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24화 (1,008/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24화 >

    사도 임명이라니. 결국 그걸 하라는 얘기잖아? 서로의 호감도를 최고치로 만들고 섹스를 해서······그런 걸 피하기 위해서 이렇게 직접 여신님까지 불러서 물어본 건데!

    이러면 우리 애들한테 얼굴 들고 살 수가······.

    죄책감에 짓눌리며 다른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죽도록 싫다든가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 같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는 것 같은 반쯤 포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정 공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평생 고생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한 명한테 더 사도 임명을 하고 끝내는 게 낫고 생각하는 걸까? 최악과 직면하고 난 후에 차악과 직면하면 비교적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 느낌으로.

    나한테는 많이 과분할 정도로 하나같이 이해심이 많은 여자들이라 나로서는 감사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이해심에만 모든 것을 기댈 수는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할 수 있는 발버둥은 뭐든 다 해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여신니이이임!"

    "꺄아악! 허, 허벅지에 얼굴이······치, 치워주세요!"

    나는 다시 천사님의 다리에 꽉 달라붙었다.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으면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여신님 파워로 파박! 여신님의 사자니까 그 정도는 되지 않나요?! 네?!"

    "마, 말······말할 테니까······거, 거기에 비비시면 말을······!"

    내 진심을 담은 필사적인 간청에 마음이 움직이셨는지, 결국 여신님께서는 그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얼굴을 살포시 붉히기까지 하셨다.

    역시 사람은 뭐든 전력으로 부딪혀보는 게 제일이야.

    내가 그 다리에서 떨어져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여신님은 옷매무새를 다잡으신 후 내게 부드러운 눈길을 한 번 보내주신 후 입을 여셨다.

    "하아······하아······제힘으로 당신과 그 아이의 인연을 끊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역시나!"

    "하지만."

    "아, 넵."

    그래. 원래 이런 좋은 얘기에는 뒤에 하지만이라는 말이 따라오는 법이지. 그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고.

    자, 어떤 사정이 있는지 말씀해 보시죠. 사소한 문제쯤은 이 성자 구원이 깔끔하게 분쇄해······.

    "그렇게 하면 당신들은 마신과 싸우게 될 거예요."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 예상보다 문제의 스케일이 너무 큰데.

    "그렇군요. 그 얘기도 한 번 제대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네요. 성자 구원. 이리로 오세요."

    입을 헤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는 내게 이번에는 진짜로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주신 후, 여신님은 갑자기 내 몸을 확 끌어안았다.

    그 커다란 가슴이 내 가슴팍에 짓눌리면서 묵직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왔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질였다.

    물론 가슴도 향기도 전부 천사님 거지만.

    "여신님. 너무 대담하신대요."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장난치는 내 엉덩이를 꼬리로 찰싹 한 대 때려주신 후, 여신님은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들리시나요?"

    갑자기 왜 확인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쪽으로 곁눈질해보니, 아무래도 다른 애들한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끌어안고 비밀 얘기라니. 여신님. 저 설레도 돼요?

    "안 돼요. 그럼 얘기할게요. 옛날에는요."

    아무렇지도 않게 날 차버리시고는, 여신님은 갑자기 옛날얘기를 시작하셨다.

    살짝 기대했는데 고작 옛날얘기라니. 여신님. 이 성자는 여신님께 무척이나 실망했······.

    "제대로 들으세요. 정말 중요한 얘기니까요."

    "넵. 죄송합니다."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얘기였다.

    아주 먼 옛날에는 여신님과 마신이 둘이 같이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었다.

    둘은 둘 중 하나가 혼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계를 독점하지 않도록 세계에 정확히 같은 영향을 끼칠 정도로만 힘을 쓸 것을 맹세했다.

    쉽게 말해서 여신님이 힘을 써서 세계에 1이라는 영향을 미치면 마신도 1 정도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쓸 수 있게 되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은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세계를 다스렸지만, 사람들이 점차 여신님을 더 따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애초에 섹스와 전쟁의 대결이다.

    ‘역사란 투쟁의 역사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응? 중간에 단어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비슷한 말이 있을 정도로 인간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존재라고, 인간의 내면에는 공격 본능과 파괴 본능이 잠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섹스와는 비교할 수가 없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역사가 흐름에 따라 인류는 계속해서 그 수를 증가시켜왔다. 전쟁을 벌이면서 계속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 수를 늘려주는 방법이 뭐냐? 바로 섹스다! 섹스!

    사람의 내면에는 결국 파괴 본능이나 공격 본능보다는 성적 본능이 더 크게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다.

    얘기가 조금 샜지만, 아무튼 그런 인간의 본능은 과거의 이 세계에도 여지없이 발휘됐고, 여신님이 딱히 뭔가를 더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마신보다는 여신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전쟁신은 당연히 안달하기 시작했다.

    신이란 사람들의 신앙심을 바탕으로 그 힘과 존재를 유지하는 존재. 이대로 가면 모든 신자를 뺏기고 존재가 소멸될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전쟁신은 자신의 힘을 퍼부어 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잃어버린 신앙심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자애로운 우리 여신님께서는 전쟁신이 아무리 힘을 쓰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적당히 내버려 두려고 했다.

    여신님께서도 오랜 친구가 힘을 잃고 소멸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거다.

    하지만 그렇게 힘을 발휘하고 신도 수가 여신님과 비등비등한 수준까지 돌아오자, 욕심에 눈이 먼 마신은 그 칼끝을 여신님에게까지 향했다.

    여신님을 찍어누르고, 자기 혼자 이 세계를 다 집어삼키기로 결심한 거다.

    게다가 이 세계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여신님을 능멸하기로 했다.

    그렇게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 여신님을 믿는 신도가 급속도로 줄어들 것이고, 자신을 따르는 신도는 더욱 많아질 테니까.

    이제는 신도 수도 미약하게나마 자신이 더 많으니, 무조건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생각했겠지.

    마신은 여신님과 자신이 동시에 이 세계로 강림한 때를 노려서, 여신님을 능멸 계획을 감행했다.

    하지만 욕심에 눈이 먼 마신은 가장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바로 여신님과 마신은 이 세계에 같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맹세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쟁신은 신도를 되찾기 위해 힘을 펑펑 써대며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동안, 여신님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즉, 지금까지 마신이 힘을 펑펑 써댄 만큼, 여신님은 세계에 영향을 끼칠 힘을 비축해두고 있었다는 얘기다.

    만약 이 세계에 강림하지 않고 신계에서 싸웠다면, 신도 수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신이 이겼을 거다.

    하지만 마신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굳이 이 세계에 둘이 동시에 강림한 그 순간을 노렸고, 결과는 보다시피. 마신은 신계도 아닌 이 세계에 봉인되어서 존재가 소멸될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나는 여신님의 자애로움에 눈물을 펑펑 흘렸다.

    아니. 실제로 흘리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말로 감동받았어.

    실은 말이지. 아래 세계에서 멀쩡한 놈들을 섹스 중독자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이런 느낌을 받고 있었거든.

    어? 여기 그냥 평범한 무협 세계 비슷한 곳 아니야? 나는 그 무협 세계에 나타난 희대의 색마 포지션이고.

    누가 "성자님! 성자님은 던전에 뭐하러 가시는 거예요?" 라고 물으면, "응? 나? 색마!" 라고 해야 하는 수준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 여신님이 마신보다 파워만 더 셀뿐 실은 진짜로······.

    같은 생각을 아주 살짝. 사아아알짝 했었는데, 역시 정의는 우리 여신님한테 있었잖아! 난 정의의 사자가 맞았어!

    이걸 감동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냐고?

    하지만 감동한 건 감동한 거고,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저······여신님? 그래서 이 얘기를 갑자기 하시는 이유는······."

    "모르시겠나요?"

    "네."

    "마신은 봉인됐지만, 저와 마신이 맺은 맹약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요. 제가 힘을 써서 이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면, 마신 또한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힘을 얻게 되죠. 그렇게 되면 마신의 부활을 앞당길 뿐이에요."

    즉, 여신님 파워로 제게서 이 다크 엘프와의 계약을 지워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군요.

    "네. 그런 거예요."

    "에, 에이. 그래도 살짝은 남아있지 않나요? 마신이 그렇게 힘을 펑펑 써댔으니까, 마신을 봉인하고도 살짝은 힘이 남으셨을 것 같은데."

    "성자 구원. 제가 왜 처음부터 당신에 최고 레벨로 이곳에 보내지 않았는지, 왜 그런 식으로 힘을 부여했는지, 정말로 모르시겠나요?"

    ······그런가. 게임은 레벨 1부터 시작하는 게 기본이지만, 여신님의 사자로 온 나한테까지 그 이론이 적용될 필요는 없었다.

    만약 힘이 그렇게나 남아있었으면, 처음부터 날 만렙 상태로 보내서 마신의 잔당을 팍팍 해치워버리고 오게 하면 그만인 얘기였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고 굳이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방식으로 힘을 줬다는 건, 마신과의 맹약에 의한 제약 때문이었던 건가.

    그, 그럼 정말로 여신님의 힘을 기대할 수는······.

    "아주 조금 남아있기는······아뇨. 역시 안 돼요."

    절망하는 날 안쓰럽게 여겼는지 여신님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고개를 흔들어 버리셨다.

    "여, 여신님! 제발!"

    "으응. 정말로 안 돼요. 언젠가 있을지 모를, 제 힘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위해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X망겜의 버그도 제 힘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걸요?"

    "여, 여신님! 그건 그냥 여신님과 친밀해지기 위한 조크! 장난이었어요! 제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요!"

    "후훗. 저도 장난이에요. 하지만 안 된다는 건 정말이에요. 무턱대고 힘을 다 쓸 수는 없어요."

    필사적으로 매달릴 때마다 져주셨던 여신님께서도, 이것만큼은 정말로 안 된다는 듯 아무리 필사적으로 매달려도 단호하게 선을 그으셨다.

    그리고 이 이상 이 얘기를 할 생각이 없다는 듯, 아예 내게서 이마를 떼기까지 하셨다.

    뭔가, 뭔가 설득할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그, 그래! 여신님! 달리 해결 방책이 있으니까 안 된다는 거죠?"

    "네. 이해하셨으면······."

    "그, 그럼 안 돼요! 여신님께선 디아나와의 키스가 패시브 스킬, 레이와의 그게 토글 스킬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레이의 스테이터스 창으로 끌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면 디아나의 스테이터스 창으로도 수명 공유의 존재 자체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전 그런 거 본 적이 없는데요?! 자, 여기 보세요! 아무 데도 없잖아요!"

    나는 눈앞에 디아나의 스테이터스 창을 활짝 펼쳐 보였다.

    물론 나밖에 보이지 않는 창이었지만, 분명 여신님이라면 보실 수 있을 거다.

    "그렇겠죠."

    하지만 내 반박을 듣고도, 여신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또다시 폭탄 발언을 던지셨다.

    "그 스킬은 종족창을 열 수 있어야 확인 가능한걸요. 성자 구원. 지금의 당신은 사도 임명 레벨이 부족해서 그 창을 열 수 없는 것뿐이에요."

    사, 사도 임명의······레벨?

    사도 임명이라는 스킬은, 다른 스킬과는 조금 다른 특징이 있었다. 스킬 레벨이 아무리 올라도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제일 처음 스킬을 배울 때 빼고는 스킬 포인트로 레벨을 올릴 수 없다는 특징도 있었다.

    즉, 사도 임명은 스킬 사용으로만 레벨을 올릴 수 있고, 한 사람에게 사도 임명을 할 때마다 스킬 레벨이 1씩 올라간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사도 임명을 한 사람은 총 7명. 그러니까 사도 임명의 스킬 레벨은 8이었다. 아니. 펠리시아도 아직 임명만 안 했지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레벨 9까지는 무난히 찍을 수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 사도 임명의 스킬 레벨을 올릴 수단은, 아니. 올릴 생각은 내게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아, 그렇죠. 그러고 보니 말하지 못하고 돌아갔었죠."

    그런 내 생각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니. 여신님이니 분명 다 알면서 얘기하시는 거겠지.

    여신님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입을 여셨다.

    "그럼 성자 구원. 다시 말할게요. 당신은 사도 임명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어요. 스킬 레벨이 10이 되면 조금 더 세부적인 정보도 확인할 수 있어져서, 종족창까지도 열 수 있게 되는걸요. 진작 그렇게 됐다면 이 아이도 그런 고생을 할 필요 없이

    손쉽게 구미호의 능력을 다룰 수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마신의 세계를 정화하는 일 역시도 그래요. 물론 천천히 아이들을 교화시키는 당신의 방식 역시도 무척이나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조금 더 쉬운 방법이 있는데 멀리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요? 사도 임

    명을 적극 사용해서 아래에 있는 불쌍한 아이들을······아, 아이야?! 또니?! 아직 시간이······!"

    신탁을 내리시는 것처럼 부드럽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얘기하시던 여신님이었지만, 갑자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순식간에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신성한 기운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 머리 한구석에 저장되어있던 장면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여신님. 전에도 이런 식으로 퇴장하셨지. 그래서 "말하지 못하고 돌아갔었죠." 라고 한 거였구나.

    사도 임명의 레벨을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전해 받아 충격받은 와중에도, 나는 한편으로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24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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