.

"레이!"

하지만 아무리 노크를 해도, 레이는 반응이 없었다.

혹시 잠이라도 자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고 있었거든. 난 그냥 아저씨들이 다 벗은 몸을 보면서 섹스 지도까지 해주는 지옥에 있느라 그런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거, 분명 레이도 짜증 내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얘가 갑자기 왜 또······.

"아무튼! 알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갑자기 내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레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얘가 왜 내 방에서 나와? 내 방에는 지금 실비아가······.

"그, 그리고 절대······!"

"뭐하냐 너?"

"흐이잇?!"

방안을 향해, 아마 실비아를 향해 뭔가를 외치는 레이에게 말을 걸자, 레이가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네, 네가 지금 여기에 왜 있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네가 왜 내 방에서 나와?"

"네, 네가 무슨 상관이야?!"

무슨 상관이냐니······. 거기 내 방이라니까? 그리고 만약 내 방이 아니라고 해도, 내 여자한테 이런 질문 하면 안 되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참기로 했다. 왠지 이대로 얘기하다 보면 길어질 것 같고, 그 아저씨들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얘가 왜 내 방에서 나왔는지는, 나중에 실비아한테라도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뭐, 좋아. 그보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왜, 왜? 무슨 일로?"

"중요한 일로. 아참."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의 손목을 잡아끌려 했다가, 나는 자리에서 멈춰 서서 레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왜, 왜 그래 또."

별일 아니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좀 마라. 대체 감정 공유는 왜 안 끄는 거야? 나까지 부끄러워 죽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레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버핏 스웨터에 긴 바지. 덕분에 피부를 거의 노출하지 않고 있었지만, 얼굴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이왕 데려가는 거, 서프라이즈도 중요하겠지?

"흠."

"히응······."

그렇게 생각한 내가 두 손으로 그 긴 귀를 살며시 잡자, 레이가 몸을 움찔 떨더니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야. 바들바들 떠는 게 귀엽기는 하지만 말이야. 딱히 키스하려는 거 아니거든?

나는 인벤토리에서 챙이 넓은 큰 모자를 하나 꺼낸 다음, 레이의 머리에 푹 눌러 씌워줬다. 귀는 물론, 그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도록.

"햐······으, 으읏!"

모자가 닿는 감촉에 살짝 목을 움츠렸던 레이는, 이윽고 자기가 뭔가 단단히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날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노려보지 마라. 키스도 해주면 되잖아?

"꺄악! 무, 뭐하는 거야?!"

노려보는 레이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레이가 화들짝 놀라서는 몸을 뒤로 뺐다.

"응? 키스해달라는 거 아니었어?"

"아니었어!"

"그래?"

"그······너 또 나 가지고 놀고 있지!"

아니. 그러니까 왜 꼭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면서 그런 말을 외치는 건데? 네 나름의 가드 기술이니?

내면의 가학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게 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참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끝이 없겠네.

"뭐, 장난은 이쯤하고. 따라와 줘. 진짜로 중요한 일이 있어."

"뭐, 뭐야 진짜······."

레이의 손목을 잡고, 나는 그대로 아저씨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는 도중, 레이에게 간략하게 상황 설명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니까 말이야.

"알았지? 어쩌면 네 과거 얘기도 조금 해야 할지도 몰라. 최대한 자세한 얘기는 나오지 않게 하겠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이것도 복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나도 알아."

아까와 달리 확연히 말수가 줄어 버린 레이.

잡고 있는 손목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 떨림을 통해, 레이가 얼마나 바프라를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레이의 감정을 직접 느낄 수 있었지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감정 공유를 받고 있는 나조차도 정신을 똑바로 안 차리면 공포에 잡아 먹혀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정도 공포감을 가지고도 나한테 사정을 전부 설명해주고, 심지어 복수까지 꿈꾸고 있었다니.

상식 없는 철부지라는 인상이 강했던 레이가 조금 다시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 준비됐어?"

"······됐어."

문 앞에 서서 마지막 확인을 한 다음, 나는 아저씨들이 기다리고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안의 광경을 본 순간, 레이는 비명을 질렀다.

아니. 바프라로 인한 트라우마가 자극받아 버렸다든가 그런 건 아니고.

"꺄아아악! 너, 너, 너 소, 속였······! 나한테! 나랑! 이! 이런 게 하고 싶은 거야아?!"

"진정해! 아니야! 아니니까 진정해! 야 이 아저씨들아! 그새를 못 참고 섹스하고 있냐?!"

방안에서 난교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다 같이 같은 공간에 모여서 하는 것일 뿐 난잡하게 하는 건 아니고, 각자 자신의 파트너하고만 하고 있으니 난교라고 정의하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구원 님! 허억! 허억! 그냥 섹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표현인 것 같소!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을 재확인하는 행위를 나타냄과 동시에 증오스러운 걸레신을 능욕할 수 있는 멋진 말이 있지 않소! 콘돔 섹스라고 해주시오!"

"적어도 허리를 멈추고 말해!"

"하하핫! 미안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이 정도로 멈추지 않는다오!"

다른 아저씨들은 다 됐으니까, 저 아저씨 하나만 죽여 버리면 안 될까? 안 될까요 여신님?

"레이. 이건······."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담으면서, 나는 레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내가 난교 파티를 위해 끌고 온 게 아니라는 걸 알자 마음이 놓였는지, 레이는 이미 진정해 있었다.

심지어 시선이 난교 파티장에 향해 있기까지 했다. 살짝 더러운 걸 보는 눈으로 보고 있기는 했지만.

"왜 저 사람들 것은 너처럼 크기가······으읍! 읍!"

야. 이 상식 없는 아가씨야!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지금부터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사람인데, 심지어 앞으로 마음껏 섹스에 빠져 살아야 하는 아저씨들인데, 쓸데없이 상처 입혀서 어쩌려고 그래?!

넌 그냥 보고 있지 마라! 아니. 나도 보고 있을 생각은 없지만!

"허억. 허억. 오, 오래 기다리셨소."

그렇게 뒤를 돌아서 레이의 눈을 가리고 한동안 기다리고 있자니, 겨우 등 뒤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소리만 듣는 건데도 숨결이 더러워.

"옷도 챙겨 입었어?"

"입었습니다."

"크흠. 그, 그래. 좋아. 그러면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지. 자식을 낳은 후로도 섹스하는 건 금기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

"······네. 그랬지요."

팍팍 떨어지는 의욕을 어떻게든 다잡고 나서, 나는 레이를 앞으로 한 걸음 나오게 했다.

"그러면 이건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레이가 눌러쓰고 있던 챙 넓은 모자를 벗겼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8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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