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23화 (1,007/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23화 >

    갑작스러운 얘기지만, 내 안 좋은 예감이라는 건 들어맞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무슨 광선검을 붕붕 휘둘러대는 우주 공화국의 수호자 같은 소리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정말로 그래왔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물론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까지 있을 정도이니, 안 좋은 예감이 잘 들어맞는 건 딱히 나한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내 안 좋은 예감은 꽤나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이번에도 날 피해 가지 않았다.

    드디어 모두와 재회를 마치고 지하실에 모인 후, 나는 두꺼운 지하실 문을 굳게 닫고서 천사님께 여신 강림을 부탁했다.

    그런 내 부탁에 천사님은 두 손을 모으고 한쪽 무릎을 꿇어서 기도하는 자세가 됐고, 그 직후 천사님의 몸에서 몸과 마음을 전부 깨끗이 정화하는 것 같은 신성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물론 천사님은 원래부터 온몸에 그런 기운을 두르고 다니시지만, 여신님의 그것과는 상당히 느낌이 다르다 보니 마나에 민감하지 않은 나조차도 변화를 확실히 눈치챌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당연히 천사님. 아니. 천사님의 몸을 빌린 여신님은 꿇었던 무릎을 곧게 펴고 꼿꼿이 서서는 박애의 기운이 충만한 부드러운 미소를 내게······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여신님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자리에

    서 일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일어나기는커녕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아서는, 무릎에 짓눌려 더욱 강조된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기까지 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굉장해. 보통 저런 자세를 하면 얼굴이 무릎 사이에 묻기 마련인데, 천사님의 풍만하신 가슴을 그 이상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아니! 이게 아니라!

    "저······여신님?"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섣불리 확신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아마 여신님이 맞을 거다.

    나조차도 느낄 수 있는 신성한 기운을 풀풀 풍기고 있고, 딱히 여신 강림에 실패할 이유도 없고.

    만에 하나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천사님 성격에 바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이상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한 걸음 다가가며 여신님을 부르자, 여전히 가슴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여신님이 뭔가를 중얼거리셨다.

    "······아니에요."

    하지만 목소리는 풍만한 지방 덩어리에 흡수되어 내 귀까지 확실히 전달되지 않았다.

    평소에는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오늘은 능력도 쓰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아니. 진짜 여신님이 맞긴 맞는 거겠지? 혹시 스킬이 실패해서 여신님이 아니라 뭐 이상한 게 천사님 몸에 들어와 버린 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천사님이 벌떡 하고 얼굴을 들었다.

    "이상한 거 아니에요! 걸레도 아니에요!"

    그리고는 아름다운 눈가에 살짝 눈물까지 고인 채로, 터무니없는 말을 외치셨다.

    이번에는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것 같은 그 능력까지 풀로 사용했는지, 두개골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래. 여신님을 밖에서 함부로 강림시키면 안 된다는 내 불길한 예감은 정확히 적중했다는 얘기다. 아니. 이런 거 맞춘다고 해서 전혀 기쁘지 않지만.

    그보다도 이 여신님은 대체······.

    조금 전 여신님이 하신 말을 되새겨보려고 한 순간, 내 뒤통수를 무언가가 기세 좋게 날아와서 강타했다. 휘익! 콩닥! 하고.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일단 뭔가 부딪혔으니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지팡이를 높이 들고 얼굴을 창백하게 만든 채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우리 대마법사님이 계셨다.

    뻐끔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는 전혀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네에에! 여신님께 대체 무슨 말을 한 겐가아아아!" 라고.

    흠. 감정적으로 보여도 실은 언제나 냉철한 판단력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디아나가 이 정도로 당황하는 모습을 볼 줄이야. 내가 4계층에서 조단됐을 때 정도 말고는 이런 모습 단 한 번도······그만큼 심각한 얘기라는 얘기인가.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 뭐니뭐니해도 우리 여신님은 실제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이자 유일신.

    그런 여신님을 자기 남자가 능멸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생겨났으니, 제아무리 디아나라도 냉정하게 있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건 디아나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어서, 사라도 바넷사도 레이첼 누님도 전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마틸다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게 모조리 무너져내린 것 같은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니.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내가 진심으로 여신님한테 걸레니 뭐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잖아.

    "여신님.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당연히 여신님은 걸레가 아니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분명 핑크빛의······."

    콩닥!

    다시 한번 뒤통수에 산들바람처럼 간지러운 느낌이 부딪혀 왔기에, 나는 재빨리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쳇. 무거워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일부러 시덥잖은 농담을 한 것뿐인데.

    "여신님도 제 마음속을 읽으실 수 있으니까 잘 아시잖아요? 자 마음껏 엿보고 확인해주세요. 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거대한 신앙심을."

    여전히 장난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꽤나 진심이었다.

    어차피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신님이니까, 결국 이러는 게 제일 빠르잖아?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분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는 둘째 치더라도 말이야.

    거기에 이래 봬도 여신님한테 진짜로 감사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물론 한때는 여신님이 흑막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잠깐 품었었지만,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은 다르다. 섹스로 레벨업한다는 멋진 발상의 세계를 만드신 것도, 이런 능력을 주신 것도, 무엇보다 이 세계에 날 데려와서 우리 애들과 만나게 해주신 것도 전부 감사하

    고 있다.

    그러니까 원래부터 이 세계에 사람인 다른 애들과 느낌이 조금 다를지는 몰라도, 나는 나대로 진심으로 여신님을 믿고 있었다.

    "······정말인가요?"

    그런 내 진심이 통했는지, 여신님은 아까의 외침 후 다시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슬그머니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엿봤다.

    "그럼요. 그때는 그냥 그놈들을 속이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거죠. 여신님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한다는 대의를 위해 단장의 아픔을 무릅쓰고······."

    "그런 말은 됐으니까요."

    "아, 넵. 죄송합니다."

    "제대로 말해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

    당연히 제대로 된 사과를 요구하는 건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을 제대로 해달라는 거지?

    여신님. 제 속마음 들리시잖아요? 그렇게 천사님 얼굴로 안 어울리게 뚱한 표정 짓고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 잡아먹어 버리고 싶으니까 그러고 계시지 마시고······아, 시선 피해버렸다.

    흠. 내가 알아서 생각해내라는 건가. 그렇다면 생각나는 대로 전부 다 말해버리는 수밖에 없군. 말하다 보면 하나쯤은 들어맞겠지.

    "경애하는 여신님. 여신님의 충실한 사자인 저 구원은 언제 어느 때나 아름다우신 여신님을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처음 이 세계 올 때 스쳐 지나갔던 존안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감동과 기쁨을······."

    "이, 이제 됐어요!"

    그렇게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자니, 여신님이 더는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셨다.

    보아하니 방금 한 말에 정답은 없는 모양이지만, 그렇게 듣기 괴로웠던 걸까?

    그나저나 여신님. 우리 천사님 몸으로 그렇게 힘차게 일어나시면 반동이······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자 구원. 오늘은 무슨 일로 절 부르셨나요?"

    내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분명 다 보이고 있을 텐데도, 여신님은 내 속마음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말을 자아내셨다.

    혹시 너무 시끄러워서 속마음 보기 기능을 꺼버리신 걸까?

    그건 그렇다 치고 저 모습, 아까까지의 일은 그냥 없었던 일로 치려고 하시는 모양인가.

    나는 물론 우리 애들 앞에서까지 그렇게 "걸레가 아니에요!"라고 필사적으로 외쳐놓으시고 이제 와서 저러셔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

    "저 그냥 갈까요?!"

    뭐야. 역시 다 보고 계시잖아.

    "아뇨. 무슨 소리를. 성자 구원. 여신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불렀습니다."

    또 마음속으로 태클을 걸고 싶어졌지만, 이 이상하면 진짜로 여신님이 돌아가 버리실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마음을 다잡고 여신님을 멈춰 세웠다.

    "그래요. 성자 구원.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죠?"

    그러자 여신님도 다시 분위기를 잡으시고, 자애로운 목소리로 대답해주셨다.

    여신님도 참 분위기 전환이 빠른 사람, 아니. 신이라니······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최근 절 괴롭히고 있는 감정 공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요?"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잡념들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드디어 여신님께 본론을 꺼냈다.

    옆에서 레이첼 누님이 ‘감정 공유?’라고 말하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잠이라도 자고 있는 듯 잠잠하지만, 또 언제 감정이 폭발할지 모른다. 제발 여신님께 해결책이 있어야 할 텐데.

    "있어요."

    그런 내 바람이 통했는지, 여신님은 맥빠질 정도로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우오오오! 역시 여신님! 믿고 있었습니다!"

    "꺄악! 다, 다리에 매달리지 말아 주세요!"

    여신님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당황한 것처럼 다리를 오므렸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어때요. 어차피 몸은 우리 천사님 몸인데.

    "그보다 자! 여신님! 어서 해결책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조금 떨어주세요! 이제 뜸 안들일 테니까요!"

    흠. 혹시나가 역시나였군. 삐지셔서 일부러 뜸 들이고 계신 거였어.

    헛?! 잠깐만. 그런데 나 지금 여신님의 의도를 이렇게나 간단히 간파해낸 거야? 나 혹시······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은 건······.

    "아니에요."

    "그런 건 확실히 말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것보다 감정 공유의 해결책이에요."

    "아, 넵."

    뭔가 여신님이 드디어 한 방 먹였다는 듯 으쓱한 표정을 지은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천사님 얼굴로 저러시는 것도 귀여우니까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게다가 지금부터 나오는 말은 진짜 중요한 문제기도 하고.

    "간단해요. 당신도 눈치채고 있듯이, 그런 종족 특유의 의식은 의식에 주체가 되는 종족만이 연결을 확인할 수 있어요."

    여신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거기까지는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나한테 와 닿지 않는 수명 공유를 디아나는 확실히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디아나는 수명 공유를 무효로 하는 방법 같은 건 없다고 했는데?

    "네. 무효화 같은 건 못 해요. 거기에 엘프와 다크 엘프의 의식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니까요. 거기 있는 아이가 모르는 것도 당연해요."

    "다르다니요?"

    "그러네요. 엘프의 의식은 패시브 스킬이고 다크 엘프의 의식은 토글 스킬이라고 하면 알아듣기 쉬우시죠?"

    패시브 스킬과 토글 스킬?

    그런가. 다시 말해서 엘프의 수명 공유는 임의로 조작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지만, 다크 엘프의 감정 공유는 임의로 켜고 끌 수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잠깐만. 그러면 레이 그 녀석한테 감정 공유를 꺼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얘기인데······그 녀석, 다크 엘프의 의식이 뭔지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바프라가 의도적으로······그런가! 만약 바프라의 뜻대로 놈이 레이의 처녀를 가져가서 의식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레이가 감정 공유를 꺼버리면 놈이 원하는 쾌락은 절대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러 레이에게 다크 엘프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차단했던

    건가!

    젠장. 그러면 돌아가서 레이가 다크 엘프의 본능을 일깨울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정 공유를 차단해달라고 부탁을······하지만 내가 부탁한다고 해서, 걔가 과연 내 부탁을 들어줄까?

    어디로 튈지 모르고 상식도 부족한 천방지축이?

    만약 부탁대로 꺼준다고 해도, 어차피 임의로 다시 켤 수 있으니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해 먹는 건······.

    "그런 것이 걱정이라면 성자 구원, 당신이 직접 조작하시면 돼요."

    그런 내 머릿속 고뇌를 엿보셨는지, 여신님이 별거 아니라는 듯 그런 말을 해주셨다.

    "네? 아니. 하지만 아까 여신님께서 연결을 확인할 수 있는 건 해당 종족뿐이라고······."

    "하지만 당신에게는 상대방의 스테이터스 창을 보고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잖아요?"

    응? 상대방의 스테이터스 창을 보고 조작해? 그 말은 즉······.

    "결국 걔한테 사도 임명을 해야 한다고요?!"

    "네."

    "네." 가 아니에요! 뭘 그렇게 가볍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2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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