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16화 (1,00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16화 >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또 하나의 가능성. 그 가능성에 나는 다시 한번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찬찬히 되새겨봤다.

    그래. 확실히 나는 레이가 흥분할만한 타이밍에 같이 흥분했었다.

    하지만 같은 타이밍에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 과연 흥분뿐이었을까?

    예를 들어 어제 느낀 질투심. 그 질투심은 냉정하게 생각해서 말이 안 되는 감정이었다. 아무 관계도 아닌 여자가 내 여자가 달고 있는 딜도를 빤다고 질투한다니.

    심지어 그때 내 질투심은 분명히 실비아를 향하고 있었다.

    실비아를 향한 레이의 질투심을 나 역시도 느끼게 됐다고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거기에 지금도 이렇게······.

    가슴이 꽉 죄어오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공포. 그러면서 동시에 구역질이 차오르는 혐오감. 아마 레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느끼고 있을 그 감정을, 나 역시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여기에 살고 있다는 얘기는, 다크 엘프도 여신님의 종족이 아니라 전쟁신의 종족이라는 얘기잖아?

    그런 종족이 평생의 반려를 정하는 조건이 첫 경험이라는 것도 이상했는데, 심지어 공유하는 게 흥분뿐이라니.

    그래서는 첫 키스로 반려를 정하고 수명을 공유하는 엘프보다 다크 엘프가 훨씬 더 여신님의 종족 같잖아.

    하지만 지금 보니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이건 역시······그렇다고 생각해야겠지?

    "레이······."

    아니. 그래도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제대로 확인해볼 필요를 느낀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서 레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그 턱을 사뿐히 받쳐 들어서 시선을 맞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렀다.

    "눈 돌리지 마. 진지하게 얘기해줘. 너 날······."

    이 녀석이 나한테 마음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물론 그 감정이 단순히 구해준 사람에게 느끼는 고마움인지, 아니면 이성으로서 느끼는 연정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적어도 이 녀석이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신경 쓰이는 남자가 이렇게 분위기를 잡고 접근하면, 특히나 그 남자가 이렇게 잘생기기까지 했으면, 여자로서는 도저히 설레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그리고 그 감정이 내게도 느껴진다면, 내 추측은 확실해진다는 얘기다.

    "나, 난······."

    두근두근두근두근.

    내 생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의 얼굴이 점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심장 소리 역시 시끄러울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다만. 내 작전에도 한가지 오류가 있어서, 이런 방식으로는 서로의 감정이 공유되는 건지 도저히 확인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젠장! 이 녀석! 쓸데없이 외모는 좋아서! 이렇게 생긴 여자가 이런 표정으로 이렇게 가까이서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리 마음이 없어도 심장 정도는 떨리잖아!

    "됐어."

    "무, 뭐 하는 거야?!"

    잡고 있던 레이의 턱을 뒤로 밀치면서 거리를 벌리자, 갑자기 꿈에서 깬 표정으로 레이는 내게 버럭 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네 감정에 신경 써주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아니. 어떤 의미로는 네 감정에만 신경 써야 할 때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지. 그게······왁!"

    아무렇지 않게 얘기를 하는 척하다가, 나는 갑자기 두 손을 들며 큰소리를 질렀다.

    이젠 어떤 감정이든 좋아. 그냥 공유가 된다는 것만 확인하면 돼.

    "······뭐하는 거야?"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레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 그러니까 좀 놀라라고! 왜 이런 건 또 안 놀라는데?! 무슨 여자가 이렇게 겁이 없어?!

    "귀염성 없기는······."

    머리 위로 들었던 손을 내리면서, 나는 너무 무안한 나머지 무심코 그런 말까지 중얼거렸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게 또 레이의 귀에도 들어가 버린 모양이었다.

    "······거짓말."

    "뭐?"

    "내가 일반 상식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그런 거짓말까지 통할 것 같아?"

    일단 자각은 있었구나. 상식이 부족한 거.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인식은 많이 부족한 것 같지만.

    "그놈들이 말했어. 나 생긴 건 최고라고."

    그놈들? 아, 그 강간마들 말하는 건가?

    아니. 그보다 너 그거 칭찬이······뭐, 외모에만 초점을 맞추면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될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대화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랑 대화할 때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쓰게 만드는 녀석이라니까.

    "내가 말하는 귀염성이라는 건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고. 생긴 게 아니라 성격을 말하는 거야. 성격. 예를 들면 우리 실비아······."

    그런 레이의 본의 아닌 흔들기에 당해버린 걸까?

    나는 무심코 이 타이밍에 실비아의 이름을 꺼내고 말았다.

    "너 진짜 호모야?"

    "아니거든!? 네가 여자니까 일부러 남자 중에 성격 귀여운 애를 골라서 말해준 거잖아!"

    순간 아차 싶었지만, 다행히 내 뛰어난 순발력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 남자의 성격이 귀여워? 반대 아니야?"

    레이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래도 다행히 위화감은 느끼지 못한 모양이었다.

    휴우. 역시 나야. 원래 세계에서 ‘물에 빠져도 입만 둥둥 떠다닐 놈’이라는 칭호는 괜히 받은 게 아니라니까. 칭찬이 아니라고? 나도 알아.

    아무튼 실수로 꺼낸 실비아의 이름이었지만, 그 실수 덕분에 확실해진 것 또한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아무 이유 없이 실비아에게 질투심이 느껴졌거든.

    이건 역시 레이 이 녀석이 느낀 감정이 내게도 전해져왔다고 생각해야겠지?

    "아무튼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네 종족에 대해서 뭐 들은 거 없어? 다크 엘프 특유의 의식이나 계약 같은 게 있다든가 하는."

    "······몰라. 왜?"

    별로 기대도 안 하고 한 질문이었지만, 정말로 모른다는 얘기를 듣자 조금 힘이 빠졌다.

    하긴 대충 얘기로만 들어도 가정교육은 개판이었던 것 같은데 오죽하겠어.

    특히나 순혈 다크 엘프에 관한 점은 직전까지 철저하게 숨겼을 테니까. 당연히 자기 종족의 특징 같은 얘기도 레이한테는 전혀 하지 않았을······어? 잠깐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에, 나는 갑자기 거의 완성되어있던 퍼즐에 새로운 조각이 하나 더 추가된 느낌이 들었다.

    순혈 다크 엘프는 첫 경험으로 평생의 반려를 정하는 의식을 맺고, 그를 통해 상대방과 감정을 공유한다.

    그리고 바프라 역시도 순혈 다크 엘프다. 물론 레이의 엄마도.

    그렇다는 얘기는 레이의 부모는 서로가 서로에게 계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면 둘이 섹스할 때는 당연히 서로의 흥분 상태가 공유되며 더욱 큰 쾌감을 불러일으킬 거다.

    내가 어제 잘하지도 못하는 레이의 펠라에도 그다지 참지 못하고 싸버린 것처럼.

    나야 나 자신이 성자에 주변에 엄청난 여자들이 많아서 온갖 쾌감을 주고받고 많이 해봤으니 그나마 괜찮았지만, 웬만한 사람이 그 쾌감을 맛보고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것도 섹스가 금기시되고 있는 이런 세계에 사는 놈이?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놈이 섹스에 미쳐있다는 것은 그 강간마들이 나르던 여자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두 적당한 연령대의 잘빠진 여자들. 그런 여자들을 굳이 모아서 바프라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놈은 분명 섹스의 쾌감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머릿속에 피어나게 된다.

    놈은 순혈 다크 엘프를 원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딸인 레이까지 범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이유가 그것 하나뿐이었을까?

    배에서 만난 그 강간마들은 레이를 잡아놓고도 절대 레이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봐도 절대 자제심이 강한 타입은 아니었고, 섹스의 쾌감에도 제대로 중독된 것처럼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다. 바프라님의 목적만 완수하면 자기들도 레이를 따먹을 수 있을 거라고.

    그때는 그냥 레이가 순혈 다크 엘프를 낳은 다음에는 자기들 차례도 있을 거라는 의미로 해석했었지만, 실은 다른 뜻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바프라는 순혈 다크 엘프와의 성관계를 통해 쾌감에 중독되어 버렸다.

    심지어 순혈 다크 엘프는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는 보기 좋은 핑곗거리도 있어서 매일같이 해댈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다가 진짜로 아이를 가지게 됐고, 자신이 반려로 삼은 다크 엘프는 죽고 말았다.

    다른 여자와도 섹스를 해봤지만, 물론 그때 느꼈던 그 쾌감은 느낄 수 없었을 거다.

    놈은 분노로 미쳐서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때려 부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순혈 다크 엘프인 자신의 딸이 눈에 들어온 거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닐까? 자신의 첫 경험 상대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그렇다면 다른 순혈 다크 엘프의 첫 경험을 가져와서 흥분을 공유하면 된다고. 그렇게 하면 그때 느꼈던 그 황홀한 쾌감을 다시 느낄 수 있다고.

    물론 지금 이건 전부 내 상상이고 가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얻은 모든 퍼즐 조각이 딱딱 들어맞는 것 또한 사실이잖아?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여신님. 저희가 괜히 들쑤시고 다니지 않아도 여긴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전쟁신을 버리고 여신님 쪽에 붙지 않았을까요?

    나 혹시 같은 편으로 만들 놈들을 잘못 정한 게······아니. 놈들이 원하는 건 쾌락뿐이고, 여성을 경시한다든가 하는 점이 여신님의 교리와는 거리가 멀지.

    은사모 놈들이 이름은 좀 그래도 훨씬 여신님의 사상과 부합해.

    게다가 바프라 놈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는 짓이 너무 더럽잖아? 그래. 맞아. 난 틀리지 않았어.

    "크흠. 레이. 잘 들어. 나도 확실한 건 아닌데······."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덤으로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한 자기변호까지 마치고 나서, 나는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지만 레이에게 사실을 말해주기 직전, 나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됐다.

    나와의 첫 경험을 통해 평생 반려가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의식이 맺어졌다고, 정말로 말해줘도 되는 걸까?

    이걸 말해버리면 나 진짜로 얘한테 코가 제대로 꿰이는 거잖아. 굳이 나 스스로 그렇게 될 필요가······.

    "아마도 지금 너랑 나랑 어느 정도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그래도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유로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건 너무 쓰레기 같다는 생각도 있었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밝히지 않아봤자 언젠가는 들킬 일이었으니까 말이야.

    "감정을······공유해······?"

    하지만 내 말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레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예를 들어 네가 뭔가를 무서워하면 나도 괜히 무서워지고, 네가 흥분하면 나도 흥분하게 되는 거지. 물론 반대로 마찬가지고."

    "그, 그럼······."

    부연 설명을 듣고서야 드디어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됐는지 깨달았다는 듯,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래. 아마도 순혈 다크 엘프 고유의 특징 같은데. 자세한 건 나도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 다행히도 알아볼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

    나는 레이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주면서 그렇게 말을 이어나갔지만, 아무래도 레이가 놀란 이유는 나와 감정을 공유하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아까 방에 나가서 뭐 하고 왔어?!"

    뭐?! 지금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고 제일 먼저 태클 걸 부분이 그 부분이야?! 넌 대체······.

    "내가 그렇게 흥분했으니까, 너도 그만큼 흥분하고 왔다는 거잖아?! 나가서 뭐 하고 왔어!?"

    벌써 내 애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으로, 레이는 눈을 부릅뜨며 날 쏘아붙였다.

    이, 이 녀석······혹시 나랑 감정이 연결된 건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지?

    뭐 이런······진짜 괜히 얘기해준 거 아니야?

    "가서 딸치고 왔어!"

    일단 급한 불부터 끄기 위해서, 나는 레이에게 그렇게 외쳤다.

    살다 살다 여자한테 이런 말을 할 날도 오게 될 줄이야.

    그래도 혹시 이런 말을 하면 아무리 나한테 마음이 있어도 좀 깨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살짝 담은 발언이었지만, 레이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딸?"

    그러기는커녕 애초에 딸치고 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혼자 손으로 하고 왔다고!"

    "뭐야 그게! 앞으로 내가 할 테니까 혼자 하지 마!"

    넌 또 갑자기 뭐 이상한 것까지 화를 내고 있는 거야?!

    내가 혼자 딸을 치든 뭘 하든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말이야!

    "너랑 나랑 감정이 공유되는지 알아보려고 한 건데 너한테 해달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야!? 너 내 물건 만지면서 흥분 전혀 안 돼?!"

    "······그, 그런가······실은 조금 돼······."

    갑자기 부끄러워하지 마! 네가 부끄러워하면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진단 말이야! 감정이 공유돼서 쓸데없이 더!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16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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