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41화 (1,025/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1화 >

밤이 되면 저쪽으로 다시 건너가야 한다.

그러기 전에 마지막 저녁 식사를 지상에서 마치고, 나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우리 애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 뒤에서, 갑자기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바넷사. 깨어났구나? 괜찮았어?

아니. 마음 같아서는 깨어날 때까지 같이 있으면서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저녁 시간도 다가오고 있었고, 너무 오래 있으면 다른 애들한테 미안하잖아? 바넷사도 괜히 자기가 정신을 잃는 바람에 다른 애들과 있을 시간을 더욱 줄였다면서 죄책감을 가질 것 같고.

그래서 옆에 간단한 쪽지 하나만 남긴 채로 먼저 방에서 나왔었거든.

"구원 님께서 말씀하신, 보급 물품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눈짓으로 그런 마음을 바넷사에게 전했지만, 바넷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한번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말한 보급 물품이라니. 아, 다른 애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구나? 지금까지 네 모습이 안 보였던 이유가 그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지?

"그래. 고마워."

잠깐. 아주 잠깐 내 마음속의 장난꾸러기가 고개를 내밀었지만, 나는 바넷사의 말에 맞춰주기로 했다.

너무 괴롭히면 불쌍하잖아.

"아, 바넷사 씨. 이제 괜찮아지셨네요?"

그러고 보니 이제 귀여운 말투 안 쓰네? 아직 하루가 다 지나가지 않았는데도.

뭐, 이 무뚝뚝한 집사님이 귀여운 말투로 야한 말까지 하는 것까지 들었으니까, 나도 딱히 더 욕심은 없지만. 아니. 난 처음부터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했었고.

"음? 겉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심각했었나?"

"크, 크흠! 흠! 네. 문제없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디아나는 천사님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반문했지만, 바넷사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얼버무렸다.

과연. 디아나가 있어서 원래 말투를 쓰는 거였군. 하여간 얘도 디아나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그러면 준비도 다 됐다고 하니, 슬슬 다시 구미호 마을로 가볼까?"

디아나 앞에서 이미지가 망가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바넷사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넷사가 준비한 물건을 인벤토리에 챙긴 후, 걸어서 길드까지. 그리고 길드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서 구미호 마을로 도착하고 나니, 어느샌가 하늘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차피 밤도 늦었으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그리고 나는 지금, 어려지는 팔찌를 발동한 채 여장까지 하고 있었다.

구미호에게 노려지는 걸 막기 위해서라는 이유였지만.

"저얼대! 안 돼요!"

이미 구미호한테 붙잡혀 버렸단 말이지.

천사님의 가슴에 뒤통수가 파묻힌 채로 품에 안겨서, 나는 땅에 발도 디디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었다.

아니. 뭐, 솔직히 행복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어? 레이아씨! 그 아이는?"

그리고 그런 우리 앞에, 언젠가 나한테 혼쭐이 난 적 있는 구미호 소녀 리사가 나타났다.

"제 거에요! 안 줄 거에요!"

······처, 천사님? 그냥 물론 전 천사님 것이고, 누구한테 뺏길 생각도 없지만요.

"피, 필요 없어요! 그런 거!"

"누가 그런 거야! 누가!"

저건 또 혼쭐이 나 봐야 정신을 차리려고 그러나.

"진짜 누구에요? 이 건방진 꼬맹이."

오호라.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오냐. 너 어디 한번 성자의 손길로 혼쭐······!

"조금 사정이 있어서 잠시 맡게 된 아이에요. 리사 씨는 금방 돌아갈 테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혼쭐을 내주려고 했지만, 내 마음을 읽었는지 천사님이 날 끌어안은 채 몇 걸음 뒤로 물러나시는 바람에 아쉽게도 내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크윽! 내가 지금 애만 아니었어도! 팔이 조금만 더 길었어도 저 건방진 녀석이 바닥에 기어서 히익히익 비명 지르는 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흐으응. 아! 그러면 레이아씨! 또 금방 돌아가는 거죠?! 그때는 저도 같이······!"

자기가 천사님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는지, 녀석은 금방 내게서 관심을 끊고 천사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안 돼요. 리사 씨에게는 아직 너무 일러요."

"하지 마안."

이 녀석. 천사님한테는 애교 부리는 거 봐라?

하긴. 우리 천사님 앞에서는 누구든 응석 부리고 싶어지기는 하지.

"안 돼요. 그리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어째선지 천사님은 날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뭐를요?"

"그, 그러니까······위에 가서 다른 남자를 만나도, 구원 씨한테 느꼈던 그 쾌감은 절대 느낄 수 없을 거라고요."

처, 천사님?! 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다른 구미호들에게 노려질까 봐 걱정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런 말을 하시면 괜히 더 구미호들의 이목을 제게 집중시키는 게 돼 버리잖아요!

"따, 딱히 그런 생각 안 했어요! 레이아씨 바보!"

하지만 천사님의 그 말에 정곡을 찔리기라도 했는지, 리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후다다닥 도망가 버렸다.

"처, 천사님?"

"죄송해요!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저 아이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요!"

그, 그래요? 하지만 왠지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요.

설마 저 녀석, 진짜로 내가 준 쾌감을 못 잊어서······.

"구원 씨. 이상한 생각 하시면 안 돼요?"

"그, 그럼! 안 하고말고! 할 리가 없잖아! 우리 천사님 가슴에 안겨서. 헤헷."

"구, 구원 씨도 차암."

폭신폭신한 꼬리가 내 다리를 살랑살랑 간질이는 감촉을 느끼고 있자니, 다른 애들도 차례차례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이쪽으로 넘어왔다.

다만 나중에 넘어온 셋 다 어째선지 이쪽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그래. 너희가 봐도 이렇게 천사님한테 안겨서 둥둥 떠다니면 이상할 것 같지?

"······자네."

그런 눈빛을 건네자, 대표로 디아나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응?"

"그 짧은 사이에 무얼 세우고 있는겐가?"

그리고 디아나는 눈에 질투를 가득 담아서 내 얼굴 노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얼굴 바로 옆의 풍만하게 눌려서 삐져나온 살덩이를 바라봤지만.

"그래요. 그래선 여장의 의미가 없어요."

"마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뒤에서 마틸다랑 사라가 만담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긴장감을 완화해주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아니. 이건 말이지."

"······구원 씨?"

천사님이 이상한 착각을 할 게 뻔했으니까!

"아냐! 진짜 아냐?! 이상하다?! 진짜 그런 거 아닌데?! 아, 그래! 감정 공유! 이거 감정 공유 때문일 거야!"

"그 다크 엘프 처자는 자네가 없을 때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방탕한 처자라는 말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오히려 섹스하는 법도 제대로 모를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이지만!

"아, 아무튼 그런 거 아니야!"

"변명은 필요 없네!"

내 변명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서, 결국 두 주먹을 불끈 쥔 디아나의 콩닥콩닥 세례가 또다시 작렬하게 됐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로 변한 상태여도 간지럽기만 했다. 뭐, 스탯이 변한 것도 아니니 당연한가.

아무튼 오자마자 그런 해프닝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구미호를 만나는 일도 없이 우리는 무사히 산의 정상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럼 구원. 조심해야 해."

"어디 다치시면 안 돼요?"

"무리하지 말고요."

"이 몸이 챙겨준 도구도 잘 기억해뒀다가 필요할 때 바로바로 꺼내 쓰게."

"응. 어차피 또 금방 돌아올 테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다녀올게!"

모두와 작별인사를 나눈 후, 나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크게 손을 흔들어준 후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지난번에는 어중간한 위치로 그림자 이동이 써진 바람에, 실비아가 있는 성문까지 가는데 한참이 걸렸으니까 말이야.

이번에는 실비아에게 신호를 부탁해서 정확한 위치로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실비아도 내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바로 연락을 받을 거다.

"구, 구원니임?!"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실비아는 연락을 받자마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오냐. 구원 님이다. 실비아. 지금부터 그쪽으로 갈 테니까 이쪽에서도 볼 수 있게 방 안에 불을 켰다 껐다 해줘."

"네, 네엣!"

"좋아. 확인했어! 그럼 이제부터 건너갈 테니까 불 꺼줘!"

대체 왜 이렇게까지 절박한 목소리를 내는 건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어차피 저쪽으로 건너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저기 파란의 저택이 있는 방향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깜빡이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끼고 있던 통신용 반지를 아래에 있는 우리 애들에게 던져주고 바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직후. 몸에서 마나가 쫙 빠져나가는 기분 나쁜 탈력감과 함께, 방금까지 나뭇가지를 밟고 있던 내 발아래의 감촉이 단단한 대리석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동시에, 후욱하고 짙은 냄새가 나 콧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냄새. 이 냄새는 마치······설마 위치가 살짝 어긋난 건가?

"구원니이이임!"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익숙한 감촉이 내 품에 안겨들어 왔다.

"실비아? 뭐야? 대체 왜 그래?!"

"구원니임! 보고 싶었습니다아아!"

얘가 자기 스스로 내 품에 안겼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멘탈이 깨져 있다니. 진짜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안 좋은 예감이 든 나는, 일단 방 안의 불부터 켜기로 했다.

그렇게 밝아진 시야를 통해 눈에 들어온 광경으로, 나는 조금 전에 느꼈던 야릇한 냄새의 정체가 내가 생각한 그 냄새가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레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특유의 검은 피부를 전부 드러낸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리까지 헤프게 벌린 상태로.

"어······음······실비아?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해줄래?"

"아, 아닙니다아! 그런 거 아닙니다아!"

아니. 실비아야. 그건 내가 자주 하는 대사고.

그리고 아니라니.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건지도 모르겠어. 네가 얘랑 그······했을 리는 없잖아?

"진정해. 진정하고 차분히 설명해 봐."

"우읏······네에······."

가녀린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진정시켜준 다음에야, 나는 겨우 실비아에게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

"잠깐! 뭔가! 뭔가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구원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곧바로 레이는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다.

"으응! 무, 뭐야 이 감정······이건 마치······우으······."

"다가오지 마십시오."

게다가 얼굴을 붉히고 뜨거운 시선으로 실비아를 바라보기까지 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실비아는 곧바로 레이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 그 녀석······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서, 설마! 실은 마을에 가서 다른 여자라도 만나고 있는 거 아니야?!"

"진정하십시오. 홀로 행동하시는 구원 님의 이동 속도는 빛과도 같습니다. 이미 저쪽에 도착하셨을 테니, 다른 분들을 만나고 계셔도 아무것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어떻게 이렇게 바로!"

"구원 님의 곁에는 수많은 여성분들이 계십니다. 그것 또한 이상할 것 없습니다."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레이와 달리, 실비아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반박했다.

실비아는 레이를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할 이유도 없었다. 심지어 레이는 실비아를 싫어하는 모양이니 더욱더.

구원 님께서 자신이 없는 동안 이 여자를 지켜보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따르기는 하겠지만, 혼란에 빠진 레이를 좋은 말로 다독여줄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대로 레이가 괜한 짓만 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대충 말 상대나 하며 지켜보고 있자.

그렇게 생각한 실비아였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또? 이렇게 계속? 대체 여자가 몇이나 있는 거야?! 어떻게 이런, 이렇게나?! 경쟁자가 대체 몇이야?!"

머리를 감싸 쥐고 혼란에 빠진 레이.

자신도 구원 쟁탈전에 당연히 참여할 생각이라는 듯 당당하게 경쟁자라는 단어까지 쓰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관심으로 일관하려던 실비아도 조금 입이 근질근질해졌다.

근질근질해졌지만, 괜한 말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실비아는 다시 레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인내하는 것은 오랜 기사 수행을 통해 익숙해진 실비아였다.

"으읏······하아······하아······."

그리고 점차 익숙해지기 시작했는지, 거칠게 몰아쉬던 레이의 숨도 점점 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적응할 정도면,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안심하려던 순간, 또다시 레이의 반응이 변했다.

"으읏?!"

갑자기 자기 다리 사이를 움켜잡고 주저앉아 버린 거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4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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