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5화 >
"잠깐 나와봐."
"뭐? 하지만······."
내가 턱짓으로 부르자, 쓰레온은 헬레나를 보며 조금 주저하는 눈치를 보였다.
"잠깐이면 되니까. 괜찮아. 어차피 저놈들은 밑에서 파란이 잘 붙잡아두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올라올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헬레나. 잠깐만 기다려줘. 금방 다시 올게."
어울리지 않게 든든한 척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준 다음, 쓰레온은 방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인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어떻게 된 거야?"
"네 말대로 듀크와 그렉에게 사정을 말하고, 파란에게도 네가 말한 대로 부탁했어. 그랬더니 파란이 알겠다고, 어차피 도시 밖으로 아무도 못 나갈 테니까 안심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난 그대로 헬레나를 달래주러 왔지. 그리고 잠시 후에 갑자기 저택으로 이상한 놈들이 찾아왔고, 헬레나는 창밖으로 놈들의 모습을 보더니 갑자기 저렇게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어. 저놈들이 그 배의 놈들인 거지?"
즉, 이 녀석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는 건가.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녀석은 파란이 이곳의 영주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자기가 실비아랑 같이 열심히 썰어대던 경비병들이 파란의 휘하라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냥 시킨 일만 하고 마음 편하게 헬레나나 달래주러 왔다는 건가.
아니. 헬레나를 달래주라는 것도 내가 구실로 써먹은 말이니 그건 상관없지만.
그래도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경비병들이 자길 보고 움찔움찔 떨었을 텐데 어떻게 그걸 눈치 못 챌 수가 있지? 평소와 그렇게나 다른······서, 설마. 익숙한 건가?
이쯤 되니 아무리 나라도 동정심이 들지 않을 수 없어서, 나는 말 없이 쓰레온의 어깨를 톡톡 쳐줬다.
"뭐, 뭐냐 갑자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그러면 그 바보 콤비는?"
"둘이라면 신과 유리한테 갔어. 그 둘한테 네가 어제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러······아, 파란한테도 그렇게 말했는데, 네가 어제 없었던 건 배에 너무 깊이 잠입했다가 들키지 않고 빠져나올 타이밍을 놓쳐서라고 둘러댔어."
"············."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바보 같아지지 않냐?
타이밍을 놓쳐서 하루 동안 배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갇혀 있었던 놈이 되어버렸잖아.
"불평하지 마. 내가 사기꾼도 아니고 매번 너처럼 그럴듯한 말이 튀어나오지는 않는다고."
쓰레온도 일단 찔리는 건 있는지, 내 표정을 보고 그렇게 변명했다.
야. 너 지금 나한테 사기꾼이라고 은근슬쩍 디스한 거냐?
젠장. 여기 놈들한테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해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서 할 말이 없네.
오냐. 그래도 실비아랑 같이 싸워준 걸 생각해서 오늘은 참아주마.
게다가 아직 할 일이 남아있기도 하고.
"그러면 얘기는 끝났지? 그러면 나는······."
"아니. 아직이야. 아직 할 일이 있어."
쓰레온은 헬레나를 혼자 두는 게 불안하다는 듯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쓰레온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할 일?"
"그래. 지금부터 밖으로 가서······."
"너 내가 한 말 못 들은 거냐?! 밑에 있는 저 녀석들 때문에 헬레나가 불안해한다니까!"
진짜 얘 속된 말로 해서 떡정이라는 게 제대로 들었나 보네.
그야 자기한테 그렇게나 반응해주는 여자는 처음이었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놈이 맨날 자기 레벨에 맞는 여자를 찾아다녀서 그렇지, 레벨이 낮은 일반인들은 누구나 그렇게 반응할 텐데.
"그러니까 저 녀석들을 해치우러 가자는 거야. 그것만큼 헬레나가 안심할 일이 또 있겠어? 가서 헬레나한테 지금부터 네가 저놈들을 처치하고 오겠다고 말하라고. 그리고 무사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면, 넌 명실상부 헬레나만의 용사님이 된다는 거지."
"············하, 하지만 지금의 헬레나를 혼자 두는 건······."
쓰레온은 내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듯 보였지만, 그래도 아직 불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만 다른 사람을 붙여두면 되잖아? 신과 유리가 있는 방이라든가. 어차피 거기에 듀크나 그렉도 있으니까. 그리고 이대로 저놈들이 저기에 진을 치고 있으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헬레나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는다고."
"······그건······알았어."
뭐, 그래 봤자 결국 내 설득에 넘어가 버렸지만.
"제대로 최대한 멋있는 말을 잔뜩 해놓고 오라고. 널 위해 내가 놈들을 쓰러뜨리고 오겠다든가. 안심하고 여기 있어 주면 된다든가. 널 불안에 빠뜨릴만한 건 모조리 내가 없애주겠다든가."
"넌 진짜······."
내 말에 쓰레온은 조금 존경심까지 엿보이는 시선으로 날 바라본 후, 황급히 방으로 돌아갔다.
저 녀석. 내가 방금 했던 말을 그대로 다 써먹을 생각이군. 아까는 사기꾼이라고 했던 주제에.
아무튼 쓰레온이 헬레나에게 말을 전하러 간 사이, 나는 나대로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지나가는 메이드를 하나 잡아서 파란에게 어떤 말을 전하게 한 다음, 신과 유리의 방으로 가서 대충 얼굴도 비쳤다.
"형님!"
"구원 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그럼 무사하지 어디 다쳤겠냐? 그냥 조금 조심하느라 늦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넌 왜 일일이 호랑이 얼굴을 그렇게 부담스럽게 들이미는 거냐고.
"그보다 조금 묻고 싶은 게 있어. 내가 없는 동안 실비아와 레온이 성문에서 소란을 피웠다고 들었어. 가보니 아예 피바다가 되어있던데, 여기 영주는 파란이잖아? 그러면······."
"아, 그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사실 도시 경비대의 피해는 생각하시는 만큼 크지 않습니다."
파란이 이곳의 영주라는 걸 알게 되니, 파란과의 협력 관계가 더욱 중요하게 생각됐다.
그래서 조금 불안했지만, 신이 한 말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그래?"
"네. 소식을 들은 파란이 곧바로 경비대에게 명령을 내려 관여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상대할 수 없는 실력자니, 지원군이 올 때까지 우선은 주변을 에워싸고 경계 태세만 유지하라고 말이죠. 그래도 피해가 없었던 건 아니라고 합니다만, 성문 앞 광장을 물들인 피의 대부분은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행상인들의 호위 부대일 겁니다."
과연. 성문 앞에 굴러다니던 시체 대부분은 경비대의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인가.
파란이 밑에서 저놈들을 잡아두고 있는 상황과도 얘기가 맞아떨어져서, 나는 일단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뭐, 그래도 여전히 실비아와 쓰레온의 얼굴이 팔려버린 건 골치 아픈 일이지만.
"하지만 두 분 다 놀라운 무용이더군요. 레온 님은 용사이시니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비아 님까지 그 정도 용맹을 떨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눈까지 빛내며 둘의 무용담을 칭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는 강자존의 세계였지. 강한 것이 정의고, 싸움 실력이 전부인 세계.
그러면 만약 실비아와 레온이 때려 부순 게 도시 경비대였다고 하더라도, 파란은 우리 쪽에 붙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아예 쟤들을 데리고 힘으로 이 세계를 무력 통일해버리는 게 제일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불쑥 들었다.
뭐, 격한 전쟁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전쟁신의 부활을 앞당기는 상황인 만큼, 의미 없는 생각이었지만.
아무튼 그러면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쓰레온이 헬레나를 데리고 방으로 찾아왔고, 나는 쓰레온에게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 기다리라고 한 후 곧바로 실비아가 기다리고 있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까지 가려면 저기 마차 근처도 지나가야 하는데, 은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쓰레온을 데려갈 수 없으니까 말이야.
어차피 저택 경비병들도 쓰레온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뒤로 가서 담 정도는 넘을 수 있겠지.
"실비아."
"구원 님!"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려버렸지만, 실비아는 얌전히 창고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문틈으로 저택의 상황을 엿보고 있기는 했지만.
"오래 기다렸지?"
"아, 아닙니다."
은근슬쩍 건 손잡이를 놓고, 실비아는 내 눈치를 살폈다.
진짜 귀여워 죽겠다니까. 얘가 아까 성문에서 살기를 줄줄이 내뿜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뭐, 그 살기도 너무 좋아하는 내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해서 내뿜은 거지만!
"그럼 가자."
실비아의 손을 잡고, 나는 들어왔던 루트 그대로 저택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쓰레온과 합류해서 또다시 도시를 들어왔던 루트 그대로 도시 밖으로.
아까 신에게 미리 들어둔 수도로 가는 방향의 길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길 한가운데에 황급히 텐트를 쳤다.
그리고 가운데에 깔아둔 모닥불의 불을 쬐면서, 우리는 놈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까 메이드를 시켜서 파란에게 전한 말은 다른 게 아니다.
그냥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고, 놈들을 1시간 정도만 더 붙잡아두다가 그냥 도시 밖으로 보내주라는 부탁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히 놈들은 이 길을 따라오겠지.
히히이잉!
하루종일 밥도 못 먹었을 둘에게 인벤토리에 있던 음식을 꺼내주며 느긋하게 기다리기를 수 분. 아직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근처에서 마차가 황급히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한 시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촉박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뭐, 그런 만큼 딱 처음 이 길을 지나가는 놈들이 저놈들이 되어서, 우리로서는 편해졌지만.
"뭐? 어떤 미친 새끼들이 길 한복판에서 야영을 하고 있어?!"
마차 한가운데에서, 강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도 참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네.
자기들이 지나가야 할 길 한복판을 누군가 가로막고 있는 게 처음도 아닐 텐데, 마치 그게 누군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오만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잠깐동안 조용하다 싶더니,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며 마차가 우리 쪽으로 돌진해왔다.
귀찮게 상대할 가치도 없으니 그대로 밀고 지나가 버리겠다는 생각인가.
하여간 쓰레기는 끝까지 쓰레기로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마차 안에 실려있는 거 전부 여자들이니까 조심해라."
"알고 있다니까."
내 말에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한 후, 쓰레온은 검에 검기를 불어넣었다.
히히이이잉! 촤아아악! 끄아아악!
그리고 그 검이 번뜩였다고 느낀 순간, 갖가지 시끄러운 소리가 한데 뒤섞여서 들려왔다.
마차가 있는 쪽을 보니, 땅에서 30cm 정도의 높이에 있는 모든 것이 일자로 베어져 있었다. 마차 바퀴부터 말의 다리까지 모든 것이.
아까 들은 그 소리의 정체는 바로 다리가 베인 말이 나동그라지는 소리. 바퀴를 베인 마차가 땅에 곤두박질치면서 그대로 미끄러지는 소리. 그리고 안에 있는 놈들의 비명이었다.
"야! 안에 여자 있다니까!"
"저 마차 안에는 없어."
뭐? 아니. 그러고 보니 여기 놈들은 묘하게 사람의 기를 읽는 능력이 탁월했지.
이놈도 그거 비슷하게 용사 파워니 뭐니 하는 능력으로 그런 게 가능한 건가?
하여간 저놈의 사기 직업은!
"무, 뭐야?!"
"노, 놈들입니다!" "히이이익!" "우린 죽었어!"
그제야 우리의 정체를 파악했는지, 거의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가 곳곳에서 전해져왔다.
아무리 그래도 바프라의 직속 특수 부대라는 놈들이 너무한 거 아니냐?
실비아랑 쓰레온한테 당한 게 그렇게 무서웠어? 뭐, 나라도 무서웠을 것 같지만.
"사람의 꿀 같은 식사 시간을 방해하다니.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들이로군."
아무튼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더욱 푹 눌러쓰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뭐 하는 놈들이지 얼굴이라도 좀 보자."
그리고 제일 앞에 있는 마차에 천천히 걸어가서는, 마부석에 앉아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놈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흠. 맥빠진 얼굴이로군. 뭐하는 놈이냐?"
"저, 저희, 저희는······."
이런 씹! 이 새끼 지금 오줌 싼 거야?! 더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밖에서 오줌 싸는 거 아니라고 엄마한테 못 배웠······아, 이런 세계니까 엄마도 없겠구나. 그래. 착한 내가 이해해주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인가? 흠. 나는 쓸모없는 놈은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데 말이지. 그런 녀석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존재가 없다고,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히이이익! 아, 아닙, 아닙니다! 마, 말! 저흰! 바프라님의······!"
"개새끼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라고 증명해내기 위해서, 놈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고 안 돌아가는 혀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어떤 놈이 맹렬한 살기와 함께 내게 달려들었다.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지 않고도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더러운 목소리. 바로 그 강간마였다.
저놈은 진짜 학습 능력이 없는 놈인가. 그렇게 깨지고도 또 덤벼드네.
지금까지 누구한테 져본 적이 별로 없어서, 오기가 하늘을 찌르는 건지도 모른다.
뭐, 그래 봤자 오기는 오기에 불과하지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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