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18화 (1,002/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18화 >

"그럼 다녀올게."

"다, 다녀오십시오."

"왜 지붕 위에서?"

······실비아와의 작별 인사를 이런 식으로 방해하다니.

너야말로 왜 여기까지 따라오는 거야? 배웅은 문 앞까지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했잖아.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나는 꾹 참고 무시하기로 했다.

방에서 할 말을 다 끝내고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 녀석 눈치 보느라 해야 할 말도 제대로 다 못 할 뻔했네.

"잠깐. 무시하지 마."

내가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레이는 내 옷까지 잡아당기며 주의를 끌려고 했다.

에에잇! 귀찮아 죽겠네! 넌 제발 눈치 좀 있어라! 꼭 그렇게 연인 사이에 끼어들어야겠어?

게다가 레이는 지금 실비아한테 살짝 질투하고 있는 건지, 나까지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더욱 분위기가 안 잡혔다.

진짜 여러모로 민폐라니까.

"뭐 할 말이라도?"

"없지만······."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이것아. 그래서 무시한 거야.

"왜? 작별인사로 뽀뽀라도 해줘?"

말하고 나서, 나는 바로 아차 싶었다.

아니. 변명을 좀 하자면, 뭔가 계속 마음속에서 질투심이 끓어오르니까 그걸 완화시키기 위해 농담이라도 던져서 기분 전환을 한다는 게 그만.

"······!"

그나마 다행인 건, 레이도 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는지 제대로 반응을 못 했다는 점이었다.

"싫으면 말고. 얘한테 대신하지 뭐."

"흐얏?!"

"잠······!"

그래서 나는 순식간에 타겟을 바꿔 실비아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줬다.

레이 앞에서 실비아한테 하는 것도 문제 아니냐고?

뭐 어때. 어차피 레이 저 녀석은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동성애자라는 의혹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래도 저래도 의심받는다면 그냥 실비아한테 작별 키스라도 해주는 걸 택하겠어.

뭐, 그 대가로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던 질투심이 폭발한 것처럼 커졌지만.

위험해. 이대로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

빨리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나는 구미호의 산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실은 아까 실비아의 방에 있을 때 미리 반지로 저쪽에 연락을 해놨거든.

"그럼 3일 후에 보자!"

점멸하는 불빛의 살짝 아래. 어둠이 짙게 깔린 곳에 시선을 맞추고, 나는 곧바로 그림자 이동을 썼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마나 고갈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었으니까.

여기로 다시 올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한 줌의 마나를 남기겠지.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자 이동의 스킬 레벨이 오르면서 마나 효율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실은 지난밤에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확인해봤는데, 스킬 레벨이 엄청 올라있더라고.

그리고 스킬 설명에 일정 거리를 넘어가면 거리에 따라 마나가 추가로 소모된다는 설명이 덧붙어져 있었다.

······호, 혹시 내가 전에 속으로 버그 X망겜이라고 한 걸 듣고서 바로 수정하신 건 아니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별걱정 없이 그림자 이동을 사용한 나는, 역시나 마나가 부족해서 몸이 무거워지기는 했어도 기절하는 일은 없이 구미호 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장 스킬창을 열어서 확인해 보니, 이번에는 역시나 스킬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역시 스킬 레벨이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오른 건 처음 한 번뿐인가.

혹시 장거리 이동을 반복하는 걸로 그림자 이동의 레벨을 빠르게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지만, 그 버그 역시도 스킬 설명을 추가하면서 같이 고쳐버리신 모양이다.

뭐, 살짝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당시이이인!"

스킬 창을 보며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일 처음 "다"라는 소리는 멀리서 들렸는데, 그 짧은 단어를 내뱉는 사이에 점점 소리의 근원지가 가까워지더니 마지막 "인!"에 이르러서는 내 코앞에서 들렸다.

그리고 그걸 깨달았을 때, 내 몸에 마틸다의 몸이 파고들고 있었다.

"아아아······당시인······제가으으응읍?!"

언제나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핑크핑크한 시선을 내게 보내며 사랑을 속삭이려 했던 마틸다였지만, 그 전에 내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아니. 실은 레이 그 녀석이 아직도 실비아한테 질투하고 있는 건지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말이야.

그나마 눈앞에 실비아가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직접적으로 실비아한테 질투심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뭔가 괜스레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떨어져 있어도, 감정 링크는 제대로 작동한다는 얘기다.

아무튼 그렇게 화가 났을 때 화를 식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우리 애들이랑 달달한 기분을 맛봐서 중화시키는 거다.

"아읏······다, 당신······곧 다른 분들도······."

내가 갑자기 이렇게 정열적인 키스로 환영해줄 거라고는 마틸다도 예상을 못 했던 건지, 처음의 그 폭주하는 핑크빛 마틸다는 어디로 가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깜짝 놀라며 부끄러워하고 있는 추기경님만이 남았다.

그 핑크빛 마틸다도 내가 같이 폭주하면 부끄러워하는구나. 이거 좋은 걸 알았네.

"그럼 그만둘까?"

"하아아······그만두지······말아주세요······."

하지만 핑크빛 모드가 깨졌다고 해도 마틸다가 날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내 달콤한 속삭임에 추기경님은 곧바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만······하앗······두시지."

뭐, 그래도 계속 키스하고 있을 수는 없었지만.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주자, 거기에는 나무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라의 모습이 있었다.

"오, 사라. 다녀왔어. 왜 그렇게 숨이 가빠? 내가 그렇게 빨리 보고 싶었어?"

"······그래. 이 바보야."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라의 시선은 명백하게 마틸다를 향하고 있었다.

아, 그런가. 또 핑크빛 마틸다를 제압하고 있느라 진이 다 빠진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반지 너머로도 소란스러웠지.

그렇게 자기가 진을 빼가며 제압하고 있던 마틸다가 이렇게 내 품에서 얌전해진 모습을 보니, 사라로서는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말로만 그만하라고만 하고 직접 나랑 마틸다를 떼어놓을 생각은 안 하는 걸 보니 말이다.

"좋아. 훌륭한 마음가짐이군. 자, 그럼 너도 어서 이 오빠 품에 와서 안겨."

"뭐야. 그 거들먹거리는 말투."

마틸다를 살짝 옆으로 옮기고 사라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며 팔을 벌리자, 사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내 품에 들어오기는 했다.

아까 내 농담에 순순히 대답한 것도 그렇고, 얘도 어지간히 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제도 보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못 만난 회포를 다 풀기에 하루는 너무 짧았으니까 말이야.

"하앗. 하앗. 두 분······여기에······하아······두 분 다 너무 빠르세요. 어머?"

그렇게 마틸다에 이어서 사라까지 껴안고 있자, 뒤이어서 천사님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등장하셨다.

다들 이렇게 숨을 헐떡이는 걸 보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온 건가. 일단 불빛이 점멸하는 곳 바로 밑을 보고 이동했지만, 너무 멀어서 조금만 시선이 어긋나도 거리가 확 벌어지니까 말이야.

"후훗. 다 같이 껴안는 시간인가요?"

아무튼 그렇게 등장하신 천사님은 우리를 보고 가련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시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등 쪽으로 돌아와서 몸을 밀착시켰다.

다만, 어째선지 내 등에는 기대했던 그 뭉클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뭉클하기는커녕 오히려 살짝······.

"으긋! 으읍! 읍!"

아, 너였냐. 다들 발로 뛰어올 때 혼자 마법으로 불쑥 나타나니까 그런 불상사를 겪는 거잖아.

"디아나. 치사하게 천사님 가슴 혼자 독점하지 마."

나와 천사님 사이에 끼여서 파닥거리는 게 살짝 불쌍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모습을 보고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커서, 나는 무심코 장난을 치고 말았다.

"구, 구원 씨도 차암!"

의도치 않게 천사님한테도 같이 장난이 들어가 버린 모양이었지만.

하지만 그 장난 덕분에 천사님이 부끄러워하시며 살짝 몸을 뒤로 뺐고, 그사이에 중간에 끼어있던 디아나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모양이다.

"푸하합! 한 적 없네! 이 몸에게는 필요도 없네! 자네 혼자 다 가지게!"

"어? 진짜?"

"대놓고 좋아하지 말게!"

만나자마자 토닥토닥 공격이라니. 디아나도 애정 표현이 과격하다니까.

아무튼 이렇게 다 같이 모여서 끌어안고 있다 보니 어느샌가 마음속에 있던 부글부글 끓던 감정도 말끔하게 사라져서, 나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우리 애들을 마주해 재회의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구원 씨, 실비아 씨는 괜찮으셨나요?"

그리고 역시나 천사님 아니랄까 봐, 재회의 기쁨을 나누자마자 천사님은 제일 먼저 실비아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 응. 괜찮았어. 뭐, 역시나 무리하고 있어서 조금 위험하기는 했지만. 일단은 잘 수습할 수 있었어."

"자네. 그런데도 실비아 양을 두고 바로 이곳으로 돌아온 겐가?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네."

그런 내 대답이 조금 못마땅했던 건지, 디아나가 엄한 표정으로 날 가볍게 꾸짖었다.

만나러 와줘서 기쁜 건 기쁜 것이고, 아닌 건 아니라는 얘기겠지. 역시나 이런 점은 철저하신 대마법사님이었다. 아까까지 천사님의 가슴에 격노하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야.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급하게 알아보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생겨서."

"여기까지 직접 와서 말인가?"

"응. 우선 집으로 가자."

사실 알아보고 싶은 일 중 하나는 여기서 바로 물어봐도 되는 일이었지만, 아무래도 다들 모여 있는 데서 물어보기에는 좀 그래서 말이야.

아니. 우리 애들한테 비밀을 만드는 건 싫으니까 언젠가는 밝히긴 밝혀야겠지만, 그래도 다른 여자랑 섹스, 그것도 첫 경험을 가져가는 바람에 감정이 이어졌다는 걸 우리 애들이 알면······응. 역시 그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하기로 하자.

그렇게 해서 우선은 하릴없는 얘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긴 우리였지만, 어째선지 모두의 발걸음은 마을 외곽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애들이 머무르고 있다는 그 건물 쪽으로.

설마 내가 집에 가자고 한 걸 구미호 마을의 집에 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건가?

"텔레포트 마법진은 마을 중앙에 있었지?"

"네? 구원 씨, 위로 올라가실 건가요?"

그렇게 생각해서 발걸음을 멈추고 떠보자, 역시나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는지 천사님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천사님뿐만 아니라 다들 하나같이 마을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응. 그럴 생각인데. 왜?"

뭔가 천사님의 반응이 생각했던 것보다 과해서 되묻자, 천사님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 끝을 내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천사님의 말을 통해, 나는 왜 다들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으응······그게 말인데요······지금 구원 씨가 마을로 가시면······."

"아, 그런가. 나 모르는 사이에 구미호 하렘······아야!"

"이게 진짜!"

"말실수! 말실수라니까! 전에 속으로 생각만 했던 단어가 무심코 입 밖으로······아야!"

내가 진짜 왜 이러지? 내가 이래 봬도 말실수를 이렇게 자주 하는 성격은 아닌데?!

서, 설마! 설마 이것도 레이 그 녀석의 영향인가?! 그러고 보니 뭔가 살짝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게 패닉 상태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맨날 그런 생각만 하니까 입 밖으로 나오는 거잖아! 그런 생각만 하다가 우리 없을 때 바람이라도 피는 거 아니야?"

"그, 그럴 리가요!"

아마 사라의 말에는 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을 거다. 얘가 이래 봬도 날 엄청나게 믿고 있으니까.

오히려 내가 바람은 절대 안 필 거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저런 말이 쉽게 나온 거겠지.

하지만 자신이 패닉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빠져있던 내게 갑작스레 던져진 그 말은 너무도 파장이 커서, 나는 자기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곁에서 걷던 네 명의 발걸음이 동시에 우뚝하고 멈췄다.

"야. 구원." "자네." "구원 씨?" "당신?"

무서워! 엄청 무서워! 지금 봤어?! 넷이서 동시에 무표정으로 날 불렀어!

완전 호러 영화가 따로······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 진짜 바람 같은 거 안 폈어! 오빠 믿지?!"

나는 두 팔을 휘휘 저이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분명 이런 말이라도 평소 같으면 바로 믿어줬을 텐데,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우리 애들이 모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내 얼굴을 빤히 보기만 했다.

어, 어? 나 혹시 진심으로 위험한 거 아니지?

그, 그래!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아까 하려다 만 말을 지금 해버리자!

"저, 정말이라니까! 그래! 디아나! 안 그래도 디아나한테 물어보려던 게 있었는데!"

"······뭔가."

"나 디아나랑 키스해서 수명을 공유하게 됐잖아! 그거 어떻게 해······!"

해지하는 법 없어?

그렇게 말을 다 내뱉기 직전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서 말을 도중에 멈출 수 있었다.

크, 큰일 날 뻔했네! 아무리 패닉 상태라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18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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