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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46화 (1,03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6화 >

    "너, 너, 너 이거······!"

    얼마나 당황했는지 내 물건에 삿대질까지 하면서 말을 더듬는 레이.

    그 강한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서 나까지 한순간 머릿속이 혼란해졌지만, 그나마 레이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당혹감을 어느 정도 상쇄시킬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해주네 마네 하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

    "이게 왜? 말했잖아? 혼자서 해결했다고. 너도 느껴질 거 아니야? 그야 힘내서 다시 흥분감을 끌어올리는 것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혹시 하고 싶어?"

    "그런 거 아니······으으으읍!"

    "야. 소리 좀 줄이라니까. 실비아 깬다. 너도 쟤랑 얼굴 마주치면 서먹할 거 아니야?"

    내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자, 레이는 날 노려보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너 혹시 나 갖고 장난치고 있어?"

    그리고 잠시 후 내뱉은 말은, 웬일로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어차피 얘한테 감정을 숨기는 건 불가능하니,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고 있어. 재미있잖아?"

    "하나도 재미······으읍!"

    "소리 좀 줄이라니까. 너도 느껴지지 않아? 내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거."

    "······그게 뭐 어쨌는데?"

    역시 그 감정을 느끼고 내가 장난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레이는 내 말에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고 그렇게 대꾸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을까?

    나는 가볍게 혀를 풀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같이 있으면 즐겁다. 그러니까 좀 더 이 사람과 있고 싶다.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는 단계라는 건,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너는 어땠어? 날 좋아하게 될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같이 있는 게 좋다고, 나랑 같이 있고 싶다고, 그렇게 생

    각하지 않았어?"

    "그, 그······!"

    그리고 역시나 이런 주제에는 면역이 없는 건지, 레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굳어져 버렸다.

    이 반응을 봐서는, 자기도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네. 개별 행동을 할 때도 억지로 날 졸졸 따라오려는 경향이 있었으니 해본 말이었는데.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그치? 나도 나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야. 널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읏?! 나, 나 갈 거야!"

    계속되는 내 말에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레이는 내 가슴을 확 밀치더니 황급히 문 쪽으로 달려갔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귀엽기는."

    "으으읏!"

    그런 레이를 더욱 몰아붙이자, 레이는 새빨개진 얼굴로 날 한 번 노려보기만 하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잘자."

    문을 쾅 닫고 사라지는 레이의 뒷모습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후, 나는 이번에는 철저하게 문을 잠갔다. 학습하는 남자 구원이라고 불러다오.

    그나저나 드디어 한 건 해결인가.

    아니. 진짜로 레이랑 장난치는 건 즐거웠지만 말이야.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조금 피로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더더욱 그랬다.

    성에서 있었던 펠리시아의 폭주 사건에, 아라크네 클랜에서는 미리엘과의 신경전. 그 이후에 바넷사하고 가벼운 장난을 친 다음에 여기에 돌아와서 있었던 저 녀석과의 일까지. 이 전부가 겨우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다.

    뭔가 다시금 돌이켜보니 괜히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어서, 나는 그대로 침대로 다이빙해 잠이나 자기로 했다.

    어차피 저 녀석이랑 감정 공유가 켜져 있는 상태에서 실비아랑 이 이상 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구, 구원니이임······."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린 나였지만, 아무래도 여신님께서는 아직 내게 수면을 허락하지 않으실 모양이었다.

    "시, 실비아?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내 질문에, 실비아는 드물게도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저, 저 사람······아직도 저랑······."

    아니. 달리 생각하면 이것도 대답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가. 그때부터 깨어나서 자는 척하고 있었구나. 레이 그 녀석. 그러니까 목소리 좀 줄이라니까!

    "실비아. 그게 말이지. 어차피 나중에는 쟤도 실비아가 여자라는 걸 알 테고, 그러면 오해 같은 건 말끔히 풀릴 거잖아?"

    참고로 말하자면 레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결정은 아까 실비아랑 뒹굴면서 간단하게 끝냈다.

    "지, 지금 밝히는 건······안 됩니까아?"

    내 말에는 무조건 절대복종하는 실비아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니. 진짜 어지간히도 레이랑 그런 식으로 얽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뭐, 그 고생을 했으니 어련하겠냐마는.

    하지만 말이야. 지금 네가 여자라는 걸 밝히면 여러모로 문제가 된단 말이지.

    일단 레이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쟤가 바프라를 증오하는 것도 맞고, 날 좋아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녀석의 사고 회로는 기본적으로 이쪽 세계 사람의 것이란 말이지. 그나마 바프라의 묘한 교육 정책 때문에 여러모로 상식이 어긋나 있는 만큼 편견은 더 적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진짜 정체를 완전히 받아들여 줄 거

    라는 확신은 아직 부족했다.

    물론 일단 실비아가 여자라는 것만 밝히고 우리의 진짜 정체는 숨긴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니었다. 그건 바로.

    "네가 여자라는 걸 지금 밝히면, 레이 쟤가 말실수 하나 없이 그 비밀을 끝까지 숨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 레이 그 녀석, 암살자 코스프레 하고 다니는 주제에 조심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단 말이지.

    그나마 다른 사람하고는 말도 잘 안 한다는 점은 다행이지만, 적어도 헬레나한테는 바로 들킬 거야.

    "그, 그러엄······!"

    내 단순한 질문에, 실비아는 절망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조, 조금만 더 참자?"

    "으아아아······!"

    "지, 진정해! 실비아. 안아줄까?"

    "흐야응?! 흐야아아······!"

    결국 그날 밤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오열하는 실비아를 달래주는데도 한참이 걸려서, 나는 동이 트는 시간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형님. 원하시던 일은 잘 해결하고 오셨습니까?"

    형님이라고 하지 마. 이 아저씨야. 우리 애들이랑 며칠 있다가 오니까 또 적응 안 되네.

    아무리 섹스에 빠진 이 아저씨라도 오늘 같은 날까지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식당에는 파란이 먼저 앉아 있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잠을 늦게 잔 데다가 도중부터 힐링 섹스의 효과도 못 받아서 컨디션이 심히 안 좋았다. 하지만 오늘은 은사모의 모임이 있는 날.

    늦잠을 잘 수도 없어서,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조금. 그나저나 모임은 오늘이었지?"

    "네. 하지만 모두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그리고 낮에는 정말로 물자 보급 루트 확보를 위한 회의를 할 생각입니다. 진짜 모임은 저녁부터 시작되니, 그때 메이드를 보내서 형님을 부르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쉬고 계셔주십시오."

    하긴 그런가. 아무리 은사모 모임을 위한 허울이라고 해도, 물자 보급을 위한 모임이라고 한 이상 그에 관한 회의를 안 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은사모 같은 세계의 윤리관에 반하는 모임을 낮부터 대놓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 그럼······."

    "앗······!"

    가서 잠이나 더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일으킨 순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날 보고 저렇게 깜짝 놀란 소리를 낼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지만.

    "잘 잤냐?"

    "으읏?!"

    레이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자, 레이가 두 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샤샤샥하고 뒷걸음질했다.

    야. 그러니까 그런 포즈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러면 괜히 가슴만 강조된다니까?

    그리고 대체 뒷걸음질은 왜 치는 거야?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다.

    "왜 그래?"

    "또, 또 날 가지고 놀 생각이지?!"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레이는 부끄러움도 없이 폭탄 발언을 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하지 마 이것아!"

    너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 있기는 하는 거야?! 이 상식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애초에 그 포즈는 뭐야?!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말로 가지고 놀았잖아?! 왜 몸을 그런 식으로 가리는 건데?!

    이거 설마 알면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호오. 형님께서는 그런······."

    저거 봐! 벌써 오해하는 놈이 생겼잖아?!

    하지만, 대처 능력 마스터인 날 우습게 보면 곤란하지.

    "아니. 이 녀석 나한테 고백 성공했다고 들떠서 장난치는 거야."

    "무······!"

    "고백 성공이라 하심은?"

    "간단히 말해서. 너희와 뜻을 함께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는 얘기지."

    "그것참 든든한 얘기로군요."

    너희가 자유롭게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나는 바프라를 칠 거다.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은근슬쩍 떠본 거였지만, 파란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이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리는 없으니, 역시 이 녀석도 나와 뜻을 같이할 결심을 한 거겠지.

    아마 성문에서 보여줬던 실비아와 쓰레온의 놀라운 전투력이 그렇게 결심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거고.

    "그렇지? 실컷 든든해해라."

    딱딱히 굳어져 있는 레이를 내버려 두고, 나와 파란은 서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교환했다.

    사실 수염 난 아저씨랑 이런 미소를 교환하는 건 그다지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이만."

    "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섹스하러 가는 거 아니다.

    하지만 부정해 봤자 딱히 의미도 없는 것 같아서, 나는 대충 손을 흔들고 레이와 함께 식당을 빠져나왔다.

    "너, 너 뭘?"

    "뭐가?"

    "내, 내가! 고백!"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아? 우리가 사귀는 거 다 들켰으니까, 이제 남들 앞에서도 얼마든지 알콩달콩할 수 있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레이의 몸을 끌어안고 그 뺨에 내 뺨을 부드럽게 비볐다.

    "으읏?! 으······으으!"

    그러자 레이는 또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나한테는 얘가 좋아하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굳이 감정 공유가 아니더라도, 가슴 너머로 전해져오는 시끄러운 심장 박동만으도로 충분히.

    뭐, 감정 공유도 여전히 켜져 있었지만. 이것 때문에 괜히 나까지 부끄럽고 떨리네.

    다시 감정 공유를 끄게 유도해 볼까? 자기도 컨트롤이 마음대로 안 되는 모양이니,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레이."

    뺨을 떼고 그윽한 눈빛을 보내며 그 이름을 부르자, 레이가 갑자기 내 가슴을 확 밀쳐냈다.

    "두, 두고 봐! 이번에는 마음의 준비를 못하고 갑자기 만나서 그런 거니까!"

    그리고는 마치 조무래기가 도망가면서 하는 전형적인 대사 같은 말을 외친 후, 그대로 자기 방 쪽으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따라가야 하나?

    "따, 따라오지 마!"

    물론 나도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레이는 기겁하면서 방문을 쾅 닫아 버렸다.

    아니. 이번에는 장난한 게 아니라, 나도 쟤 감정이 느껴지니까 말이야. 겉으로만 저러지, 내가 장난쳐주면 속으로는 은근슬쩍 좋아하거든. 그래서 더 장난쳐주려고 했지.

    하지만 이래서는 소용이 없겠네.

    방문이 확실히 잠겨 버린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발걸음을 돌려 실비아가 잠들어 있는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못 잤던 잠을 자고 나니, 어느샌가 시간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 파란이 말했던 대로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니, 못 보던 면면들이 넓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문제는 못 보던 얼굴뿐만이 아니라, 익숙한 얼굴들도 눈에 띈다는 거지만.

    "형님도 오셨군요!"

    "돌아왔었네요."

    신과 유리. 얘들이 여기에 있는 건 알겠다. 어차피 얘들도 은사모의 회원이니까.

    쫓기는 몸인 주제에 이렇게 남들 앞에 함부로 모습을 보여도 되는지는 조금 의문이었지만, 콘돔 섹스까지 알려주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믿을만한 사람들만 모인 거겠지.

    "근데 너희는 왜 있냐?"

    "커플들이 모이는 모임이라고 들어서!"

    문제는 왜 쓰레온이랑 헬레나까지 여기에 있냐는 거지.

    "아······그러냐."

    "그 표정은 뭐야?! 우리보다는 네가 더 이질적이잖아?! 커플 모임에 짝도 없이!"

    이 녀석. 커플이 됐다고 들떴군.

    게다가 나는 유일하게 데려온 애인이 남장 중인 실비아니, 자기가 이런 식으로 날 놀릴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즐기고 있어.

    역시 쓰레온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놈이야.

    "그래? 레이라도 데려올까?"

    뭐, 그래 봤자 나한테는 안 되지만.

    "뭐? 갑자기 그 여자 이름이······서, 설마!"

    "훗."

    놀란 놈의 얼굴에 코웃음을 지어주는 것으로, 나는 이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너, 너라는 놈은 대체······!"

    "어머! 레이랑! 축하해요!"

    자기가 먼저 걸어온 승부에 패배하고 신음하는 쓰레온이었지만, 그런 쓰레온과 달리 옆에 있는 헬레나는 기쁨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쓰레온한테는 아까운 사람이야. 어쩌다 이런 사람이 쓰레온이랑······아, 원인을 따져보면 나 때문에 섹스하게 돼서 이렇게 된 건가.

    "그쪽이야말로 결국 맺어졌나 보죠? 축하해요. 헬레나 씨가 이 못난 놈 좀 잘 보살펴주세요."

    "어머. 그런. 오히려 제가 레온 씨에게 의지하고 있는걸요······."

    내가 인사치레를 건네자, 헬레나는 부끄러워하면서 미소 지었다.

    역시 쓰레온한테는 아까운 사람이야.

    본의 아니게 헬레나와 쓰레온의 큐피트 역할을 한 건, 내가 여기 내려와서 한 실수 중 최악의 실수 아닐까?

    "너, 너, 좋은 놈이구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지, 쓰레온은 감동 받았다는 듯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야. 이거 놔 이놈아!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야!

    "파란. 이자가 바로······."

    "음. 내가 평생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사람일세.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해주셨지."

    쓰레온과 그런 쓸모없는 얘기를 하고 있자니, 우리 뒤로 아저씨들의 그런 얘기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사전에 대충 얘기는 해놓은 모양이었다.

    "자, 그럼. 주연들이 모두 모였으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파란의 그 말을 시작으로, 다시 돌이켜 생각하기도 싫은 인생 최악의 시간이 시작되었었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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