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94화 (978/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4화 >

    레이와 같이 방을 나오자, 복도에는 이미 실비아가 준비를 완벽히 끝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같이 온 게 실비아라서 참 다행이야. 저 순진무구하게 아무런 의심도 없는 눈동자를 보라고.

    만약 사라였으면 나랑 레이가 같이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무슨 소리를······ 아, 아니. 싫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질투한다는 건 그만큼 날 좋아한다는 거니까 그건 그거대로 기쁘긴 해. 응. 내 맘 알지 사라야?

    아무튼 실비아와도 합류해서, 우리는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식당으로 향하게 됐다. 아무래도 신과 유리, 그리고 파란은 이미 일어나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은 결국 그대로 걸렀네. 그 망할 아저씨. 고맙다면서 밥도 제대로 안 주다니.

    뭐, 나도 밥보다 우리 애들과의 대화나 실비아 테라피를 더 우선시하기는 했지만.

    "형님!"

    그리고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기름기 좔좔 흐르는 느끼한 아저씨의 면상이 내 코앞까지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나한테 형님이라고 하지 말랬지, 이 아저씨야!"

    그리고 부담스럽게 얼굴 들이밀지 마!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한 대 후려칠 뻔했네!

    아니. 그냥 한 대 후려칠 걸 그랬나?

    "형님 덕분에 어제 하루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기분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주먹을 불끈 쥔 나였지만, 파란은 내 고함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환희에 찬 목소리로 내게 열변을 토했다.

    그러니까 댁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든 말든 하나도 관심 없다니까! 대체 뭘 커밍아웃하고 있는 거야?!

    "이거라면, 이거라면 할 수 있습니다!"

    슬슬 진심으로 한 대 때려줄까 고민하며 꽉 쥐어진 내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파란은 위아래고 손을 크게 붕붕 흔들며 외쳤다.

    "······ 뭘 말이야?"

    "좀 더 많은 사람을, 저희 클럽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신의 교리를 어기는 것 같다며 자신의 마음속에 피어난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 저희 ‘은사모’에 들어오기를 망설인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은사모?"

    "신에게 듣지 못했습니까? 은밀히 사랑을 키워가는 모임의 줄임말입니다."

    그런 이름이었냐. 너희 비밀 클럽.

    은밀이고 뭐고 대놓고 이름부터 떠벌리고 다니고 있잖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니. 오히려 저런 이름이니까 더 믿을 수 있는 걸지도.

    웬만큼 능력이 있지 않으면 저런 이름의 비밀 클럽 활동을 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형님께서 알려주신 이 콘돔 섹스라면! 콘돔만 있다면 이제 저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아저씨는. 가로막는 게 없긴 왜 없어? 콘돔이라는 건 막으라고 있는 거라고. 여러 가지를.

    대표적으로 너랑 그 제니라는 여자 사이에도 얇으면서도 절대 넘을 수 없는 콘돔이라는 막이 단단하게 가로막고······ 나는 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사랑하는 여자에게 충실하는 것만으로도 동시에 그 증오스러운 걸레 신을 욕보일 수 있다니. 이거라면 이제는 저희가 음지에서 숨죽이고 있을 필요도······ !"

    "아니. 우선은 지금까지처럼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어."

    눈동자를 이글이글 불태우며 뜨겁게 외치는 아저씨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들이밀면서, 나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물론 저도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행동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걸레 신을 욕보이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아래에서부터 슬금슬금 사람들의 마음을 회유하면서, 천천히 잠식해나가는 게 저희 바프라의 방식 아니겠습니까."

    이 아저씨가 콘돔 섹스에 한 번 맛 들이더니 의욕이 너무 불타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과연. 이래봬도 일단 이런 대저택을 보유하고 있을 만한 능력은 있다는 건가.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음지에서 활동하라고 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얘네들이 당당하게 수면 위로 활동을 시작해버리면 당연히 바프라의 귀에도 콘돔 섹스의 얘기가 들어가게 될 테고, 그러면 그놈을 몰아낼 구실이 없어져 버리잖아.

    그러니까 일단은 음지에서 활동하라고 한 거였지만, 저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딱히 정정해줄 필요도 없겠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도 있잖아.

    "그래서, 우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실은 며칠 후, 이 저택에서 조그마한 모임이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군수품 보급을 위한 회의를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만······."

    "모이는 사람들은 전원 그 은사모의 회원이라는 얘기인가."

    어쩐지 여기 저택 사람들은 다들 남녀 간의 사랑에 거부감이 없는 것 같더라니.

    역시나 예상대로, 이 저택 사람은 다들 비밀 클럽의 존재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다 같이 모일 때 그간 어떤 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가꿔나갔는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곤 하죠. 그리고······."

    "잠깐만. 모이는 건 다 남자들이지?"

    "그렇습니다. 이름있는 가문의 여식과 사랑하는 관계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일반 여성은 드러내놓고 활동하기 힘드니까요. 시중으로 분하게 하여 데려오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는 건 시커먼 아저씨들이 테이블 하나에 오순도순 모여서 아가씨들이 사교 모임에나 나눌 것 같은 사랑 얘기를 꽃피워왔다는 거잖아. 그것도 섹스 얘기 하나 없이 진짜 건전한 사랑 얘기를.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차, 참자.

    "그렇겠군. 그래서?"

    "네. 우선은 그 모임에서 저와 제니의 섹스를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설득해보려 합니다."

    "그래. 잘······ 지금 뭐라고?"

    "네? 설득해보려 한다고 말했습니다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전에······ 설마하니 이 녀석, 섹스를 남한테 보여주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건가?! 어쩐지 어제도 보여달라고 그렇게 보채더니!

    아니. 아무리 섹스에 대한 관념이 다르다고 해도 그렇지, 알몸을 보이는 게 부끄럽다는 개념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레이도 내가 노출증이라고 하니까 부끄러워했고, 유리도 내가 방에 쳐들어갔을 때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었고!

    "너뿐만 아니라 제니의 몸도 다른 사람한테 보여줘야 하는 건데, 안 부끄럽냐?"

    "하핫. 그 이상으로 이렇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큽니다. 다 형님 덕분이지요."

    위험해. 위험하다고 이 녀석. 진짜배기 노출광이잖아.

    우리 귀여운 디아나라면 모를까, 더러운 사내새끼가 노출을 좋아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젠장! 괜한 사실을 알아버렸잖아! 망할! 상상하면 안 돼! 제발 그것만은 안 된다고!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사라지라고!

    "······ 그걸 계기로 모임을 서로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모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면, 더욱 관계가 돈독해지겠군."

    아무리 막으려 해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광경을 지울 수 없어서 죽고 싶어졌지만,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아예 그냥 그 비밀 모임을 난교 파티로 바꿔버리겠어.

    "머, 멋지군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런 발상을 하실 수 있다니!"

    일반적인 상식이 있는 놈이었다면 절대 거부할만한 의견도, 파란에게는 눈을 반짝반짝 빛낼 만큼 멋진 아이디어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이 아저씨 진짜 미친 거 아니야? 슬슬 이 아저씨가 나보다 더 여신님 쪽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인데.

    뭐, 사람은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반항하게 되고 간절히 원하게 되는 법이니까.

    외압으로 제대로 된 사랑도 섹스도 못 하던 녀석에게 섹스의 길을 터줬으니, 그쪽으로 폭주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해 못 하겠지만, 대충 그렇다고 쳐주자.

    "앞으로 정기적으로 서로의 사랑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걸레 신을 욕보이는 파티를 여는 거야. 그리고 그 난교 파······ 비밀 파티의 멤버를 믿을 수 있는 사람부터 끌어들이며 점점 더 확대해나가면 완벽하겠군."

    "역시 형님이십니다! 제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범상치 않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콘돔 섹스 얘기가 나오기 전까진 내 쪽에 신경도 안 쓰고 있었던 놈이.

    "그럼 우선은 며칠 후에 열린다는 그 모임을 위해 철저히 준비하라고. 그동안 제니랑 더욱 기분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그야 물론, 형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 아저씨, 나이 먹고 무리하다가 정작 중요할 때 안 서는 거 아닌지 몰라.

    뭐, 아직 30대고, 이런 세계에서 나름대로 직위가 있는 사람인 만큼 어느 정도 단련도 돼 있는 모양이니까 괜찮겠지.

    "그래. 그러면 나도 그동안 나대로 밑 작업을 해놓고 있지."

    "밑 작업······ 말입니까?"

    "그래. 우리가 양지에서 활동하기 위한 밑 작업을 말이야. 아무래도 그 반대파가 정점에 서 있으면, 양지로 나가기 힘들지 않겠어?"

    "그, 그러면 바프라님을······ !"

    "그런 거지. 왜? 두렵나?"

    "······ 아니요. 형님이 플리투스의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각오는 되어있습니다."

    조금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파란도 바프라의 반대편에 서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애초에 이 아저씨는 이미 날 만나기 전부터 비밀 클럽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고, 플리투스로 사랑의 도피를 하는 신과 유리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물론 자기 자신은 사랑의 도피를 할 정도의 각오는 없었던 모양이지만, 섹스의 맛을 한 번 보고 난 지금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

    이제 와서 바프라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섹스를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얘기는 당분간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알고 있어. 그리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굳이 지금부터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결국 그들 스스로 바프라를 저버리게 될 테니까. 오히려 바프라를 축출해내기 위해 눈에 핏줄을 세우고 덤벼들겠지."

    "그렇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모습은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듯, 파란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뭐, 두고 보고 있으라고.

    느끼한 아저씨와 정면에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며 한 식사였지만, 좋은 저택답게 음식 맛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우리 바넷사가 총괄 지휘하는 집에서의 식사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지만, 처음부터 그 정도 수준은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서, 파란은 곧바로 제니와 함께 식당을 나섰다.

    그 아저씨는 섹스를 보여주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보니, 내가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있다가 필요한 점이 있으면 조언을 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나는 할 일이 있다는 말로 자리를 회피해버렸다.

    내가 뭐가 슬퍼서 아저씨가 열심히 허리 흔들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겠어?

    게다가 할 일이 있다는 말도 딱히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직도 안 들어온 모양이군."

    발코니에 서서 망원경으로 항구를 쭉 한 번 훑어본 후, 나는 망원경을 테이블 위로 돌려놨다.

    저택의 위치가 항구와 가까운 건 아니었지만,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렇게 망원경을 쓰면 항구의 모습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거든.

    그리고 내가 찾은 건 물론, 우리가 매달려 온 배의 모습이었다.

    아직까지 항구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 항구에 들어오기 전에 어떻게든 나와 레이를 찾아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우리가 배 어딘가에 숨어있다고 착각하면서.

    사실 여기 오기 전에 배 밑바닥에 구멍이라도 뚫어서 골려줄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냥 온 게 정답이었다.

    이렇게나 시간을 벌어주다니. 물론 약으로 재워둔 여자들을 바프라에게 보내야 한다는 또 다른 임무가 있는 만큼, 쟤들도 언제까지 강 한복판에서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지만.

    만약 항구에 들어온다면 밤에 들어오겠지. 전에도 밤에 몰래 여자들을 운반했으니까.

    그렇다면 아마 오늘 밤도 바빠지려나.

    "또 숨어들 생각이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레이가 어느샌가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건넸다.

    "그래. 아무래도 확실히 알아놓는 게 좋으니까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레이를 바라보자, 그 얼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4화 > 끝

    ⓒ CurtainCall#o87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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