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3화 >
그대로 자는 척을 하면서 레이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기다렸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레이는 다음 행동을 시작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내 팔목을 잡고 들어 올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나마 변하는 점이 있다면, 날 잡고 있는 그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뿐.
"후우우······ 후우으윽······."
······ 야. 잠깐만. 너 지금 울려고 그러는 거 아니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그것만큼은 봐줘. 안 그래도 암살자 코스프레를 하고 다니던 애가 이 밤중에 몰래 쳐들어온 것도 무서운데, 거기서 뜬금없이 울기까지 하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무섭다고.
어쩌지?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사정을 들어봐야 하나? 하지만 그러면 실비아가······ 젠장.
"크윽!"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에, 레이는 갑자기 손에 힘을 꽉 주면서 뭔가 크게 결심이라도 한 듯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내 손목을 더욱 잡아당겨서는, 그대로 뭉클한 무언가에 내 손을 파묻었다.
······ 뭉클? 아, 아니. 알고 있어. 모를 리가 없잖아. 지금 여기서 이런 감촉이 느껴질 만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게다가 이 높이에 있는 것이라면, 내 손에 닿고 있는 뭉클한 감촉의 정체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알고 있지만, 얘가 갑자기 이런 짓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잠깐 뇌가 정지했던 것뿐이야.
얘, 얘, 얘가 지금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설마 흥분한 거야?! 자기 친구의 뜨거운 정사를 보고 나서 달아오른 몸이 도저히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아서 잠도 못 자고 번민하다가, 결국 이 밤중에 외간 남자 방에 쳐들어온 거야?!
손에 들어온 뭉클한 가슴 감촉을 한 박자 늦게 인지한 다음, 나는 깜짝 놀라서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꽉 움켜쥔 건 아니지만, 그 가슴 모양에 딱 맞게 손가락을 밀착시켜버리고 말았다.
이, 이건 바람으로 치지 않아도 되지? 고의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도 자제심을 발휘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날 칭찬해줬으면 할 정도다.
뭐,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손가락을 움직여버렸으니 레이한테는 내가 일어나 있다는 걸 들켰겠지만.
"하앗, 하, 하하······ 하아······ 여, 역시. 별거 아니었잖아."
그렇게 생각한 나였지만, 의외로 레이는 내가 깨어나 있다는 걸 아직 알아채지 못한 눈치였다.
자기 일만으로 벅차서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오는 느낌인가?
뭐, 눈치 못 채주면 나야 고맙지.
그나저나 이 녀석, 지금 보니까 아무래도 흥분해서 내 방에 쳐들어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레이의 과거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섹스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걸 본다고 흥분할 리가 없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그러면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이유도 그 혐오감 때문인가.
가만히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고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나 조금 전에 중얼거린 말을 생각해봤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미수에서 그친 자신은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정도로 충격을 받는데, 직접 범해지기까지 한 헬레나는 오히려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섹스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쓰는 것에 성공한 거다.
물론 레이가 그 정도로 충격을 받은 건 단순히 범해질 뻔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닐 거다. 오히려 범해질 뻔했다는 사실보다는 평생을 믿었던 아빠의 모습이 전부 거짓이었다는 배신감이 훨씬 더 크겠지.
그리고 헬레나는 헬레나대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건 포션의 힘이 무척이나 컸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과거를 극복해나가는 헬레나의 모습이 레이의 눈에는 무척이나 눈부시게 보였겠지.
안 그래도 레이는 평소 헬레나의 마음씨를 눈부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더욱더.
그러니까 아마도, 레이도 헬레나가 그랬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과거를 극복해보려는 생각에 이런 짓을 하게 됐다는······.
"하앗······ 하아앗······."
아니. 야. 잠깐만. 왜 슬슬 다시 호흡이 거칠어지는데?! 그러면 안 되잖아! 네가 그러면 지금까지 흥분해서 온 게 아닐 거라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던 내가 뭐가 돼?!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든 말든, 레이는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고는 가슴을 주무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응······ 역시······."
여, 역시 뭐?! 뭐가 역시라는 건데?! 그만둬 이 요물아! 난 임자 있는 몸이라고 했어 안 했어?! 그런 식으로 날 유혹하려고 하지 마!
으윽! 젠장! 이러면 아무리 나라도 반응이······ 아,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아직도 내 물건이 실비아 안에 삽입되어있으니까! 그래! 실비아의 안이 기분 좋아서 움찔한 것뿐이야!
으아아! 아, 안돼! 탐스러운 알가슴이 손안에서······ !
크윽! 여신님! 제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젠장! 생각해보니까 성자라는 직업을 주면서 내 성욕을 무진장 늘려놓은 게 여신님이잖아! 세상에 믿을 사람, 아니. 믿을 신 하나 없다더니!
이렇게 된 이상 직접 따지는 수밖에 없겠어!
몸은 일으킬 수 없지만, 적어도 고개만이라도 돌려서······.
그렇게 마음먹고 고개를 들려고 한 순간, 갑자기 밑에서 실비아의 몸이 움찔움찔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물건을 떨어대서 실비아의 몸도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건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성감대가 없는 실비아만큼은 내가 성자 스킬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 기절한 상태에서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일 리가 없다.
그렇다는 말은 즉······.
"흐아아아암!"
"흐아읏?!"
실비아가 정신을 차렸다는 걸 느낀 순간, 나는 팔을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켜는 척을 하며 크게 하품했다.
무슨 생각인지 내 손을 이용해 자기 가슴을 만져대는 이 정신 나간 여자한테 내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기지개를 켜는 척을 하다 보니 자연히 몸에 힘이 들어가서 그 알가슴을 손으로 꽉 쥐어버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게 이 여자에게 내가 일어난다는 신호를 확실히 알리는 역할을 한 모양이었다.
일부러 기지개를 켠 내가 채 눈을 뜨기도 전에, 레이의 모습은 방 안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은신은 못 하는 주제에 도망가는 거 하나는 또 기가 막히게 빠르네.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흐야아앙······."
황급히 몸을 일으켜서 실비아를 바라보니, 거기에는 눈이 팽글팽글 돌아가면서 다시 기절한 실비아가 있었다.
아차. 어쩐지 밑에서 엄청 움찔움찔 거리더니.
깨어나자마자 나랑 완전히 밀착해서 삽입 당하고 있었던 게 상당히 자극이 심했던 모양이다.
······ 뭐, 어차피 슬슬 잘려고 했었으니까. 나도 이만 잘까.
그 전에 문단속부터 제대로 하고.
"안녕."
아침에 방을 나오니, 마치 타이밍을 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레이도 동시에 방을 나오고 있었다.
뻔뻔하게 인사하기는. 설마 어제 일을 안 들켰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 마지막에 도망가기 전에 가슴 잡히고 "흐아읏?!"이라고 했던 건 기억 안 나냐? 들키지 않을 리가 없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해주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때 내가 일어나있었다는 걸 알려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괜히 얘랑 사이가 서먹해지기만 하겠지.
일단 바프라를 무너뜨릴 핵심 카드 중 하나니까 말이야. 괜히 나서서 사이가 서먹해질 필요는 없잖아?
"오냐."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억누르고 간단하게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기로 했다.
"뭐야. 잘난 것처럼 거드름 피우기는."
"‘잘난 것처럼’이 아니라 잘난 거 맞아. 너 설명 못 들었냐? 난 이래 봬도 신께서 직접 내려 해주신······."
"잘나셨어."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난 내게 직업을 내려주신 신이 전쟁신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의 말재간에 감탄하기도 전에, 레이는 가볍게 내 말을 흘려넘기고는 몸을 돌렸다.
저, 저 밤에 외간 남자 방에 몰래 기어들어 와서 남의 손으로 자위나 하던 여자가 뻔뻔하게!
좋아.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뻔뻔하게 있을 수 있나 보자!
"잠깐 기다려."
"윽?! 무, 뭐?"
뻔뻔하게 도망가려는 레이의 손목을 붙잡자, 레이는 황급히 손을 빼면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 녀석, 역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던 거였어.
사실 속으로는 나한테 들키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거야.
"잠깐 얼굴 좀 보지. 둘이서만 긴히 할 말이 있어. 무슨 일인지는 너도 대충 짐작이 되지?"
"으으······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는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 침음성을 흘렸다.
표정이 절망으로 물든 걸 보니, 어제 일을 완전히 들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헹. 꼴 좋다. 뭐, 사실 어젯밤 일을 언급하려는 게 아니지만.
"네 방으로 가자."
그래도 굳이 착각을 정정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나는 착각에 빠진 레이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레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참고로 내 방에는 아직 실비아가 있으니까 레이의 방에 들어간 거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다.
"자, 그럼.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
변명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레이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어젯밤의 일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 아예 자포자기한 건가?
"바프라, 그러니까 네 아빠에 관한 얘기야."
"?! 그, 그 남자는 내 아빠 같은 게 아니야!"
하지만 처음부터 어젯밤 일을 물어보려는 게 아니었던 나는 바로 다른 얘기를 꺼냈고, 레이는 너무도 예상외의 질문에 한 박자 늦게 반응을 보였다.
"알았어. 그러면 그 남자라고 하지. 네가 그 남자 얘기를 싫어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꼭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 뭔데?"
"우리가 잠입했던 그 배에는, 바프라에게 보낼 물건이라면서 여자가 잔뜩 실려있었잖아? 그 여자들이 어떤 목적으로 바프라에게 보내지는 건지, 넌 알아?"
사실 어떤 목적인지 짐작 가는 건 있었지만, 이왕이면 확실하게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 듣고 싶었다.
"······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레이는 면목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하긴. 거의 평생을 거짓 속에서 살았던 녀석이다. 바프라가 뒤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을 리가 없나.
"그런가. 그럼······."
"하지만 그 남자는, 그 남자는······ !"
포기하고 얘기를 끝내려는 순간, 실망스러운 내 표정을 읽었는지 레이가 다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대답하다 보니 또 그때의 생각이 난 건지, 레이는 제대로 말을 맺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괜찮아. 괜찮으니까.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나는 그런 레이에게 다가가서는 그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줬다.
말해두지만, 별다른 뜻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그냥 전에도 이런 식으로 진정시킨 적이 있으니까, 이번에도 똑같은 방법으로 진정시키려는 것뿐이야.
"그 남자는······ 날 덮칠 때도 너무 익숙한 것 같았어······. 30년 가까이 안 해본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리고 주변 놈들도 다 그 사실을 아는 것처럼······."
"알았어. 충분해. 그만하면 됐어."
이제는 입술까지 바르르 떠는 레이의 머리를 끌어안아서 그 얼굴을 내 어깨에 파묻게 하면서, 나는 그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줬다.
이런 말로 확신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내 예상이 맞는다는 가정을 하고 일을 진행해도 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뭐, 애초에 그렇게 많은 여자가 필요한 일이 뭐 얼마나 되겠어. 그것도 하나같이 한창 나이대의 젊고 싱싱한 여자들만 필요할 일이.
아무리 그래도 폭탄을 터뜨리기 전에 확인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지.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슬그머니 레이에게서 떨어졌다.
"진정했어?"
"······ 처음부터 동요한 적도 없어."
이게 좀 괜찮아지니까 또 센 척하네.
"그러냐. 그럼 가자."
상대가 우리 애들 같았으면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더 진정하게 가슴이라도 만져줄까? 어젯밤처럼." 같은 농담이라도 더 해줬겠지만, 얘한테까지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사실 입이 근질거리기는 했지만, 참자. 참아. 지금은 그런 농담을 해봤자 괜히 어색해지기만 할 뿐이야.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93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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