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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06화 (99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6화 >

    옆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놈이 쇄도해오고 있음에도, 나는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퍼석!

    놈이 내게 다가오는 것보다 더 빨리, 빛나는 무언가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가서는 그대로 놈의 머리를 폭파했기 때문이다.

    실은 아까 기다리면서, 쓰레온한테 쟤가 헬레나를 강간했던 놈이라고 말해줬거든.

    놈의 운명은 쓰레온한테 얼굴을 보인 그 순간 이미 결정이 되어있었다는 얘기다.

    콰아앙!

    강간마의 머리를 폭파시킨 그것은 그 후로도 전혀 기세를 잃지 않고 찬란한 빛의 꼬리를 만들며 일직선으로 쭉 날아가서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땅에 박히며 그대로 폭발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까지 땅 울림이 전달되는 것이, 쓰레온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진짜 전쟁신이라는 놈은 무슨 생각으로 용사라는 직업을 만든 거야? 저 사기 직업 같으니라고.

    아무튼 땅울림 때문에 주변 놈들이 휘청이며 쓰러지는 와중에도, 나는 꼿꼿이 서서 턱을 잡고 들어 올린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강간마의 머리가 터지며 내 얼굴 옆을 그 피로 흥건하게 적셨지만, 그마저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왜 그러지? 계속 말하지 않고. 더 할 말이 없나?"

    "저, 저느······저는······."

    야. 아무리 내가 조금 무섭게 연출했다고 해도 그렇지, 수염 수북하게 난 아저씨가 진짜로 눈물을 질질 짜면 어떻게 하냐? 어차피 아까 오줌도 지렸겠다 막 나가겠다는 거야?

    아, 안 되지.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나도 모르게 표정이 풀린다고. 근엄하게. 메소드 연기를 잊지 말자.

    "아, 설마 이 피 때문인가? 이상하군. 피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아니면 혹시, 자네는 피를 흘리지 않나?"

    막 부활해서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박쥐를 때려잡은 슈퍼 초인의 기분으로. 내가 나지막하게 그렇게 질문하자, 놈은 입에 거품까지 물면서 기겁했다.

    오줌에 눈물에 거품에. 다 큰 아저씨가 아주 가지가지 한다.

    "저희는 바프라님의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인 직속 부대입니다!"

    그래도 여기서 더 말을 버벅대면 정말로 죽는다고 생각한 건지, 놈은 필사적으로 말을 자아냈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지만, 그 말에는 희망도 담겨있겠지. 자기들이 바프라의 직속 부대라는 걸 알리면 상황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

    그래서 나는 그 희망을 철저하게 부숴주기로 했다.

    "바프라? 새로 생긴 용사 가문의 방계인가?"

    이쯤 말하면 이 녀석들도 슬슬 내 정체가 짐작되겠지?

    그래. 지금 내 컨셉은 바로 은거 기인이었다. 세상에 막 나와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지만, 강하기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은거 기인.

    원래 무협이 배경이면 이런 컨셉의 캐릭터도 하나쯤은 있어 줘야 하잖아? 물론 여기가 무협 세계는 아니지만.

    "으아······아, 아아······."

    아무튼 내 질문에 마지막 희망까지 산산이 부서진 이 아저씨는, 절망이라는 두 글자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좌절했다.

    "용사의 방계조차 아니라는 건가? 흠. 요즘은 별 이상한 놈들이 다 설치는 모양이군. 그래. 그럼 목적은?"

    "네, 네?"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 목적 말일세."

    "그, 그건······."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 순순히 말하는 건 주저되는 건지, 아저씨는 처음으로 공포가 아닌 다른 이유로 말문이 막혔다.

    괜히 직속 부대 소속이 아니라는 건가.

    "왜? 말할 수 없는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납치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

    이제는 정말로 말도 나오지 않는지, 놈은 입만 뻐끔뻐끔 움직이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뭘 그렇게 놀라? 아까 쓰레온이 한 말을 생각해 보면 용사는 다들, 이 정도는 기본인 것 같은데.

    "흐익!"

    이 아저씨에게는 뭔가를 더 얻어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서, 나는 대충 아저씨를 땅에 던져버리고 쓰레온에게 눈짓을 했다.

    야. 뭘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거야? 지금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마차 안을 확인해봐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마차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자, 쓰레온은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았다는 듯 검을 잡고 가로로 가볍게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기분 나쁜 나무의 마찰음과 함께, 줄지어 늘어서 있던 마차의 지붕 부분이 비스듬히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진짜 용사라는 건 말이 안 되는 직업 같아.

    쓰레온의 퍼포먼스에 나조차도 내심 놀랐지만, 나는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 마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차 벽의 잘린 단면을 타고 이동하면서, 천장이 사라진 마차 안쪽을 하나하나 둘러봤다.

    쓰레온의 말대로, 제일 처음 바퀴를 잘라버린 마차 안에는 그냥 평범하게 전투 요원들만 타고 있었다.

    마부석에서 그런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은 녀석들답게, 놈들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조차 두렵다는 듯 구석에 얼굴을 박고 내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쯧쯧."

    나는 들으라는 듯 가볍게 혀를 한 번 차주고, 다시 그림자 이동으로 다음 마차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거기에는, 예상대로 나무통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이것도 쓰레온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곡차곡 쌓여 있는 나무통 중 제일 위 제일 앞줄의 나무통만 아슬아슬하게 윗뚜껑이 잘려서 그 안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것까지 일부러 그런 거면, 아무리 우리 편이라도 좀 무서운데.

    저놈이 매력 수치가 최악이라 나와의 상성이 극상성인게 지금처럼 다행으로 느껴진 적이 없을 정도였다.

    "흠. 이제 보니 그냥 사람도 아니고 전부 파릇파릇한 연령대의 여자들이었군. 그러면······."

    나는 마치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그렇게 말한 다음, 그림자 이동으로 빠르게 다음 마차로 넘어갔다.

    목적지는 물론 중앙에 있는 제일 화려한 마차다.

    다른 마차들은 대충 시선으로 훑는 척만 하고, 나는 얼른 중앙의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레이가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어휴. 저 철없는 녀석 하나 구하려고 내가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야지.

    "과연······."

    기절한 레이를 품에 안고, 나는 마차 밖으로 나오며 보란 듯이 레이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겁먹고 나와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마부석에 앉아있는 몇몇 놈들은 얼이 빠져서 내 쪽을 보고 있으니까.

    저런 놈들한테라도 이렇게 보란 듯이 보여주면, 나중에 바프라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겠어?

    "복장을 보아하니 이럴 생각으로 데려가는 모양이군. 제법 괜찮은 취미야."

    몇 번을 더 보란 듯이 가슴을 주물럭거렸지만, 역시나 레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내 품 안에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흠. 약인가. 거기 자네. 해독제를 가져오게."

    그래서 나는 곧바로 다음 타겟을 지목했다.

    "네? 저, 저 말입······."

    "들리지 않았나?"

    "드, 들렸습니다! 제대로 들렸습니다!"

    내게 지목당한 마부는 처음에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내가 가볍게 닦달하자 기겁하면서 내게 달려왔다.

    "그, 그러니까 해독제가······."

    하지만 마음만 앞서서 달려왔을 뿐, 놈은 레이를 깨울 해독제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진짜 귀찮아 죽겠네. 저 강간마랑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까 저 강간마가 가지고 있을 거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하지만 그렇게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놈을 다그치기로 했다.

    "모르나 보지?"

    "조,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내 부드러운 질문에 놈은 황급히 전투원들이 보여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허겁지겁 튀어나와서 강간마의 시체 곁으로 달려갔다.

    "으웨에엑!"

    그리고 속에 든 것을 시체 위로 게워내면서도, 필사적으로 시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진짜 오늘 아저씨들의 못 볼 꼴을 몇 번이나 보는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실은 나도 아까부터 강간마의 시체는 웬만하면 시야에 안 들어오도록 하고 있거든.

    쓰레온 녀석. 아무리 그래도 사람 머리를 폭발시키냐. 괜히 봤다가 꿈에 나올까 겁나네.

    "여,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튼 마부는 결국 강간마의 품에서 해독제를 찾아내서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게 해독제를 바쳤다.

    "흠."

    솔직히 더러워서 받기 싫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해독제를 받아서 주머니를 열고 그 내용물을 레이의 입에 털어 넣었다.

    "으, 으음······."

    그리고 얼마 후. 혹시 자신이 가져온 게 해독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마부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을 때, 드디어 레이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노려서, 나는 레이의 가슴을 다시 한번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이 세계의 밤이 어둡고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도, 이렇게 내 품에 안겨서 지근거리에서 올려다보면 내 얼굴이 보일 테니까.

    정신을 차린 레이가 내 얼굴을 보면 갑자기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레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행동으로 그 몸을 굳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전에 헬레나가 강간당하고 있을 때만 봐도 알 수 있듯, 얘는 그런 상황에서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모양이니까.

    "아흣!"

    그리고 역시나, 가슴이 움켜쥐어지는 감촉에 눈을 뜬 레이는 내 얼굴이 눈에 안 들어오는지 몸을 덜덜 떨기만 했다.

    좋아. 얘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일을 끝내버리자.

    "그래. 이제야 반응이 조금 재미있을 것 같군. 좋아. 그럼 자네들은 이만 가보게."

    "으흣······아응······."

    "네, 네?"

    레이의 가슴을 주물럭거리면서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마부가 얼빠진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나저나 레이 이 녀석, 뭔가 반응이 과하지 않아? 나 성자 스킬 같은 거 안 쓰고 있지?

    "자네들은 젊은 나이에 하나같이 귀가 어두운 것 같군. 이번에도 들리지 않았는가?"

    "드, 드, 들렸습니다!"

    그제야 마부는 허겁지겁 마차로 돌아가서는, 정신을 못 차린 듯 나머지 마차를 내버려 두고 혼자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 저, 저런······!"

    그리고 그 마부의 행동에 촉발됐는지, 다른 마차들도 당황하면서 황급히 마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길 한복판은 우리 텐트가 막고 있기 때문에 지나갈 수 없었지만,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된 길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듯 길을 빠져나가 울퉁불퉁한 지면을 달려나가는 마차들.

    마차를 심하게 덜컥거리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연달아 들렸지만, 그것도 마차들이 멀어지며 이내 조용해졌다.

    그렇게 해서 결국, 맨 처음 쓰레온이 말의 다리와 마차 바퀴를 잘라버린 그 마차 하나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마차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게 됐다.

    문제는 그 마차에 전투 요원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는 점이지만.

    "흐, 흐헷······헷······."

    분위기를 파악하고 슬금슬금 마차에서 기어 나온 녀석들은, 자기들 딴에 애교 있는 미소라도 지어 보이려는 건지 실성한 것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뒷걸음질 쳐서 사라져버렸다.

    "저대로 도망가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거냐?"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 쓰레온은 검을 움켜쥐었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저놈들이 아니라도 너희 얼굴은 팔릴 대로 팔렸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그 점을 이용해보자고."

    갑자기 나타난 말도 안 되게 강한 은거 기인.

    이 세계에 사는 놈들이라면 누구나 용사를 떠올리게 될 거다.

    용사의 위용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놈들이, 과연 그 소문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특히나 바프라의 반응은 심히 볼만할 거다.

    그 용사로 의심되는 놈들이 자신이 비밀리에 젊은 여자들을 모으고 있다는 것도 알아버렸고, 심지어 순혈 다크 엘프 후계자를 낳아줄 자신의 딸마저 데리고 있는 거니까.

    원래 계획에서 조금 어긋나버리기는 했지만,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드디어 레이를 품 안에서 놔주려고······.

    "하읏······으응······으흣······."

    아니. 그러니까 얘는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신음이 거친 건데?

    그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그 뺨이 살짝 상기되어있는 게 보였다.

    어? 잠깐만? 나 혹시 진짜로 성자의 손길 같은 거라도 썼나?

    혹시나 해서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난 스킬 같은 건 쓰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6화 > 끝

    ⓒ CurtainCall#o8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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