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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96화 (98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6화 >

    "어두워졌네. 그러면 너희 둘은 이만 가봐."

    결국 레이 때문에 실비아와는 끝까지 제대로 된 데이트 기분도 내지 못했고, 그렇게 도시 안을 적당히 돌아다니는 사이에 하늘은 어둑어둑해지고 말았다.

    즉, 내 시간이 찾아왔다는 얘기다.

    도시가 너무 넓어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어도 맵을 전부 메우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만 돼도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애초에 이번에는 내가 배 안에 잠입해야 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배 밖으로 나와야 하는 거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런 어두운 밤에, 월영무사의 효과를 최대로 받는 내가 들킬 리가 없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맵을 채운 것도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보험을 들어놓은 것뿐이다.

    "정말로 혼자······."

    "네. 조심하십시오."

    레이는 역시 나 혼자 보내는 게 불안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우리 실비아는 달랐다.

    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실비아는 날 배웅해줬다.

    "뭐?! 당신······!"

    레이는 그런 대답에 깜짝 놀라서 실비아를 바라봤고, 나는 그사이에 그림자 이동과 은신을 써서 어둠 속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레이가 귀찮게 붙잡고 늘어질 것 같아서 말이야.

    저 녀석, 헬레나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그런지 묘하게 나한테 달라붙는단 말이지.

    실은 낮에 옷을 고를 때도 일일이 내 의견을 물어봐서, 마치 남자친구한테 옷을 골라 달라고 하는 여자처럼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자기 말로는 "여자가 남자 허락도 안 받고 자기 옷을 사면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 테니까 일일이 물어본 거야."라고 말했지만, 보통 그런 연기를 할 거면 좀 더 말투를 공손하게 하잖아?

    게다가 몇 없는 여성 의류 중에서도 눈에 띄게 화려한 것만 고르려고 하고.

    여기저기 노출이 심한 암살자 코스프레도 그렇고, 역시 기본적으로 취향이 그런 쪽인 걸지도 모른다.

    뭐, 결국 눈에 안 띄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이유로, 수수한 남자 옷만 잔뜩 골라줬지만.

    아무튼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몸을 감춘 나는, 일단 숨어서 둘이 뭐라고 하는지 조금 더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아니. 귀찮아서 빨리 숨어버리기는 했는데, 사실 아직 배가 항구로 들어온 것도 아니라 당장 할 일은 없었거든.

    "당신, 그러고도 호위 기사야? 호위 기사면 호위 기사답게······."

    "구원 님은 그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레이는 주제넘게도 실비아를 설교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우리 기사님한테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실비아가 맨날 내 곁에서 흐물흐물거려서 그렇지, 내 근처만 아니면 저렇게 똑 부러지는 애라고! 뭐, 표정은 맹하지만.

    "약하지 않은 건 알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전에도······!"

    "이전에도 위기에 처한 건 당신뿐이고, 구원 님은 아무런 위기도 없이 당신을 구출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으윽!"

    오오! 역시 실비아야! 처음 만났을 때 펠리시아의 명으로 날 체포하러 왔을 때가 생각나게 하는군.

    그때는 무표정한 기사님이라는 이미지여서, 실비아가 이렇게나 귀여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지, 지금 바로?"

    내가 살짝 추억에 젖어있는 사이에, 실비아는 레이의 등을 떠밀며 저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밤이 되면 배가 들어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늦습니다. 아무리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당신을 찾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구원 님도 그렇기 때문에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저희를 보내려고 하신 겁니다."

    레이는 아직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듯 버텼지만, 실비아는 귀찮다는 듯 그렇게 내뱉으며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레이를 밀면서 걸어갔다.

    "하지, 알았어! 알았으니까 밀지 마!"

    저 귀찮은 녀석을 저렇게나 간단히 제압하다니.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실비아에 대한 대견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좋아. 앞으로도 레이 쟤가 귀찮을 것 같으면 전부 실비아한테 맡겨버려야지.

    그렇게 둘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 나는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 등대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비스듬한 등대의 지붕에 등을 기대고 누워서, 배가 항구에 들어오기를 수 분. 그 수 분 만에, 나는 참을성 없게도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귀여운 실비아와 그래도 미관상 보기는 좋은 레이에게 둘러싸여 시끌벅적하게 다녔는데, 갑자기 혼자서 이렇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상대적으로 더 심심하게 느껴져서 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니, 그 배가 꼭 오늘 밤에 들어올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정황상 오늘 밤에 들어올 거라는 추측만 있을 뿐.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따분한 것도 없어서, 나는 배로 죽을 맛이었다.

    어쩌지? 진짜 배로 잠입해볼까?

    전에는 방에 잠입하기도 전에 그 두 놈한테 들켰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때는 레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게 은신에까지 영향을 주기도 했을 거고, 단검으로 벽에 구멍을 뚫으려고 등이 환하게 밝혀진 복도로 내려와서 그림자 은신의 효과가 풀리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면 분명 잠입해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듣고 와도 아무 문제도 없을 거다.

    아······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배가 멈춰 서있는 곳으로 다가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도 되는 걸 굳이 몸이 젖어가면서 수영해 가는 것도 왠지 싫었다. 이렇게 등을 기대고 팔베개까지 한 채로 편하게 누워있어서 그런지 괜히 더.

    하지만 수영해서 가기 싫으면 그림자 이동으로 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또 눈에 보이지 않으면 갈 수 없단 말이지.

    야간 투시 스킬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스킬 레벨이 많이 낮아서 그런지 저 멀리 멈춰서 있을 배의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원래 이렇게 심심할 때는 휴대용 게임기라도 꺼내서 하고 있으면 딱인데.

    오랜만에 원래 세계가 그리워지네. 이 세계에 와서는 우리 애들 때문에 딱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아,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애들한테 연락이라도 할까.

    힐링 섹스로 마나 회복은 하고 있지 않지만, 어차피 여기에선 누가 들을 걱정도 없으니 바람의 정령을 쓸 필요도 없고.

    "구원!"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자, 오늘도 사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 환영해줬다.

    "어? 사라가 받네?"

    "뭐야. 내가 받으면 안 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레이아가 받을 줄 알았거든."

    그제가 사라였고 어제가 디아나였으니까, 당연히 오늘은 레이아의 목소리가 제일 처음 들릴 줄 알았는데.

    "아아. 레이아는 치사하게 어제 혼자 새치기하려고 했으니까."

    아니. 새치기라니. 그냥 너랑 디아나랑 둘이 싸우니까 레이아가 이어받은 것뿐이잖아.

    게다가 우리 천사 성녀님은, 너희가 뒤에서 투닥대는 와중에도 " 저희가 웃는 얼굴로 구원 씨를 맞이할게요."라면서 천사력을 뿜뿜 내뿜으셨다고.

    그런데도 사라한테 차례를 양보하시다니, 하여간 천사님은 너무 착해서 손해 보는 타입이라니까.

    "그런데 오늘은 조금 빨리 연락했네? 무슨 일 있었어?"

    사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애들을 부르러 가려는 건지, 문을 열고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냥 등대 위에서 가만히 배나 기다리고 있으려니 심심해서."

    "등대? 무슨 등대?"

    당연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사라는 어째서인지 이상한 걸 물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평범하게 뚜벅뚜벅 걷던 발소리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아니. 무슨 등대냐니······ 그냥 평범한 등대인데.

    "그러니까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말해 봐."

    게다가 당혹해하는 내게 그런 말까지.

    내가 더듬더듬 우리가 지나왔던 길을 말하며 지금 넬슨강이라는 강에서 가장 큰 항구에 있는 도시의 등대 위에 있다고 설명하자, 사라는 더욱더 알 수 없는 요구를 해왔다.

    "으응······ 혹시 뭔가 불빛 같은 거라도 반짝여줄 수 있어?"

    "응? 이렇게?"

    그야 인벤토리에 랜턴도 있으니까 불빛을 반짝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지만, 대체 뭐하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일단 사라가 시키는 대로 랜턴을 꺼내서 흔들어봤다.

    그리고 그 직후, 믿을 수 없는 말이 사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보였다. 저기였구나. 하아······ 하지만 역시 얼굴까지는 제대로 안 보이네. 오랜만에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아니. 보였다니. 잠깐만.

    "내가 있는 데가 보였다고?!"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눈이 좋은 건 구원도 알잖아."

    그야 용사라는 사기 직업에 더해서 궁사와 사냥꾼까지 겸하고 있는 사라다. 게다가 모험가라는 직업 역시 오감에 미약하게나마 보정을 걸어주지.

    그렇다 보니 사라는 직업 특성이 엄청나게 겹쳐져서 오감이, 특히 눈이 엄청나게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멀리 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찌푸리고 집중해서 보니, 햇빛 하나 없이 깜깜한 이곳과 달리 하늘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반대편 대륙은 지금이 낮인지 희미하게 푸른 빛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이런 구조였지.

    간단하게 생각해서 지구 공동설을 떠올리면 된다.

    지구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땅도 바깥 세계와 달리 오목한 구조였고, 당연히 지평선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땅이 둥글게 말려 올라가며 시야가 닿는 끝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있는 모습이 보일 뿐.

    그렇다 보니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라처럼 눈이 말도 안 되게 좋으면 내가 있는 등대의 불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는 건가.

    특히 구미호가 있는 산은 유난히 높게 우뚝 솟아있는 산이니, 그 정상에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확인하면 더욱 보기 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까의 그 서두르는 발소리는 빨리 정상에 올라가려고 그랬던 건가.

    하지만 아무리 시력에 자신이 있고 이 세계가 이런 구조라고 해도 그렇지, 진짜로 여기를 볼 생각을 하다니.

    게다가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인다고 아쉬워하는 걸 보면, 사라는 내 얼굴까지 볼 생각이었다는 거잖아. 하여간 대단하신 용사님이라니까.

    나도 일단 구미호가 있는 산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봤지만, 역시나 내 눈에는 너무 멀어서 우뚝 솟은 산의 그림자만 희미하게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저기 보이는 그림자가 구미호들이 사는 그 산이라고 알 수 있는 것도, 맵 덕분에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라 너도 뭔가 빛나는 걸 흔들어볼래?"

    "응. 지금 해볼게. 보여?"

    하지만 그래도 미련을 버리기는 힘들어서, 나는 사라에게도 똑같은 부탁을 했다.

    그러자 사라도 미리 준비해왔는지, 바로 대답과 함께 빛나는 뭔가를 들어 올린 모양이었다.

    으음······ 아, 혹시 저건가? 저기 있는 산에서 희미하게 빛이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한데.

    사라가 내 쪽을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희미하게 빛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빛이 정말로 흔들리고 있는지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저기에 지금 사라가 있는 것을.

    젠장.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저기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만나지 못하다니.

    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가서 사라를 끌어안고······ 어? 어? 잠깐만.

    "역시 구원은 안 보여? 그러면 난 이제 다른 사람을 부르러······."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봐 사라야! 거기서 가만히 계속 불빛 들고 있어 봐!"

    "으, 응? 이렇게?"

    아쉽게도 반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원래라면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다들 모아서 알뜰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좋겠지만, 나는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획기적인 아이디어에 사라를 멈춰 세우고는 황급히 스킬 창을 열었다.

    그림자 이동······ 그림자 이동이 어디에 있더라······ 여기 있다!

    나는 스킬 창에서 황급히 그림자 이동을 찾은 후, 그 스킬 설명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봤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기억했던 대로, 그림자 이동의 스킬 범위는 시야가 닿는 그림자까지 라고 정확히 명시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희미하게 불빛이 흔들리고 있는 저 산의 어두운 부분에 시선을 맞추고 그림자 이동을 쓰면······.

    "으으윽?!"

    스킬을 발동한 순간, 나는 격하게 몰려오는 구토감과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6화 > 끝

    ⓒ CurtainCall#o8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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