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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04화 (988/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4화 >

조심스럽게 잠입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도 없을 정도로 배 안은 한산했다.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마 여기에 남아있는 놈들은 배를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 인원이겠지.

역시 내 생각대로 전부 도시 어딘가로 옮겨간 건가.

뭐,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 그리 놀랍지도 않지만.

정황상 여기 놈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했던 건 확실하니, 분명 사로잡힌 다른 여자들이나 레이도 같이 성문까지 데려갔을 거다.

그런데 거기까지 갔던 놈들이 그 많은 짐을 가지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까?

아니. 여기밖에 돌아올 곳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바프라의 직속 부대라는 놈들이 그건 아닐 거다.

분명 성문 근처 어딘가에 짐을 옮겨두고 숨어있겠지.

그래도 일단 간단한 확인 정도는 해야겠지만.

"실비아. 이쪽으로."

"네."

갑판 위에 있는 놈들의 눈을 피해 배 안으로 들어가자,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만이 우리를 반겨줬다.

야간 투시 스킬이 없었다면 바로 옆에 있는 실비아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정도로 어두운 복도.

그곳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실비아가 은근슬쩍 내 소매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우리 기사님이 어두운 게 무서워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아마 내가 보이지 않아서 떨어지지 않을 생각으로 잡은 거겠지.

아까 쓰레온을 혼자 보냈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역시 실비아는 내가 자기 눈에 안 닿는 곳에 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내 생각을 알아주고 자기도 쓰레온과 같이 저택에 가겠다고 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곁에 붙어있었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내가 잠입하다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고 해도, 온종일 그 마음고생을 했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지.

진짜 레이 그 녀석만 구해내고 나면 온종일 실비아랑 껴안고 있어줘야지.

"손잡고 가자."

"네에······."

소매를 잡고 있던 실비아의 손을 풀고 내가 아예 깍지까지 껴서 그 손을 잡아주자, 실비아는 부끄럽다는 듯 내게 잡힌 손을 살짝 꼼지락거렸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 만큼 평소처럼 바들바들 떨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미약하게나마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부터가 실비아가 평소보다 마음이 조금 약해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서로 손을 잡고, 우리는 새까만 어둠을 헤치며 복도를 나아갔다.

목적지는 물론 제일 처음 배에 잠입했을 때 들어갔던 그 여자들을 모아뒀던 방과, 레이와 헬레나를 구해냈던 그 두 놈의 방이다.

야간 투시 스킬 덕분에 길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고, 이미 배의 내부 구조가 완성되어있는 맵 기능 덕분에 우리는 이런 어둠 속에서도 별 어려움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두 곳 다 텅텅 비어있었다.

뭐, 애초에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놈들의 행동이 내 예상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여기 없다면 분명 도시 어딘가에 있다는 얘기니까.

그렇다면 조금 더 서둘러야겠는데.

놈들이 성문 근처에서 빠져나갈 틈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이미 성문을 막던 실비아와 쓰레온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다.

그대로 레이를 데리고 도시를 벗어나 버리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었다.

"가자. 실비아."

"넵!"

이제는 아예 갑판 위에서 술주정을 부리고 있는 선원들을 지나, 우리는 황급히 파란의 저택으로 향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문에서의 소동으로 경비병을 여기까지 돌릴 여유는 없는지, 저택까지 가는 길은 한산했다.

다만, 저택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커다란 철문 너머로 힐끔 보이는 넓은 정원에, 상당히 많은 수의 마차가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저 마차에 그러진 저 문양은······.

"오셨군요! 이쪽으로 와주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정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 중 하나가 우리를 알아보고는 황급히 다가왔다.

한발 앞서 온 쓰레온에게 얘기를 들어서 우리가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가와서 우리를 안내하는 경비병이 향하는 방향은, 어째선지 저택 쪽이 아니라 정원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보아하니 정원을 관리할 때 쓰는 도구들을 넣어두는 창고인 모양이었지만······.

"왜 여기로?"

"지금 바프라님의 명령을 받고 왔다는 자들이 저택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 계신 기사님께서는 얼굴이 너무 알려지셨으니, 지금 가면 문제가 일어날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여기에서 기다려주십시오."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실비아를 바라보면서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된 것을 제발 화내지 말아 달라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가듯 사라는 경비병. 그런 경비병의 모습에서 나는 살짝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서 이 저택을 지키는 경비병이 실비아를 두려워하는 거지? 도시를 지키는 경비병이라면 모를까, 소속도 전혀 다를······잠깐만. 설마.

"실비아. 잠깐만, 아니. 으음······."

한가지 가능성이 떠오른 나는 당장 가서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이곳에 실비아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잠깐 망설이게 됐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실비아는 그런 날 이해해준다는 듯, 굳은 의지가 담긴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실비아······."

"아으······."

내가 그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 풀려버렸지만.

진짜 다 끝나면 온종일 가지고 놀······같이 있어줘야지.

"진짜 잠깐만 기다려. 다녀올게."

이마에 이어서 말랑말랑한 뺨에도 키스를 해주고, 나는 그림자 이동과 은신을 이용해 저택으로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저택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정원에 있는 마차 근처에 가까이 간 것만으로도 나는 원하던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바프라 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비밀 임무라고 했잖아! 말이 안 통하는 늙은이가! 눈구멍이 뚫려있으면 이 패가 보일 거 아냐!? 이 패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말조심하지 못할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으으윽······!"

헬레나를 범했던 그 강간마가, 파란에게 길길이 성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놈도 파란에게 진심으로 덤빌 수는 없었는지, 파란이 근엄한 표정으로 일갈하자 이를 갈며 노려보기만 했다.

역시 파란은······.

"모든 조사를 거치고 증명된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도시 밖을 빠져나갈 수 없다!"

내 예상대로, 파란이 바로 이 도시의 영주 같은 놈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후에 있을 거라는 비밀 모임. 표면적 이유는 ‘전쟁 지역으로의 군수품 보급에 관한 회의’라고 했었지.

생각해보니 이런 대도시의 영주쯤 되지 않으면 그런 회의를 할 리가 없는데.

어쩐지 처음에 마차를 얻어 타고 들어올 때 너무 쉽게 통과된다 했어.

신과 유리가 했던 "비밀 클럽에 엄청난 고위직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다."라는 말만 듣고 당연히 파란이 그 정도 급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게 오판이었다.

이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이었잖아? 저런 놈이 엄청난 고위직이 아니면, 대체 신과 유리가 말했던 엄청난 고위직은 어느 정도 거물이라는 거야.

아무튼 파란이 정말로 프리움의 영주라면,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실비아랑 쓰레온이 신나게 때려 부순 경비병들이, 전부 파란의 휘하에 있는 놈들이라는 문제점이.

"그러니까 이 패가 그 증명이라고 했잖아!"

"그 패로 네놈들의 신분은 증명됐을지 몰라도, 마차의 내용물까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다면 마차에 실은 내용물을 전부 내 눈앞에 보여 성문에 있는 그놈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여라."

"그, 그러니까 이건 바프라 님께서 맡기신 비밀 임무를 위한 물품이라고 하잖아! 아무리 영주라도 바프라 님 직속 부대의 비밀 임무를 파헤쳐 볼 권리는······!"

"당황하는 게 수상하군."

"이런 미······!"

그나마 저 녀석의 앞길을 저렇게 틀어막고 있는 걸 보면, 우리와 손을 뗄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젠장. 대화를 좀 해봐야 상황이 정리될 것 같은데.

"야! 움직일 수 있는 놈들 다 나와봐! 자! 보면 알잖아! 저 상처! 저 새끼들의 다 죽어가는 표정?! 이런 데 우리가 그 미친놈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숨을 씩씩 몰아쉬던 놈은, 이제는 아예 자기 부하들을 늘어 세워놓고 굴욕적인 표정으로 그런 말까지 했다.

사실 부하들을 늘어세울 필요도 없이, 강간마놈 본인도 실비아와 쓰레온한테 제대로 얻어터졌는지 만신창이 상태였지만.

뭐, 그러니까 아까 그렇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겠지.

"그리고 놈들은 이미 도시 밖으로 갔다고······!"

"그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당했으면 네놈도 그놈들의 실력을 잘 알겠지. 경비병의 눈을 속이고 다시 도시로 잠입해 들어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리고 그 은신처는 네놈들의 마차 안일지도 모를 일이지."

"그 새끼들이 뭐 하러 그런 짓을 한다는 거야!"

"그걸 모르니까 조사한다고 하는 거다! 그러면 네놈은 그놈들이 무슨 생각으로 하루 동안 성문을 막아섰는지 안다는 것이냐?!"

"으아오오오!"

한 대 때리고 싶다는 듯 주먹을 쥐락펴락하는 강간마였지만,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이라도 영주에게 덤벼들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자기 가슴을 퍽퍽 쳐대는 놈을, 파란은 의연한 눈으로 바라만 봤다.

이래서는 끝이 안 나겠군. 그렇다면 그사이에······.

아직 상황이 완전히 파악된 건 아니었지만, 모처럼 파란이 이놈들을 붙잡아두고 있는 거다.

게다가 강간마의 명령으로 마차 안에 있던 부하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있기까지 하니, 마차를 확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찬스는 없겠지.

나는 자신의 은신 능력을 믿고, 마차를 하나하나 조사해보기로 했다.

우선 제일 처음 목표는, 바로 중앙에 있는 가장 호화로운 마차로 할까.

사실 이런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놈들은 저런 마차에 오히려 아무것도 싣지 않는 속임수를 쓰기도 하지만, 나는 파란을 상대하는 놈이 강간마라는 점에 주목했다.

누가 봐도 저 강간마보다는 같이 다니던 그 진지남이 더 두뇌파 같았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진지남 대신 강간마가 저기서 저러고 있다는 건, 진지남이 지금 그럴 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성문에서의 전투에서 죽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의식 불명의 상태일 수도 있지.

그렇다면 저 강간마가 모든 지휘를 맡게 된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놈이 제일 호화로운 마차를 비워두는 속임수를 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레이는 그 제일 호화로운 마차 안에 있었다.

그래도 저게 제일 전투용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에 입고 있던 그 암살자 코스프레 복장으로.

"야. 레이. 일어나. 야."

마차 안에 누워서 축 늘어져 있는 레이의 뺨을 두드리며 깨우려고 해봤지만, 레이는 속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좀 이상한데?

등에 손을 받치고 그 몸을 들어올려도, 레이는 축 늘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코에 손가락을 하나 가져다 대보니 미약하게나마 숨은 쉬고 있었지만, 너무 미약해서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거기까지 확인하고 나니, 나는 하나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나무통에 죽은 듯이 담겨있던 여자들의 모습 말이다.

젠장. 그때 그 이상한 약, 여분이 더 있었던 건가.

이전에 놈들과 싸울 때 해독약을 얻어두기는 했지만, 그때 얻은 해독약은 우리 몸의 약기운을 없애기 위해 전부 써버리고 말았다.

여기에 있는 마차들을 전부 뒤져보면 또 해독약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아니.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금 당장 레이를 깨운다고 해서 놈들에게 들키지 않게 마차 밖으로 빼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렇다면······.

잠깐 고민한 끝에, 나는 마차를 빠져나가서 그대로 저택 안으로 잠입했다.

목적은 바로 쓰레온을 찾는 것.

사실 애써 찾을 필요도 없었다. 쓰레온은 자기가 머물렀던 그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헬레나랑 얼싸안고.

"레온님······전, 전······."

"괜찮아. 너만큼은 내가 반드시 지켜주겠어."

아주 그냥 놀고 있네. 누가 보면 뭐 영화 찍는 줄 알겠다?

헬레나 쟤는 강간마한테 당한 게 있으니까 저렇게 무서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쓰레온 저놈은 대체 뭘 안다고 표정 다잡고 멋진 척하고 있는 거야?

참고로 말하자면 쓰레온이 표정을 다잡고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저 놈 얼굴에 개성이 없어서 저게 멋있는 척하고 있는 표정인지 확신이 안 서잖아.

"야."

"누구······!"

그래도 헬레나한테 한 말이 진심이기는 했는지, 내가 부르자마자 쓰레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빼 들었다.

그래. 좋아. 그렇게나 전의가 넘쳐흐르면, 지금부터 할 일도 잘할 수 있겠지.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4화 > 끝

ⓒ CurtainCall#o8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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