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25화 (1,00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25화 >

    "구원 씨!"

    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몸의 소유권을 되찾은 천사님은, 다른 곳에는 눈도 주지 않고 곧장 나만을 바라보며 황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여신님께서 하신 말씀은······시, 신경 쓰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는 내 두 손을 꼭 감싸 쥐어 풍만한 가슴 사이에 파묻으면서, 평소의 천사님이라면 입에 담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발언을 내뱉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천사님이 저런 말을 할 정도라니. 내가 이 이상 다른 누군가에게 사도 임명을 해주는 게, 다시 말해서 이 이상 내 여자가 늘어나는 게 그만큼 싫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천사님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니, 다른 애들의 반응은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 아마 다들 천사님과 같은 의견이겠지.

    뭐,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여신님한테 매달렸던 거지만.

    하지만 보아하니 여신님은 절대 힘을 써주지 않을 것 같고, 거기에 사도 임명도 쓰지 않는다고 하면······남은 방법은 레이를 설득해서 감정 공유를 끄게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우선 레이가 다크 엘프의 힘을 스스로 깨우칠 필요가 있고, 그 후 설득까지 성공해서 정말로 감정 공유가 중단되더라도 레이의 변덕으로 언제든 다시 감정 공유가 시작될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방법이 그것밖에 남지 않은 이상, 해보는 수밖에.

    진지한 눈으로 날 곧게 바라보는 천사님의 아름다운 눈동자와 똑바로 마주하면서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였지만, 이어져 나오는 천사님의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의 것이었다.

    "저, 저는 한 번도 고생했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구원 씨와 보낸 특훈의 시간은 제게 있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자책하지 말아 주세요."

    평소와 달리 조금 힘 있는 어조로 말씀하시는 천사님은, 앞으로 내 여자가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질투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가 여신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자책하고 있을까 봐, 그런 날 걱정해서 이렇게 필사적이었던 것뿐이었다.

    대체 우리 천사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있는 거야?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그런 얘기를 듣고도 바로 이렇게 내 걱정부터······.

    "레, 레이아······."

    상상을 뛰어넘은 천사님의 천사님다운 모습에, 나는 감동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천사님 역시도 살짝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아름다운 눈망울을 일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천사님은 나를 향한 고백을 멈추지 않으셨다.

    "네. 저는 괜찮아요. 으응.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그렇게 구원 씨와 인연을 쌓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구원 씨. 구원 씨 때문에 제가 고생했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하면 안 돼요. 만약 하시면······하시면······."

    감동적인 고백을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줄줄 쏟아내시던 천사님이셨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말이 막혀버리셨다.

    그야 그렇겠지. 아마 엄포를 놓으시려는 것 같은데, 그런 것도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렇게 "하시면······하시면······" 하고 중얼거리면서 잠시 고민한 끝에, 천사님은 겨우 할 말을 찾은 모양이었다.

    "화, 화낼 거에요······."

    엄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귀여운 단어 선정이었고, 천사님 자신도 그걸 잘 아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게다가 화난 표정을 만들려고 하시는 건지 어울리지 않게 눈썹을 찌푸리기까지 하셔서 괜히 더 귀여웠다.

    천사님의 그런 모습 때문에 아까의 감동적인 분위기는 조금 옅어졌지만, 대신 가슴 한가운데부터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퍼져 나가 온몸을 간질이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좋은 감정이 온몸을 감쌌다.

    진짜 우리 천사님은 왜 이렇게 사랑스러우신 걸까.

    "천사님의 화난 모습이라니. 그건 조금 보고 싶은데."

    그래서 나는 천사님의 엄포에 그런 대답을 해줬다.

    평소와 다름없는 장난으로 보이겠지만, 이렇게 말함으로써 내가 천사님 말대로 자책하지 않는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해준 거다.

    언제나 말하는 거지만, 내가 이래 봬도 생각 없이 장난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니까?

    "정마아알!"

    그리고 천사님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셨는지, 폭신폭신한 꼬리로 내 몸을 가볍게 몇 차례 두드려주셨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여신님도 이렇게 꼬리를 쓰셨지만,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똑같은 행동이 지금은 이렇게나 따뜻하게 다가오다니. 역시 애정의 차이라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레이아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췄다.

    "나도 레이아와의 보낸 시간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특훈이라고 하면서 나도 상당히 즐겼었고."

    그리고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말투가 아니라 진지하게 레이아의 걱정을 덜어줬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만 특훈을 도운 게 아니었다고 하면,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화낼까?

    조금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구, 구원 씨······."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천사님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셨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까지는 나와의 추억이라는 점에만 집중하고 있었는데, 즐겼다는 말을 듣고 그게 전부 섹스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낸 걸까?

    천사님의 얼굴이 발그레 붉어짐과 동시에, 아름다운 눈동자에서는 보랏빛 안광이 서서히 새어 나오면서······.

    "섹스 얘기는 우리 없을 때 하지?"

    "하으?! 네, 네엣! 죄, 죄송해요! 저희끼리만!"

    천사님이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구미호가 되려고 한 바로 그 순간, 뒤에서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는 토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사라였다.

    평소 같았으면 다 같이 있는 곳에서 우리끼리 둘만의 세계에 빠지려고 하는 순간 방해하려고 들었겠지만, 아무리 사라라도 그런 분위기의 대화까지 끼어들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마 지금까지 대화가 일단락될 타이밍만을 보고 있었던 거겠지. 사라는 팔짱을 낀 채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다른 얘기도 아니고 사도 임명의 인원을 늘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중요한 얘기가 나온 직후에 둘만의 세계에 빠져버렸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애들도 전부 끼어들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는 표정이었고.

    "미안. 미안. 그래서 다들 들었다시피 말인데."

    그래. 천사님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주목하셔서 살짝 얘기가 탈선하고 말았지만, 지금 중요한 얘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내, 아니. 우리 미래의 방향성에 대한 얘기였다.

    "음. 아무래도 여신님께서는 자네의 사도 임명 스킬로 7계층 정복을 바라시는 눈치구먼."

    쉽사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 주제였지만, 그럴 때 제일 먼저 나서는 건 역시나 최고 연장자인 우리 대마법사님이었다.

    "말해두지만, 난 반대야. 그러려고 하기만 해봐. 콱 그냥."

    그리고 디아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가 바로 반대를 하고 나섰다.

    콰, 콱 그냥 뭔데? 왜 뭔가를 움켜잡고 터뜨리는 것 같은 제스처를 하는 건데? 무서워 이것아!

    "하지만 사라 씨. 여신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보세요. 어차피 감정 공유를 끊기 위해서는 사도 임명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저이가 이 이상 여자를 늘리는 건 싫지만······."

    하지만 그런 사라와 달리 마틸다는 여신님의 말씀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독실한 성직자로서 여신님의 말씀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자세는 아니었고, 자기도 싫지만, 방법이 이것밖에 없지 않냐는 말투였지만.

    "그래도 그 말을 따르다가는 끝도 없이 늘어날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마틸다에게 사라는 눈에 불을 켜면서 반박했다.

    쟤들 저러다가 진짜로 싸움 나는 거 아니야?

    "아, 잠깐. 타임. 타임. 우선 나부터 말 좀 하자."

    우리 애들끼리 싸우는 건 웬만하면 끼어들지 않으려고 하는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있을 수 없었다. 정실 다툼이라든지 하는 그런 귀여운 종류의 말싸움이면 모를까, 이건 그 정도로 끝날 내용이 아니니까 말이야.

    그리고 실은 내 마음속으로 이미 정해준 대답도 있었다.

    "실은 말인데. 감정 공유 문제만 놓고 보면 사도 임명 레벨을 올리기 위해 그렇게 마구잡이로 스킬을 쓸 필요는 없어. 그냥 레이······다크 엘프 한 명한테만 하면 끝나."

    "음?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게 말이지."

    아까 여신님께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도 임명의 레벨이 10이 되면 볼 수 있는 스탯이 더 자세해지고 종족창도 열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사도 임명을 한 건 사라, 디아나, 레이아, 실비아, 마틸다, 바넷사, 레이첼까지 총 7명.

    기본적으로 스킬을 배울 때의 스킬 레벨이 1이니, 지금까지 총 7이 올라서 지금 내 사도 임명의 스킬 레벨은 8이다.

    거기에 모든 사전 준비가 끝나서 이제 사도 인장을 찍기만 하면 되는 펠리시아까지 더하면 사도 임명의 레벨은 9가 된다.

    즉, 한 명만 더 사도 임명을 하면 레벨 10이 되어서 종족창을 열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여신님이 처음에 감정 공유의 해제법을 알려줄 때 사도 임명 레벨이 더 필요하다든지 하는 부연설명 없이 그냥 레이한테 사도 임명을 하면 된다고 설명하신 것도, 아마 속으로 그런 계산을 다 마치셨기 때문에 간단히 그렇게 설명하신 거겠지.

    거기에 내가 괜히 디아나의 스탯창에서 수명 공유가 안 보이느니 뭐니 하는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사도 임명 레벨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오게 돼서, 혼란이 가중되었다는 얘기다.

    "흠. 그렇구먼. 사도 임명이 꼭 필요한 것은 그 아이뿐. 그 이상 사도 임명의 레벨을 올리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구먼."

    "그런 거지.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해온 방침을 바꾸고 싶지 않아. 여신님께서도 그러셨잖아? 사도 임명을 적극 사용하는 게 더 쉬운 길일 뿐, 내 방법도 훌륭한 방법이라고. 물론 그만큼 시간은 더 걸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 여자나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

    로 섹스를 하는 것보단 낫잖아? 나도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너희가 괴로워하는 건 보고 싶지 않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사도 임명을 적극 사용하는 게 왜 쉬운 길이라는 건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자 한 명과 사도 임명 가능한 수준까지 가는 게 얼마나 힘든데.

    물론 내 외모를 적극 사용하면 우리 애들만큼 힘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여신님이 말하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한테 사도 임명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사도 임명이 가능한 건 여성뿐이다.

    여성이 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그 세계에서 수없이 많은 여자를 꼬셔봤자 그게 세계를 바꾸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아니면 사도 임명에는 내가 모르는 새로운 기능이 더 있는 걸까?

    "당신······."

    아무튼 그런 내 말에 감동했는지, 마틸다는 애틋한 눈길을 내게 보냈다.

    보통 얘가 이런 눈길을 보내면 곧 핑크빛 모드가 되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그럴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역시 컨트롤해야 할 때는 컨트롤된단 말이지.

    "그러니까 마틸다. 미안하지만 여신님 말대로는 하지 않을 거야. 이해해줄 수 있지?"

    "미안하다니 그런······오히려 제가······. 여신님께서는, 당신의 선택을 분명 존중해주실 거예요."

    뺨에 살짝 가져다 댄 내 손에 뺨을 문지르듯이 한 차례 고개를 흔든 후, 마틸다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렇게 자신의 의견을 굽혀줬다.

    뭐, 마틸다도 감정 공유 해제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던 거니, 당연한 얘기지만.

    "응. 고마워. 그럼 앞으로도 지금 방침을 유지하도록 하자. 안 그래도 바프라를 무너뜨리는 과정은 잘 돼가고 있으니까."

    게다가 아까 여신님의 말을 들은 걸로 살짝 자신감도 붙었다.

    아니. 그냥 내버려 둬도 자연스럽게 여신님을 따르는 자가 많아졌다고 했잖아?

    아무리 전쟁신의 추종자들만 모인 7계층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을 거다.

    실제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사랑이 담긴 섹스를 금지하는 미친 짓거리를 시작한 덕분에 ‘은사모’ 같은 조직까지 생겨나기 시작했으니까.

    분명 쌓일 대로 쌓인 불만을 톡 터뜨려주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여신님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내 방식은 전혀 문제없어. 오히려 당장 문제 되는 건······.

    "그러니까 사도 임명을 적극 사용하진 않을 거지만, 결국 감정 공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딱 한 번 더 써야 하기는 하는데 말이지요."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면서 그런 말을 꺼내자, 내 방침 얘기를 들은 이후로 줄곧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라의 눈썹이 다시 꿈틀하고 움직였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2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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