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4화 >
"흐억······흐억······헉······지, 진정했냐?"
어딜 노리는 게 아니라 그냥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팔에, 감정이 실려서 그런지 내 힘으로도 쉽게 제압이 안 되는 힘까지.
정확히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올 때보다 오히려 더 제압하기 힘들어서,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폭주한 레이를 제압할 수 있었다.
설마 섹스 중에 섹스 외의 운동으로 숨이 가빠질 날이 올 줄이야. 이게 바로 인기남이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다 보면 들을 수 있다는, ‘너 그러다가 누구한테 찔린다.’라는 사태인가.
······그거랑은 조금 다른가? 일단 단검에 몇 차례 찔리긴 했는데 말이야. 뭐, 그것도 힐링 섹스 때문에 금방 나았지만.
그나저나 얘는 나한테 힐링 섹스 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하다니. 진짜 여러모로 위험인물이라니까.
혹여나 또 폭주할 것을 대비해 이번엔 아예 단검까지 빼앗아서 인벤토리에 숨겨놓고, 나는 겨우 제압된 레이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했다.
등을 돌리고 엎드린 자세였던 몸은 어느샌가 반 바퀴 돌아서 날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었고, 두 팔은 손목을 잡힌 채 침대에 억눌리고 있었다. 게다가 날 노려보는 눈가에는 살짝 눈물까지 고여 있어서, 겉보기에는 완전히 그렇고 그런 상황처럼······.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죽어. 바람둥이."
또 그거냐. 아니. 그야 물론 네 생각 안 하고 평소에 하던 것처럼 섹스를 해댄 건 미안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너한테 바람둥이 소리 들을 일은 아니지 않냐?
"야. 일단 하나부터 차근차근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첫째로, 난 너랑 딱히 아무 사이도······."
"으으읏!"
"그래. 처녀는 가져갔지. 그건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레이가 눈에 더욱 힘을 주고 노려봐서, 나는 황급히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고. 이대로 코가 꿰일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지만, 진짜로 책임감을 아예 안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니라고.
이 녀석한테 사도 임명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데에는, 그런 책임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친 감이 있었고.
"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우리가 서로 사귄다든가, 그런 관계는 아직 아니잖아? 그러니까 딱히 너한테 바람둥이라고 불릴 이유는······."
"죽어."
아니. 그렇다고 바람둥이만 쏙 빼고 똑같이 말하는 건 너무하지 않냐?
안 되겠어 이거. 우선은 뭐든 좋으니 뭔가 다른 말을 내뱉게 하지 않으면.
"그리고 말이야. 애초에 내가 바람둥이면 실비아랑 하려고 했던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 원인이 완전히 나한테 있는 만큼 엄청나게 치사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목적 달성을 위해 이런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 호모한테 들었어?!"
"오냐. 전부 들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정확히 적중해서, 드디어 레이는 "죽어." 와 "바람둥이." 이외의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게 됐다.
"그, 그 호모······! 죽······!"
"죽이지 마라. 내가 말하게 한 거니까."
얘는 무슨 여자애가 말버릇이 이래.
아니. 딱히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이 세계 자체의 문제지만.
진짜 정감 안 가는 세계라니까. 위쪽에 여신님 세계 좀 본받아라. 섹스 앤 피스. 얼마나 좋아?
"아무튼 그러니까 이번 일은 서로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걸로 좋게 넘어가자고. 알겠지?"
"······."
야. 그렇게까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 짓지 말라고.
그야 나도 내 잘못이 훨씬 크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일단 이렇게 강제로라도 화해 무드를 조성하지 않으면 너 또 "죽어. 바람둥이." 같은 말만 하면서 대화도 안 하려고 할 거 아니야.
"싫어? 더 싸우고 싶어?"
"······그런 건······흥읏······흣······지,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 기분 좋아지면 조금 기분이 풀릴 수도 있으니까."
살짝살짝 허리를 움직이자, 레이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레이가 몸을 반 바퀴 돌려 나랑 마주 보게 된 와중에도, 어찌어찌 삽입은 풀리지 않고 있었거든.
"그럴······응흣······흐으으읏?!"
처음에는 눈을 부라리며 버텨보려 했던 레이였지만, 제대로 된 성 경험도 없는 애가 내가 주는 쾌락에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레벨 차이까지 있으니까 더더욱.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레이는 허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가벼운 절정에 달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있게 둘 내가 아니어서.
"아흣······이, 이 바람둥이······이런 건······흣······."
또다시 손목을 잡아서 베개 옆에 억누르고, 나는 레이의 가는 목덜미에 키스하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살짝 옆으로 꺾어서 귓불을 물고, 그대로 뺨으로 이동에서 가볍게 키스.
입술에 하는 키스는 잠시 보류하고, 나는 레이의 이마에 그대로 내 이마를 맞댔다.
"이래도 화가 덜 풀렸어? 아직도 싸우고 싶어?"
그리고 지근거리에서 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보자, 레이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게 확실히 보였다.
"이런 건······하으······헬레나가 할 때는 이렇게까지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대답을 피하다니. 얘도 어지간히 고집불통이네.
그리고 헬레나 얘기는 또 왜 나와? 혹시 쓰레온이랑 헬레나랑 시연하는 거 봤을 때 얘기하는 거야?
"그거랑 비교하면 곤란하지. 난 훨씬 더 잘하니까."
넌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제대로 기억 못 하겠지만, 네 처녀를 가져갔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반응이었다고.
아니. 애초에 전에 욕조에 쳐들어왔을 때, 내가 해준 애무만 생각해 봐도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는 알 수 있잖아?
"어, 얼마나 해댔길래 이렇게 되는 거야?! 이 색마!"
야! 색마는 너무 하잖아! 색마는! 안 그래도 내가 여기 와서 하는 짓이 딱 그런 느낌이라 신경 쓰고 있었는데!
적어도 성자님이라고······아니. 그건 그거대로 미리엘 생각나서 좀 미묘하지만. 아무튼 색마는 그만둬!
"얼마나 해댔는지는 너도 잘 알았잖아?"
색마라는 단어에 데미지를 입은 나는 조금 심술을 부려보기로 했다.
그러자 레이는 어지간히 약 올랐는지 날 매섭게 노려보더니.
"이······흐극······."
야. 야. 그렇다고 울 것까진 없잖아.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 네가 그 고생한 거 알면서 또 괜한 말을 해서는.
"그, 그래도 섹스만 하다 온 건 아니라고! 제대로 목적도 달성하고 왔어! 우리 감정 공유를 끊을 방법을 확실히······."
그러고 보니, 지금 감정 공유 안 되고 있지 않아?
섹스도 전에 느꼈던 것처럼 흥분이 두 배로 증폭된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아니고, 얘가 이렇게 눈가에 눈물을 고이고 있는데도 그 감정 역시도 직접 전염되는 느낌은 아니고.
"······뭐야. 계속 말해."
"아니. 네 쪽에서 제어할 수 있으니까 네가 다크 엘프의 능력을 각성하고 차단하면 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이미 한 것 같다? 혼자서 어떻게?"
"······몰라. 그런 거."
역시 알고 한 건 아닌 건가.
그렇다면 역시······내가 보내오는 지속적인 흥분을 견디다 못해 무의식적으로 차단해 버렸다는 게 제일 그럴듯한데.
자고 있는 실비아의 위에 올라탔을 때까지는 흥분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니, 아마 딜도를 삽입할 결심을 하지 못하고 울면서 망설이고 있을 때에······어째 진상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내가 점점 나쁜 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역시 기분 탓은 아니겠지?
"아, 아무튼! 차단됐으면 잘됐네! 저쪽에 다녀온 게 헛걸음이 되어 버렸지만, 전혀 문제없어. 하하. 하하하."
이 이상 생각하면 아무리 "어차피 나는 쓰레기니까 문제없어."라는 말로 정신무장 하고 있는 나라고 할지라도 양심이 찔려서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황급히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미, 미안한 만큼 앞으로 잘해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래서 지금부터가 진짜 본론인데. 결국 너 나 좋아하는 거지?"
사실 이 얘기도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고민을 좀 했었지만, 조금 전에 그런 소동을 벌일 데다가 이렇게 분위기가 와장창 깨져 버리기까지 하니 오히려 말하기 편하기는 했다.
"······몰라."
순순히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니면 대답을 못 하고 부끄러워하거나. 그런 식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레이의 대답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이런 상황에서 좋아한다고 대답하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모른다니 너······그런 짓까지 해놓고?"
물론 내 쪽에서 보내져 오는 흥분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힘들었겠지만, 레이가 보인 행동은 내게 마음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이게, 좋아한다는 거야?"
그러니 당연히 자기 마음 정도는 깨닫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레이는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가 없을 때 보인 행동뿐만 가지고 그러는 게 아니다. 내가 저쪽으로 건너가기 전에도, 레이는 분명 날 좋아하는 티를 대놓고 내고 있었다.
섹스 중인 파란 방에 다녀왔을 때 내 물건이 커진 걸 보고 질투하기도 했고, 내가 고백하는 척을 했을 때 보인 반응도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감정에 의심을 품을 수가 있지?
"생각해 봐. 너 내가 다른 여자랑 한다는 생각에 질투했다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됐지만, 그래도 나는 일단 차근차근 말해 보기로 했다.
얘가 상식이 심하게 없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됐지.
"그건······."
"그걸로도 확신이 안 서면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섹스한다고 생각해 봐. 너 단검 들고 죽이려고까지 했잖아?"
좋아하는 게 아니면 그런 행동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레이는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네가 다른 여자한테 느꼈던 그 감정은······그 감정하고는 다른 것 같단 말이야.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 아니야?"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왜 갑자기 레이가 자기감정에 확신을 못 가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차. 그런 거였나. 어쩌면 얘가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실비아랑 바람까지 피우려고 했던 것도, 단순히 계속해서 전해져오는 흥분에 질투해서가 아니라······.
"레이. 그건 아마도······."
"아마도 뭐······응으읍?!"
뭔가 말하는 척하면서 방심시키고 나서, 나는 곧바로 레이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완전히 허를 찔렸는지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전신을 딱딱하게 굳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부터 혀를 쓰지는 않는다. 우선은 입술만을 움직여서 부드럽게. 천천히 서로의 입술 감촉만을 느끼게 하자, 바싹 긴장해 있던 레이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이 빠지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혀를 레이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응흐읍······읏······아음······응······하아······하아······."
긴 딥 키스가 끝나고 나서, 나는 잠깐 떨어졌다가 한 번 더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네가 아직 이런 경험을 못 해봐서 그런 걸 거야. 어때? 이제 좀 내가 느꼈던 그 기분이 느껴지는 것 같아?"
"아······."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면 레이는, 그제야 내 의도를 깨달았다는 듯 가벼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 보려는 건지, 그 왼쪽 가슴을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었다.
"그런······것 같아."
그리고 손을 조물조물 가볍게 움직이면서······야. 다 좋은데 손은 안 움직이면 안 될까?
움켜쥐는 것까지는 어떻게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움직이기까지 하니까 도저히 그쪽으로 시선을 안 줄 수가 없잖아. 분위기 유지하기 힘들다고.
"그러면 역시 난······널······."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던 레이는, 문득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넌?"
그리고 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잘 구슬려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건 또 귀신같이 눈치채네.
아니. 말해두지만, 이번에는 쓰레기 같은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고. 난 다만······.
"나랑 있을 때 넌······이런 감정을 느낀 적······없지?"
역시나. 이 단정하는 말투. 역시 이 녀석이 그렇게 실비아랑 바람피우겠다고 날뛴 건, 단순히 내가 다른 여자랑 온종일 섹스하고 다녀서가 아니었다.
자신과 있을 때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낀 적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비교되니까 더 슬퍼지고 더 질투하게 된 거다.
"지금도······."
"그래. 없어. 아직은."
어차피 늦으나 빠르나 얘한테는 내 감정을 전부 숨기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차단되어 있다고 하나, 정확히 컨트롤할 수 없는 이상 감정 공유가 또 언제 다시 켜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아예 대놓고 그렇게 말하기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너한테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
"그, 그게 무슨······."
"네 마음에 대답해주고 싶다는 얘기야. 그러면 안 돼?"
어차피 사도 임명은 하기로 했고, 방식도 정상적인 방식으로 하기로 정했으니, 난 얠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순서가 조금 뒤바뀌기는 했지만, 그러면 뭐 어때? 이런 식으로 발전해나가는 관계도 있을 수 있는 거잖아?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4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