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38화 (1,022/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38화 >

    미리엘이 아까부터 계속 성자님 성자님 하면서 말 사이사이마다 날 찬양해도 내가 바보 취급당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지금도 미리엘에게 사도 임명이 스킬이 써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난 이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에 왔고, 그를 위해 앨리시아도 방 밖으로 쫓아냈던 거다.

    이 스킬이 써진다는 건, 적어도 미리엘이 내게 피해가 가는 일을 꾸미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니까.

    그리고 내 배를 찌르려고까지 했던 미리엘의 조교를 그렇게 빨리 확신을 가지고 끝낸 것도, 그 이후에 몇 가지 조치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걱정 없이 미리엘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있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조교를 마무리한 날, 미리엘에게 사도 임명이 써진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심리학 용어 중에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난 심리학자 같은 게 아니니 미리엘의 감정을 스톡홀름 신드롬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저택에 며칠 동안 감금되어서 나한테 조교 되는 동안, 미리엘은 내게 그러한 감정을 가져 버리고 만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렇게 사도 임명이 써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물론 사도 임명이 그냥 상대방이 날 좋아하기만 한다고 써지는 스킬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숨겨진 조건도 만족시켜야 하지만, 미리엘의 경우 그 조건이 아마 ‘용사에 대한 집착을 뛰어넘을 정도로 날 좋아하게 만들 것’이 아니었을까?

    뭐, 사도 임명이 써지는 지금도 미리엘이 그만큼이나 날 좋아한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미리엘이 내 조교를 통해 힘에 대한 집착을 포기한 건 사실이니까.

    아마 그런 이유로 조건이 만족됐다고 보고 스킬이 써지는 거겠지.

    이 사도 임명이라는 스킬은 여신님이 그렇게 강조할 정도로 제일 중요한 스킬이면서 사용 조건이 확실히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게 문제란 말이지.

    그나마 난 여기 오기 전에 여신님제 게임을 해봤으니 망정이지. 거기서 비슷한 스킬을 알고 오지 않았다면, 분명 지금까지도 조건을 몰라 애먹고 있었을 거다.

    호감도라든가, 호감도 락의 해방 조건이라든가, 나도 상대방을······어? 자, 잠깐만. 잠깐만 있어 봐. 어? 어?!

    "하아······쪽······음? 성자님?"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내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 굳어 버리자, 어느샌가 다시 내 앞에 무릎 꿇고 물건을 빨아주던 미리엘이 살짝 걱정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고 나서, 나는 아까 미리엘이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내렸다.

    "하핫. 설마 자기 책상 아래 기어들어 가서 이런 행동을 하게 될 줄이야. 사람 일은 모르는 일이군."

    미리엘은 그런 내 행동을 어떻게 착각한 건지, 특유의 시원한 미소와 함께 엉금엉금 기어서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계속해서 물건을 빨았다.

    뭐, 내가 그렇게 조교 했으니까 이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내 물건을 구석구석 꼼꼼히 핥아서 내 정액이나 자신의 애액을 청소해주는 미리엘. 원래라면 우리 애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황급히 바지를 끌어 올리거나, 아니면 이왕 이렇게 됐으니 미리엘의 청소 펠라를 즐기거나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 어느 쪽도 선택

    하지 못했다.

    왜 지금까지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걸까?

    아무리 그때 여러 가지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다고 해도 그렇지.

    심지어 이것 때문에 펠리시아에 대한 내 감정을 깨닫기까지 했었는데.

    얘한테 사도 임명이 된다는 건······나도 얠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다시 한번 미리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자신의 감정을 확인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나도 내가 떡정이라는 것에 약하다는 건 알아. 그렇게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리엘과 펠리시아는 경우가 달랐다.

    펠리시아는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대화도 많이 나눴고, 서로 그런 감정을 쌓아 올릴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얜 아니잖아?! 물론 같이 던전에서 모험을 한 적도 있지만, 차라리 그땐 얘보다 앨리시아랑 말을 더 많이 했으면 많이 했지. 얘한테는 그럼 감정을 가질 시간이 전혀 없었다고.

    "성자님.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 보면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부끄러워. 더 시키고 싶은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대로 충분해."

    응. 역시 아니야. 펠리시아 때랑은 달라.

    그때처럼 펠리시아의 마음이 절실히 느껴져서 안타깝다든가, 그런 감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미안한 얘기지만.

    물론 굳이 미리엘에 대한 감정을 평가하자면 호감이기는 하지만, 이게 연애 감정은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얘한테 호감을 가지는 건 어디까지나 앨리시아 때문에 생긴 아라크네 클랜에 대한 좋은 인상과 미리엘 자신의 시원스러운 성격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사라의 배다른 여동생이라는 점 때문이다. 뭐, 사라는 그냥 어쩌다 아빠만 같은 남남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거지, 연애 감정을 품고 있는 게 아니다.

    내 여자의 동생이라고! 동생! 물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섹스는 해버렸지만, 그런 흑심을 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째서 사도 임명이 발동한 거지?

    설마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모든 조건이 사실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던 거였고, 내 생각대로 사도 임명을 쓸 수 있었던 건 그냥 우연에 불과한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잖아?

    게다가 진짜로 내 착각이었으면, 여신님이 지적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렇게나 사도 임명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데다가, 내 마음도 읽을 수 있으시니 착각하고 있다는 것도 바로 아셨을 테니까.

    그러니 지난번에 여신님이 그에 관한 언급을 안 하신 시점에서······그러고 보니. 사도 임명을 적극적으로 쓰라고 하셨지.

    그때는 그냥 사도 임명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나? 하고 넘어갔지만, 혹시 여신님께서는 사도 임명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더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아니. 꼭 그래야만 해! 진짜로! 억울하다니까?! 나 진짜로 사라 동생한테 흑심 안 품었다고! 내가 어떻게······.

    "읏······."

    "응흣?! 응긋······하음······하아······또 깨끗이 해야 되겠네."

    아, 아니. 얜 또 왜?! 대충 깨끗이 했으면 그만하지, 왜 또 쌀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거야?!

    네가 그러니까 괜히 더 오해받을 것 같잖아?!

    진짜로 나 얘한테 흑심 안 품었어! 지금 싼 건 그냥 자극에 반응을 나타내는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에 불과해!

    "······적당히 하고 나와라."

    말해두지만, 지금 당장 나오라고 하지 않은 것도 이 쾌감을 더 즐기고 싶다든가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지금 얘를 컨트롤하는 원동력이 바로 조교에 있으니까. 이전에 조교 한 내용과 정반대의 지시를 내리면 괜히 흔들릴 수도 있잖아?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것뿐이야.

    "벌써 끝내려는 거야?"

    "그럼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언제까지 너랑 이러고 있을 줄 알았냐."

    "성자님이 고작 이 정도로 만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걱정하지 않아도 여기 오기 전에 충분히 하고 왔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 생긴 의혹을 불식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건지, 내 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거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연애 감정이 없는 건 없는 거고, 괜히 이렇게 상처 주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런가. 성자님은 여전히 인기가 많군."

    말을 내뱉고 나서 살짝 후회했지만, 다행히도 미리엘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시원한 미소로 대답해 줬다.

    이렇게 보면, 사도 임명에 또 다른 조건이 있을 것 같다는 내 예상에 더욱 신빙성이 생기는 것 같은데.

    그도 그럴 게, 얘도 사도 임명이 써질 만큼 날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으니까.

    뭐, 그건 그것대로 얘가 나한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생긴다는 얘기니까 문제지만.

    "그래. 여복이 넘쳐흐르는 몸이시다. 잠시라도 내 아들과 대면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영광인 줄 알아."

    "하핫. 영광이야."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미리엘은 내 물건을 손바닥 사이에 끼우고 살짝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쪽 하고 입술을 맞춘 다음, 어디에서 꺼낸 건지 고운 천을 꺼내 자신의 타액을 닦아내 줬다.

    ······이렇게 보면 또 날 그만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더 있을 필요는 없었다.

    성에서도 여기서도 생각보다 시간을 더 끌어 버렸기 때문에, 시간은 벌써 저녁.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쪽으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지.

    "아참.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대답을 못 들었네. 그래서, 결국 7계층에서 물건을 유통한 건 너희가 아니라는 얘기지?"

    "응. 아니야."

    아까는 그렇게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회피한 주제에, 이번에는 너무나 쉽게 명확한 대답을 들려주는 미리엘.

    뭐,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말이야.

    디아나도 말했지만 시기가 맞지 않고, 얘도 처음부터 내가 말하는 물건이 미약이라는 것조차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나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나는 용의자가 얘들밖에 없으니 확인해 본 것뿐이고.

    "정말이겠지?"

    "얼굴이 너무 가까운걸. 여자한테 그런 행동은 조심하는 게 좋아. 이상한 착각을 일으키기 쉬우니까. 특히나 성자님은 더."

    그래도 일단 확인을 위해서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질문하자, 미리엘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또 말을 돌렸다.

    제대로 대답해주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는 건가.

    "넌 별로 이상한 착각 안 하는 것 같은데."

    "하핫. 그렇지 않아. 작별 키스라도 해주려는 줄 알고 어울리지도 않게 설레고 있었어."

    "할 리가 없잖아."

    "그거 유감이군."

    그렇게 유감스러우면 유감스러운 표정이라도 좀 지으면서 말하지 그러냐.

    "아무튼 아니면 됐어. 난 간다. 잘 있어라."

    "그래. 미안하지만 배웅은 안 할게. 지금은 앨리시아의 얼굴을 보기 힘들 것 같아서."

    너도 일단 앨리시아한테 미안한 감정이 있기는 하구나?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없을 리가 없겠지만. 앨리시아가 내게 반하는 바람에 여기 클랜 전체가 들썩인 적도 있었던 모양이고.

    "오냐."

    뒤로 손을 흔들어주고, 나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미리엘이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앨리시아는 떠나지 않고 문앞을 지키고 있었다.

    "어이. 둘이서 무슨 말을 이렇게 오래 했어?"

    그것도 딱 봐도 기분 엄청 나빠 보이는 표정으로.

    "그걸 여기서 말할 거면 우리가 굳이 널 밖으로 내보냈겠냐?"

    "그러냐. 비밀 얘기냐."

    비밀이라는 단어에 힘 꾹꾹 줘서 말하는 앨리시아는, 마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내가 여자랑 둘이 있으면 무조건 섹스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야생의 감 같은 건지.

    뭐, 아무튼 행위 자체만 놓고 보면 이 녀석이 상상하는 그대로의 일을 하고 온 거라, 나는 황급히 얘기를 돌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앨리시아. 할 말이 있어."

    "앙? 뭔데 갑자기."

    "아니. 여기서 그냥 하긴 좀 그렇고, 언제 시간 될 때 둘이서 식사라도 할래?"

    얘가 나한테 해준 일은 그냥 말로 간단히 고맙다고 하고 말 게 아니다. 제대로 된 식사 대접이라도 하면서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해야지.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내뱉고 보니 왠지 데이트 신청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 뭐?"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앨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순식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말을 더듬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날 좋아하는 건 여전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아직 못했다 싶어서."

    이런 건 괜한 희망을 품기 전에 깔끔히 말해두는 게 낫겠지.

    웬만하면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하기 전에는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필요 없어. 그런 거."

    이럴 것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에이. 그러지 말고. 네가 거절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응?"

    "뭐가 예쁘다고 네 얼굴을 봐서라는 거야."

    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성자가 생명의 은인한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도 못 하면 어떻게 하겠어? 응? 내가 아니면 여신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거기서 여신님이 왜 나와?!"

    "엣헴.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성자님께서는 여신님께 직접 지령을 받고 이 땅에 강림한 몸으로, 말하자면 여신님의 얼굴을 대변하는······."

    "알았어! 밥 한 끼 먹자는 거잖아?! 가면 되잖아! 갈 테니까 좀 닥쳐! 한 대 쳐주고 싶으니까."

    그런 느낌으로 앨리시아와 식사 약속까지 잡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에서의 볼일을 모두 마치게 됐다.

    ······문제 자체가 모두 해결된 건 아니었지만.

    "주인님! 다녀오셨어요?! 무우척! 오래 걸리셨네요?! 무슨 짓을 하다 오셨나요?!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바넷사! 너도냐?!

    아니! 그보다 말투! 귀여운 말투 어쨌어?! 왜 도중부터 톤이 낮아져?!

    "대답에 따라서느은······바넷사, 주인님의 소오중한 곳을 박! 살!"

    "그러니까 무섭다고! 대체 어딜 박살 낸다는 거야?! 그리고! 말꼬리 늘이고 목소리 톤만 높인다고 귀여운 말투가 아니야!"

    "농담입······농담이에요!"

    말투가 달라져도 네 농담은 여전히 농담으로 안 들린다고!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38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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