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01화 (985/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1화 >

    여기 넬슨강 최대의 항구 도시 프리움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성문이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를 빙 두르고 있는 높고 두꺼운 성벽에, 성문이 단 하나.

    대신 성문 자체의 크기가 엄청나서 한 번에 오갈 수 있는 인원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이 도시의 통행객들을 수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듣자 하니 저 넓은 항구 쪽에 경비를 집중해야 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성문에 보낼 수 있는 경비 수가 부족해져서 궁여지책으로 저렇게 성문을 하나만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뭐,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기는 하다.

    일반인도 기본적으로 전투직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곳이니, 이런 곳의 경비원이 되려면 아무리 말단이라도 일정 이상의 실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경비원의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는데, 그 한정된 인원을 항구에 최우선으로 배치하려고 하면 저런 수밖에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언제 전쟁에 휩쓸릴지 모르는 세계에서 성문의 경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으니까.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전성을 높이는 게 제일이라는 생각이었겠지.

    아무튼 그런 사정이 있다 보니 이곳 프리움의 성문으로 이어지는 대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긴 행렬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도 밖에서 긴 행렬이 늘어져 있는 걸 봤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오늘도 분명 긴 행렬이 보여야 정상일 텐데, 대로에 들어선 지금도 어째서인지 성 밖으로 나가려는 무리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도시 전체가 어수선하게 요동치는 느낌이 왠지 모르게 느껴졌다.

    어제 등대 쪽에서 힐끔 봤을 때도 분명 엄청난 인원이 성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 보였는데, 하루 만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역시 사라가 봤다는 성문 쪽의 일과 관계가 있는 걸까?

    성문으로 달리면 달릴수록 궁금증을 더욱 커지고,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생각 같아서는 그림자 이동으로 순식간에 가고 싶었지만, 조금 남은 마나는 만약을 대비해서 남겨놓는 게 좋겠지.

    괜히 이동하느라 기력이 다 빠지고 정작 중요할 때 아무것도 못 하거나, 아예 마나가 부족해서 기절해버리면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마나가 부족해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나는 황급히 성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워, 원하는 게 뭐냐?! 용건을 밝혀라!"

    성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드디어 인파가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그 인파는 성을 나가기 위한 행렬이 아니었다.

    성문을 반원형으로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의 무리였다.

    그리고 그 제일 앞에서, 대장처럼 보이는 자가 성문을 향해 그런 말을 외치고 있었다.

    자기 딴에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명백하게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용건을 밝히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원 이 자리에서 사살해주겠다!"

    대장은 계속해서 이어서 그런 말까지 외쳤지만, 주변 병사들은 그런 대장의 말에 전혀 동조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게 하나같이 전부 허리를 뒤로 빼고서, 병사들은 저 대장이 드디어 미쳤냐는 표정으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군거리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괴, 괴물이다······." "저런 놈들을 무슨 수로 죽인다는 거야······." 같은 말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에에잇! 다들 조용히 하지 못할까! 수많은 침공에도 무너지지 않은 영광스러운 프리움의 병사들이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사기가 완전히 꺾여서 패배 의식이 만연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일갈하는 대장이었지만, 그 대장이 타고 있는 말까지도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면서 성문에서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이익! 궁수대 활을 들어라! 모두 발사!"

    이런 놈들을 돌격시키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대장은 이번엔 고지를 점하고 있는 궁수대에 명령을 내렸지만, 그 우렁찬 명령에도 불구하고 성문으로 날아가는 화살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내 명령이 들리지 않는 거냐! 발사하라고 했다! 쏴라! 쏘지 않으면 네놈들부터 내가 친히······ !"

    "우, 우와아아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위협이었지만, 이런 긴장 상태에서는 그런 위협마저도 통하는 놈이 있었던 모양이다.

    궁수대에 풋내기 병사라도 하나 있었던 건지, 기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함성과 함께 누군가가 화살을 하나 성문 쪽으로 날렸다.

    그리고 그 행동에 용기를 얻은 건지 다른 궁수들도 천천히 화살을 활에 걸고 시위를 당겼지만, 화살을 쏘기 전에 전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퍼석!

    마치 무거운 바위에 부딪혀 박살 난 것처럼, 제일 처음 활을 날렸던 병사의 머리가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광경만 보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병사의 머리를 폭발시킨 건 바위가 아니라 고작 화살 하나였다. 아마, 그 병사 자신이 방금 날렸던 바로 그 화살이겠지.

    대체 화살에 얼마만큼의 힘이 담겨있으면 저런 게 가능한 걸까?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사라의 말도 안 되는 마나 화살로 저것보다 더한 광경도 많이 보고 익숙해져 있었지만, 여기 있는 다른 병사들은 그렇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히, 이이익!"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건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중간에 황급히 이를 악물고 화난 척을 했지만, 대장이 짧게 흘린 비명은 모두의 귀에 똑똑히 전달되어 버렸다.

    더욱더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그저 손에 쥔 무기를 성문 쪽으로 향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리만 겨우 지키고 있게 되었다.

    거기까지 보고 나서, 나는 성문의 모습을 직접 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런 게 가능한 사람이 그리 많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대로 상황을 확인하지 않으면.

    그림자 이동을 더 쓰기에는 남은 마나가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궁수대 일부가 자리 잡고 있는 높은 첨탑의 지붕 위로 올라가서 성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는 역시나 실비아의 모습이 있었다.

    두 손으로 쥔 검 끝을 땅으로 향한 채 세우고는, 실비아는 정문의 한가운데에 꽂꽂히 서서 모든 이들의 가로막고 있었다.

    옆에 쓰레온도 어설프게 살기를 내뿜으며 서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외모가 외모다 보니 많은 이들의 주목은 실비아에게 몰려있었다.

    다 좋은데 쓰레온 저건 왜 옷차림이 저 모양이야? 마치 다 벗고 있다가 황급히 옷만 대충 걸쳐 입고 나온 것 같은 모습이잖아.

    아무튼 이미 한 차례, 아니.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는지, 성문 근처를 둘러싼 병사들이 만들어낸 반원형 공터에는 수많은 사람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몇몇 꿈틀거리는 놈들이 있는 걸 보면 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그, 크흠! 그러니까! 거기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우리도 너희의 용건이 뭔지 알 수가 없지 않나! 일단 그러고 있는 이유라도 뭔지······."

    이 이상 병사를 다그쳐봐야 절대로 전진시킬 수 없을 거다.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나서서 병사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에게 적의를 보이고 살아남을 자신은 없으니, 일단 대화로 풀어 보자.

    그런 속셈이 뻔히 보이는 말투로 운을 떼며 뒷걸음치는 말을 애써 앞으로 움직여 성문 쪽으로 다가가려 했던 대장이었지만, 놈에게는 아쉽게도 지금의 실비아는 대화가 통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친 실비아는, 손에 쥔 검을 살짝 들었다가 땅으로 강하게 내리찍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가져다준 여파는 엄청났다.

    반경 100미터 정도의 바닥이 파도라도 치는 것처럼 크게 들썩이면서, 주변에 있던 모든 병사가 바닥에 주저앉게 되어버린 거다.

    물론 말을 타고 있던 대장도 말에서 떨어져서 볼품 사납게 바닥을 구르게 됐다.

    과연. 쟤들이 100미터 정도 떨어져서 둘러싸고 있는 게 괜히 그러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다가오는 놈은······ 전부 죽인다."

    멀리 있는 나한테까지 느껴질 정도 찌릿한 살기를 전방위적으로 흩뿌리면서, 실비아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선언했다.

    쟤 진짜 실비아 맞아? 엄청나게 무서운데요.

    옆에 있는 쓰레온이 저런 표정으로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무튼 거기까지 보고 나니, 나는 상황이 대충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도시의 출입구는 배를 타고 항구를 통하는 것이 아니면 저 성문 하나뿐이다.

    그리고 내가 정탐을 갔던 배의 목적은 여기서 내려 육로로 바프라에게 물건을 배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성문만 지키고 있으면, 내게 위해를 가한 놈들이 도시를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실비아는 쓰레온을 끌고 와서 성문을 아예 틀어막아 버린 거다.

    아마 지금쯤 그렉이나 듀크는 날 찾기 위해서 항구에 정박해있는 배를 조사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과격한 것도 정도가 있지.

    고작 둘이서 저 넓은 성문을 틀어막을 생각을 하다니. 무슨 장판파의 장비도 아니고.

    아니. 장판파의 장비는 그래도 책략을 써서 허세를 부린 게 통한 거였지, 쟤들은 진짜로 싸우면서 틀어막은 거잖아.

    강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였어?

    아무튼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았으니, 앞으로는 어떻게 수습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전투 중에 벗겨졌는지 실비아도 쓰레온도 후드가 벗겨져서 얼굴을 드러낸 상황.

    이걸 수습하면서도 앞으로의 계획에 최대한 지장이 없게 하려면······.

    순식간에 생각을 마친 나는, 다시 한번 그림자 이동을 써서 병사들이 만들어낸 반원형 공터로 이동했다.

    "그렇게 말했는데도 아직 죽고 싶은 놈이······."

    그리고 내가 공터에서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한 인영이 엄청난 스피드로 쇄도하며 내 목에 검을 들이다 댔다.

    하지만 그 검이 그대로 내 목을 베는 일은 없었다.

    앞으로 1밀리만 더 검이 들어오면 그대로 내 목이 날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뒤에서 마찬가지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실비아가 내게 달려든 인영, 쓰레온의 뒤통수를 후려갈겼기 때문이다.

    "으악! 뭐 하는 거야!"

    "구, 구······."

    예상외의 기습을 당한 쓰레온은 뒤통수를 부여잡고 항의했지만, 실비아는 그런 쓰레온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커다란 눈은 오로지 나만을 주목한 채,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젠장. 가까이서 보니까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잖아. 이 예쁜 얼굴까지 완전히 피범벅이 되어서는······.

    실비아에게 말도 하지 않고 장거리 그림자 이동을 시도한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다시 한번 자책하고 싶어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실비아의 그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 걸 보고, 나는 황급히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내가 준 과제는 완수한 모양이구나."

    "그게 무슨 개······ 아야!"

    "흐읍······ 네!"

    아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

    눈치 없는 쓰레온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실비아는 그런 쓰레온의 뒤통수를 다시 한번 후려갈기고는 순식간에 내게 말을 맞춰줬다.

    그래. 이게 바로 오랜 인연의 힘이라는 거지.

    "이런 대도시의 병력이 전부 덤벼들어도 너희 상대가 되지 않는다니. 산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에 이곳도 상당히 수준이 떨어져 버린 모양이야. 이게 전쟁 신 님을 섬긴다는 놈들의 실력이라니. 쯧쯧."

    그렇게 병사들을 힐끔 쳐다보고 혀를 차는 것으로 남에게 들려주기 위해 대화를 마치고, 나는 실비아와 쓰레온을 지나쳐 성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가자. 여기에는 더 볼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넵!"

    우리가 그렇게 유유히 걸어가는 동안, 그 누구도 우리를 제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완전히 등을 내주고 있는데도 화살 한 발 쏠 생각을 못 하다니. 대체 얼마나 겁먹은 거야?

    그야 실비아의 몸에 묻은 피나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의 산만 보더라도 큰 전투가 한 번 있었다는 건 알겠······ 어? 잠깐만. 저기 쓰러져 있는 두 놈. 저거 배에서 봤던 그 쓰레기들 아니야? 쟤들도 괜히 덤비다 죽은 건가?

    "으으윽······."

    그냥 가다가 발에 걸린 척하면서 두 쓰레기 중 한 놈을 발로 퍽 차보니, 명줄 질기게도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미약하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두 놈을 확인하고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두 놈뿐만 아니라 배에서 봤던 형식의 갑옷을 입고 있는 놈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이거 빨리 제대로 된 사정을 들어봐야겠는걸.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0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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