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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19화 (1,003/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19화 >

    진심으로 때렸기 때문에 뺨이 얼얼하고 머리가 띵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그럴 가치는 있었다. 디아나가 자신의 첫 키스를, 그리고 수명을 공유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만약 생각 없이 말을 끝까지 내뱉었으면 디아나는 착각했을 테고, 십중팔구 디아나의 예쁜 눈가에 눈물이 고이게 됐을 거다.

    아무리 내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 때문에 그런 얼굴이 되는 걸 눈 뜨고 보고 있을 수는 없지.

    하지만 방금 그걸로 얻은 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맨날 장난이나 치고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아도, 정말로 하지 말아야 할 말 정도는 구분하며 산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생각 없이 그런 착각을 일으킬만한 말을 그것도 디아나 상대로 하려 했다는 건, 역시 내가 아니라 다른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겠지.

    대체 레이 그 녀석은 저쪽에서 뭘 하고 있길래 이렇게 패닉 상태에 빠진 거야?

    내가 끼고 있던 통신용 반지는 넘어오기 전에 실비아한테 주고 왔으니, 그걸로 연락해서 확인을······아니. 아까 불빛 비춰달라고 연락하느라 이미 썼지.

    통신 반지는 한 번 쓰면 대략 하루 정도의 쿨타임이 필요하니, 내일 밤이 되기 전까지는 저쪽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볼 수도 없다는 얘기다.

    진짜 귀찮게 됐군.

    레이랑 붙어있을 때는 감정이 공유돼봤자 조금 귀찮은 정도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지만, 이렇게 떨어지고 나서 감정 컨트롤이 제대로 안 되고 나니 감정 공유가 얼마나 귀찮은 구속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군. 좋든 싫든 서로 붙어있는 게 제일 편하다는 건가.

    어떤 의미로는 엘프의 수명 공유보다도 부부의 연을 더욱 확실히 해주는 능력일지도 모르겠지만······이거 진짜 어쩌면 좋지?

    "당신, 괜찮은가요?!"

    "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깊은 어둠만이 가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다들 황급히 쪼그려 앉아서는 내 안색을 살폈다.

    실은 아까 스스로 얼굴을 한 대 때린 이후로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있었거든.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욱신욱신 거리는 뺨의 고통을 완화해주는 레이아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나는 몸을 일으키고 일어났다.

    "대체 뭔가? 말을 하다가 말고 갑자기. 놀랐지 않은가. 자네 괜찮은가? 이 몸의 수명 공유가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불안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디아나를 보면서 느끼는 죄책감만큼은 천사님의 부드러운 손길로도 완화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미안한 마음에 더해서, 또 레이 녀석의 감정에 휘말려서 이상한 말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까지 함께 내 몸을 엄습해왔다.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샌가 디아나의 몸을 꽉 끌어안고 그 얼굴을 마주 보며 뜨거운 말을 외치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디아나랑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거야! 그에 반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을 듣더라도 신경 쓰지 마! 그게 설령 내가 하는 말일지라도! 만약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내 진짜 감정이 아니야! 난 언제까지나, 영원

    히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그, 그, 그런가아······."

    그리고 내 뜨거운 외침을 정면에서 들은 디아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한동안 입을 뻐끔거리더니, 결국 살짝 시선을 대각선 아래쪽으로 돌리며 부끄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맞닿은 그 가슴에서 두근두근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울리는 그 심장박동 소리가, 디아나의 지금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그러니까 디아나······끄아악!"

    자연스럽게 디아나의 턱을 잡아 정면을 바라보게 하고 그 입술에 키스하려고 한순간, 옆구리에 엄청난 격통이 휘몰아쳤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결국 그거였어?"

    옆으로 시선을 주니, 거기에는 분노의 화염을 온몸에 두르고 질투의 화신이 되어 있는 용사님이 계셨다.

    "아, 아니! 오해야! 지금 그건 말이지, 물론 너희도 똑같이······."

    아, 젠장! 이렇게 말하면 덤으로 하는 말처럼 들릴 거 아니야!

    "그것참 고마워 죽겠네!"

    역시나 그랬는지, 사라는 더욱 눈동자를 활활 불태우며 꼬집고 있던 옆구리를 한껏 비틀었다.

    "끄아아악! 아니! 방금 디아나한테 이상한 말 할 뻔해서! 그래서 오해를 풀려고! 잠깐만! 진짜! 잠깐만 놔주면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해봐."

    내 필사적인 외침이 그래도 진정성은 느껴졌는지, 사라는 비틀고 있던 손목을 원위치로 돌리고는 잠시 변명의 시간을 주겠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여전히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 있기는 했지만.

    "아니. 그러니까 말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냐면. 디아나랑 맺은 그 수명 공유를······아니! 그게 아니라!"

    에에잇! 제발 내 머릿속에서 좀 나가! 레이!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당황하고 있는 거야!

    "구원 씨. 진정하세요. 괜찮아요. 괜찮으니까요."

    여전히 허둥거리며 제대로 말을 못 하고 있자, 달콤한 엔젤 보이스와 함께 갑자기 내 뒤통수에 푹신푹신한 뭔가가 닿았다.

    그 감촉에 절로 긴장이 풀리면서 디아나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지니, 양옆에서 희고 가는 두 팔이 뻗어 나와서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줬다.

    "자, 괜찮아요. 진정하시고 차분히. 언제나처럼 말씀하시면 충분해요."

    그 상태에서 손으로 내 가슴 부분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기까지 하자, 나는 조금 전까지의 혼란 상태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후우. 응. 고마워. 레이아."

    "후훗. 별말씀을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 줄래?"

    "네. 그럼요. 얼마든지."

    가슴 위에 놓인 레이아의 손등 위에 살며시 손을 얹고, 나는 사라와 디아나, 마틸다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래. 괜히 레이의 존재를 숨기려고 하다가 이런 일이 일어난 거잖아.

    처음부터 숨기는 것 없이 다 말했으면 애초에 그렇게 오해 살만한 발언도 할 필요 없었을 텐데.

    "실은 말이지. 내가 어쩌다 보니 저쪽에서 만난 애랑 섹스를 하게 됐······처, 천사님?"

    "네? 왜 그러시나요?"

    "아, 아뇨."

    지, 지금 날 끌어안고 있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가신 것 같은데요? 게다가 목소리까지 살짝 차가운 것 같은 느낌이······기, 기분 탓인가?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화난 건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천사님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셋은 화가 났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헤에······흐응······거기서 만난 여자랑 섹스를······말이지. 그렇구나······."

    "아니. 사라 씨. 그게 더 무서우니까 그냥 대놓고 화내주실래요?"

    "그래? 야 구원. 너 잘릴래?"

    뭘?! 뭘 자른다는 거야?! 협박하고 싶으면 차라리 "죽을래?" 라고 해라! 무서워 죽겠네!

    "자네······그러면 조금 전 이 몸에게······."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었어!"

    게다가 우리 대마법사님은 아까의 그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던 표정이랑 대비되어 더욱 위험해 보이는 표정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려고 하셔서,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당신."

    그리고 표정이 대비되어 더욱 무섭게 보이는 건 디아나뿐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설교 모드 추기경님까지 나오셨어.

    "네."

    "설명하세요."

    그래도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게 직업인 성직자라서 그런지, 마틸다는 옆에 있는 둘에 비하면 비교적 차분한 태도로 설명을 요구했다.

    다, 다행이야. 아무리 천사님 품이라고 해도, 사라랑 디아나한테 쪼이기만 했으면 또 당황해서 이상한 말을 해버렸을지도 몰라.

    "응. 섹스라고 해도 난 싸지도 않았어. 그냥 목숨을 구해주기 위해서, 힐링 섹스를 이용하려고 한 것뿐이야."

    마음속으로 아까의 실태를 되새기며 최대한 차분해지자고 마인드 컨트롤을 한 후, 나는 하나부터 차분히 설명하기로 했다.

    "목숨을? 그러고 보니 실비아 씨도 조금 위험하셨다고 하셨죠? 심각한 전투라도 있었던 건가요?"

    그러자 내가 저쪽에서 위험한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마틸다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별건 아니고 그냥 복상사할까 봐······아니! 기다려! 설명할 수 있어! 그냥 미약 효과를 없애주려고 한 것뿐이야! 얼굴이 예쁘니까 당연히 매력도 높을 거고, 그래서 힘 조절 안 하고 성자의 손길을 썼는데, 거기 사람들한테는 성자 스킬의 효

    과가 배가 되는지 심각하게 반응을 해서!"

    "흐으으응······그렇게 예쁘구나?"

    아악! 젠장! 이게 아닌데! 침착하자. 침착해. 뒤통수에 느껴지는 천사님의 가슴을, 그 온기를 느끼는 거야. 비록 천사님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간 것 같다고 하더라도, 이 온기는 날 안정시켜주기에 충분해! 내 마음의 오아시스를 믿어!

    "물론 여러분에 비하면 조족지혈. 새 발의 피라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이십죠."

    뭐, 뭐지? 이 느낌은? 왜 이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지?

    젠장! 레이! 제발 좀 내 머릿속에서 나가!

    "당신. 말투가 이상해졌어요."

    "크, 크흠! 아무튼 그래서 섹스를 하게 됐는데! 하필 그 여자가 처녀여서!"

    "책임을 지셔야겠다?"

    "아뇨. 절 뭐로 보시고. 저란 남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무책임해질 수······."

    어? 이거 무슨 대답을 하든 애정이 식는 패턴 아냐? 이,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다니! 사라, 이 무서운 아이!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바넷사에게 배운 비기. 불리한 말은 무시해버리기가 있지!

    "아무튼 문제는 그 여자가 하필 순혈 다크 엘프여서 말이죠."

    "······순혈 다크 엘프? 그렇다는 말은 혹시······."

    그 말에 뭔가 떠오르는 바가 있었는지,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디아나가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대마법사님이야. 감이 좋으셔.

    "응. 다크 엘프도 엘프의 첫 키스처럼 고유의 의식이 있는 것 같아서, 다크 엘프의 경우 첫 키스가 아니라······."

    "첫 경험이었다는 겐가."

    "완전히 코 꿰였잖아 이 바보야! 책임을 안 지기는 뭐가 책임을 안 져! 네 성격에 그런 게 가능할 것 같아?!"

    사, 사라야. 조금 진정해. 그리고 오빠한테 너라니.

    뭐, 그러면서도 말에서 나에 대한 믿음이 느껴지는 건 또 고마웠지만.

    "그, 그래서 디아나한테 물어보려는 거잖아. 디아나 너랑 그러고 싶다는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엘프의 계약, 그거 혹시 해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

    나는 당황하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담아 디아나를 쳐다봤지만, 디아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 실낱을 싹둑 잘라버리고 말았다.

    아니. 뭐,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렇잖아? 예전에 나와 키스하기 전까지 디아나가 왜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달려봤지만, 역시나인가.

    "그래서 첫 경험을 통해 그 다크 엘프 처자와 어떤 식으로 이어지게 된 겐가? 수명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정말로 심각한 얘기가 되자 질투하고 있기보다는 해결을 모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건지, 디아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얘기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공유되는 게 수명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

    아, 디아나도 나랑 공유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까지 공유되면 알게 되는 건가. 정작 나는 수명이 공유된 느낌을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질문하는 디아나의 목소리에는, 미약하게나마 기대도 담겨있었다.

    수명처럼 엄청난 것이 공유되고 있는 것이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되지 않겠냐는 기대가.

    하지만 디아나야. 미안해. 아무래도 네 기대는 저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가, 감정이."

    "음?"

    "감정이 공유되고 있어. 둘 중 하나가 화나면 다른 사람도 같이 화나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지고, 아까 내가 이상할 정도로 당황했었잖아? 그것도 아마 저쪽에서 걔가 당황하고 있어서······."

    "그럼! 그러면······! 씨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라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 진짜. 그런 표정 하지 말래도. 이래서 말 안 하려고 했던 건데.

    "괜찮아! 반드시 어떻게든 할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정말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사라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멈추게만 할 수 있다면, 비록 그게 당장을 모면하기 위한 허세라고 할지라도 해주겠어.

    "저······구원 씨?"

    그런 생각으로 사라를 다독이고 있자니, 뒤에서 레이아가 무슨 생각이 있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응?"

    "여신님께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레이아가 제시한 해결책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방법이었다.

    아, 그런가! 우리에게는 이제 전화 찬스, 아니. 여신님 찬스가 있었지!

    물론 다크 엘프는 전쟁신의 종족이지만, 전부터 뭔가 묘하다고 생각했거든.

    전쟁신의 종족인데 그 능력은 여신님의 종족 같은 구미호도 그렇고, 엘프와 비슷한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 트리거나 효과가 더욱 여신님과 가까운 다크 엘프도 그렇고.

    여신님께 물어보면 분명 뭔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야!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1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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