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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95화 (97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5화 >

    긴장과 각오가 동시에 엿보이는 레이의 얼굴을 보고, 나는 도저히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따라올 생각하지 마라."

    "내가 방해라는 거야?!"

    역시 따라올 생각이었냐.

    당연히 방해지. 그럼 방해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건지, 오히려 내가 더 놀라고 싶다.

    "그러니까 몇 번을 말하냐. 너 은신 엄청 못 한다고. 이 코스프레녀야."

    "누, 누가 코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숨으면 너도······!"

    레이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지만, 결국 어떠한 항변도 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마 어젯밤 자신의 잠입을 내가 눈치 못 챈 걸 지적하고 싶었겠지만, 그걸 대놓고 말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 말이야.

    뭐, 말한다고 해도 애초에 내가 눈치 못 챘다는 것 자체가 이 녀석만의 착각이지만.

    "나도 뭐? 설마 나도 눈치 못 챌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밉살맞게도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레이를 놀려줬다.

    "······."

    "너무 그렇게 빤히 바라보지 마라. 하여간 잘생긴 건 알아가지고."

    "너, 자기 얼굴에 엄청 자신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잘생기진 않았어."

    노, 농담으로 한 말이었거든?! 정색하고 진지한 말투로 받아치지 말아 줄래?!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충고가 필요할 것 같다는 표정으로 말하니까 더 열 받잖아!

    애초에 지금 이 얼굴은 약자 태세를 쓰고 있어서 그런 거야! 내가 진짜 약자 태세만 풀었으면! 아오! 말을 말자. 말을!

    "그야 같이 자란 형제가 그런 얼굴이면 자신감은 많이 붙겠지만······."

    누가 누구랑 형제라는 거야?! 젠장! 이런 굴욕을 당하다니! 괜히 나까지 플리투스라고 거짓말을 해놔서!

    그리고 자연스럽게 쓰레온을 디스하는 건 그만······ 아니. 생각해보니 그건 딱히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 응. 맘껏 해.

    "아, 아무튼 따라올 생각하지 마라!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얘랑 더 얘기하고 있으면 쓸데없이 더 상처만 받을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얘기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혼자 가면 들켰을 때 위험하잖아."

    레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지만.

    야. 잘생기지도 않은 사람 붙잡고 왜 이렇게 질질 늘어지냐.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말로.

    "너 내가 그 둘한테서 너희를 구해준 건 제대로 기억하는 거지?"

    "그러니까 들키면 위험하다는 거잖아. 네 암습 실력은 인정하지만."

    아니. 암습이라니. 그게 어떻게 암습이야? 아예 걔들이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줬는데.

    이거 그때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어서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모양이네.

    "나 그때 정면으로 이겼다."

    "자기가 잘생긴 줄만 아는 게 아니라 자기 실력도 과대평가를······."

    "진짜거든?!"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데, 잘생긴 줄 아는 게 아니라 잘생긴 거야!

    "······."

    하지만 레이는 내 말을 전혀 믿지 못하겠는지, 날 지그시 보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아서 테이블로 잡아끌었다.

    갑자기 또 뭐 하는 거야?

    일단 뭘 하려는 건지 두고나 보자는 생각에 가만히 이끌려가 주자, 레이는 그대로 팔씨름 자세를 잡았다.

    그러니까 즉, 이렇게 말하는 거다. 센 척하고 싶으면 적어도 자기를 힘으로 이겨보기라도 하라고.

    오냐. 좋다 이것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고작 너한테 팔씨름도 못 이길까.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가볍게 레이의 팔을······ 가볍게······ 이건 또 팔 힘은 왜 이렇게 무식하게 세?! 구멍 숭숭 뚫린 암살자 코스프레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암살술은 안 익히고 힘만 길렀나?!

    그러고 보니 이건 아직도 내 옷을 입고 있네.

    얼굴이 되니까 저런 핏도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파란한테 옷 하나 달라고 하는 게 어떠냐? 돈도 많아서 달라고 하면 하나 구해줄 것 같은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끄으으윽······!"

    "풉."

    우, 웃어? 지금 비웃은 거야?!

    이게 진짜! 그래. 생각해보니까 지금 굳이 내가 약자 태세를 하고 있을 필요도 없잖아? 어차피 헬레나가 매료당하면 귀찮을 것 같아서 하고 있었던 거니까.

    하지만 얘는 레벨도 충분하고, 매력도······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생긴 걸 봐서는 충분할 테니까 딱히 약자 태세를 풀어도 문제없을 거다.

    "너 그정······ 으엣?!"

    나는 곧바로 약자 태세를 풀고, 웃으면서 뭔가를 말하려던 레이의 팔을 순식간에 넘겨버렸다.

    "이래도 아직 내가 약해 보이냐?"

    "너, 너 그 얼굴······!"

    하지만 레이는 지금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듯,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얼음이 되어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어어어어엄청! 기분 좋았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나 잘생겼다니까?! 어때?! 이제 인정하겠지?!

    아, 물론 내 얼굴을 보여주려고 약자 태세를 푼 건 아니지만. 얘가 자꾸 사람 얼굴을 무시해서 홧김에 보여줄 생각 따위 절대 없었어. 정말이라니까?

    "크크큭. 원래 주인공은 힘을 숨기는······."

    아, 이 이상은 위험한가?

    아무튼 레이의 벙찐 표정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너무 상쾌해져서, 나는 다시 약자 태세를 쓰고 레이의 손을 놔줬다.

    "알았으면 괜한 걱정 하지 말고 좀 가라. 애초에 넌 여기 왜 온 거야?"

    그렇게 고생해서 찾은 자기 친구는 어디다 두고.

    참고로 말하자면 난 실비아를 두고 혼자 있는 게 아니다.

    실비아는 저기. 우리가 지금 있는 발코니 바로 밑에 보이는 마당에서 덤벼들어 오는 기사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는 중이었다.

    은사모니 뭐니 하는 비밀 클럽의 본거지라고 하더라도, 여기 놈들은 기본적으로 싸우길 좋아하는 전쟁 신의 추종자들이니까 말이야.

    우리가 용사 일행이라는 걸 알게 되니 다들 우리 실력을 보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실비아가 대표로 여기 기사들을 상대하며 실력을 보여주는 중이라는 얘기다.

    어차피 여기 놈들이랑은 오래 보고 지내야 할 것 같은데, 미리 실력으로 찍어눌러 주면 좋잖아? 힘의 논리를 숭상하는 놈들이니 저런 식으로 찍어누르는 게 효과적이기도 할 거고.

    "헬레나는······ 네 형이랑 같이 있어."

    아무튼 내 질문을 받은 레이는, 조금 불만 섞인 표정을 지으며 힘없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과연. 헬레나는 쓰레온이랑 같이 있는 건가. 어쩐지 둘 다 아침부터 안 보인다 싶었는데. 어제 그렇게 좋아한다 싶더니, 역시 그 녀석······. 아니. 그보다.

    "누가 누구 형이라는 거야."

    "그럼 동생이었어? 그 얼굴에?"

    또 화가 날 뻔했지만, 레이의 말을 듣고 보니 오해가 풀렸다.

    처음부터 말 좀 제대로 하지. 서운할뻔했잖아.

    쓰레온이 좀 많이 삭아 보이기는 하지.

    "애초에 형제가 아니야. 같은 플리투스라고 해서 꼭 형제일 필요는 없잖아."

    "그렇구나. 어쩐지."

    어쩐지라. 얘가 점점 말하는 게 마음에 드네.

    "심심하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옷이라도 갈아입으러 가지 그러냐?"

    아까와는 달리 조금 상냥해진 말투로, 나는 레이가 입고 있는 내 옷을 지적해줬다.

    "됐어. 난. 이걸로 충분해."

    아니. 이 아가씨야. 충분하고 자시고 그거 내 옷······ 뭐, 됐다. 내가 그거 하나 아까워서 못 줄 처지도 아니고.

    "그러냐."

    그 이상 좀 가라는 말을 하기도 뭐해서, 나는 그냥 얘기를 마치고 다시 발코니 아래에서 펼쳐지는 실비아 무쌍에 눈을 돌렸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제일 친한 친구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랑 붙어먹고 있으니, 얘도 갈 곳이 없는 거겠지.

    그렇다고 혼자 있기는 너무 적적하니 그나마 여기 사람 중 제일 대화를 많이 한 날 찾으러 온 것일 텐데, 그걸 또 계속 내쫓으려고 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잖아?

    "강하네."

    내가 더 내쫓을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레이도 슬그머니 내 옆쪽에 와서는 발코니 난간에 팔꿈치를 기댔다.

    "그래. 내 자랑스러운 호위 기사니까. 저 정도 수준은 되지 않으면 내 곁을 지킬 수 없지. 내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는지 잘 알겠지?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저 녀석이 있으면 충분해."

    사실은 쟤가 내 여자라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남장을 하고 있는 이상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기사라는 점을 강조해서 실비아를 자랑해줬다.

    덤으로 밤에 괜히 따라올 생각하지 말라는 주의도 덧붙여서.

    "딱히 걱정은······ 하지만 저 사람의 호위, 정말 믿을 수 있어?"

    하지만 그런 내 말에도 레이는 별로 납득이 안 된다는 듯,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 별로."

    자기가 먼저 말 꺼내놓고 그런 식으로 끊기냐.

    뭐, 아마 밤에 몰래 내 방에 들어왔을 때 호위라던 실비아가 없었던 걸 지적하고 싶은 거겠지만.

    네가 못 봤을 뿐, 실비아는 제대로 방에 있었다고. 그 누구보다도 나랑 밀착해서.

    "구원 님! 끝났습니다!"

    그 이후로도 얼마간 더 레이와 별 의미 없는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고 있자니, 그사이에 덤벼드는 기사를 모두 무릎 꿇렸는지 실비아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밝은 표정으로 내 쪽을 올려다봤다.

    내 옆에서 마찬가지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를 발견하고는, 그 밝은 미소가 살짝 굳어져 버렸지만.

    시, 실비아야? 설마 의심하는 거 아니지?

    "잘했어! 그럼 같이 근처 좀 둘러보고 올까?"

    실비아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나는 바로 난간을 뛰어넘어서 마당으로 착지했다.

    이왕이면 미리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맵을 완성시켜두는 것이, 밤에 활동하기도 더 편할 테니까 말이야.

    거기에 실비아하고 데이트하는 기분도 맛볼 수 있을 거고.

    물론 실비아는 남장 중인 데다가, 이런 세계에서 대놓고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데이트를 만끽하는 건 힘들······.

    "잠깐 기다려! 나도 갈래!"

    넌 또 왜 끼려는 건데?! 눈치가 좀 있어 봐라! 눈치가!

    아까는 불쌍히 여겨서 내쫓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지 않았냐고? 지금껏 놀아줬으면 난 충분히 할 만큼 했잖아!

    "놀러 가는 거 아니다."

    "나, 나도 놀러 가려는 거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네 말대로 갈아입을 옷 몇 벌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하지만 나 혼자 가면 목소리 때문에 여자란 걸 들키니까."

    젠자아앙! 갈아입으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저 옷 하나 그냥 가지라고 주면 될 걸 괜히 그런 말을 꺼내서!

    "그, 그러냐. 그럼······ 같이 갈까······."

    그냥 여기 저택 사람한테 부탁하라고 하고 실비아랑 둘이 가고 싶었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난 처지가 딱한 여자한테까지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매정한 놈은 아니었다.

    하여간 나란 놈은 너무 착해서 문제야.

    "미안. 실비아."

    "괜찮습니다."

    실비아에게만 들리게 목소리를 낮추고 사과하자, 실비아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그래도 조금 전 내 반응을 보고 오해는 풀린 모양이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자, 실비아. 이것도 먹어 봐."

    "전 괜찮······ 아읍!"

    아무튼 그런 이유로 실비아와 레이를 대동하고 저택 부지를 빠져나간 나는, 적당히 돌아다니면서 먹거리 투어나 하게 됐다.

    레이한테는 놀러 가는 게 아니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맵은 자동으로 완성되니까 말이야.

    레이도 지난번에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는 내 활약상을 봤기 때문인지, 그에 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

    대신 뭔가 달리 할 말이 있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이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둘이서 노닥거렸나.

    아니. 어차피 둘 다 남자라고 생각할 테니, 조금은 노닥거려도 별다른 의심을 안 살 거라는 생각에 맘 놓고 있었거든. 실비아도 레이가 같이 있어서 긴장하는 건지, 평소에 나랑 있을 때처럼 덜덜 떨지 않았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음식을 직접 먹여주는 건 조금 그랬나?

    "이 녀석, 보다시피 고지식해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완전 긴장한 채로 호위 일만 하려고 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억지로라도 뭘 좀 먹이는 거야. 긴장하고 있는 것보다는 이렇게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게 더 자연스럽기도 하고."

    실비아의 입에 물린 와플 같은 음식에서 은근슬쩍 손을 떼면서, 나는 레이에게 구차한 변명을 했다.

    젠장. 애초에 이 녀석이 따라오지만 않았으면 이런 변명을 할 필요도 없었는데.

    "나 별로 아무 말 안 했어."

    말은 안 했지만 생각은 했잖아, 이것아! 눈빛부터 의심스러운 눈빛이 가득하면서!

    절대 내가 혼자 찔려서 착각하는 게 아니야! 진짜 의심스럽다는 눈빛이라니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5화 > 끝

    ⓒ CurtainCall#o8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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