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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87화 (971/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7화 >

    나는 레이와 헬레나를 구출해서 겨우 다른 파티원과 합류했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고 나니 분위기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같이 다니면서 조금 인상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레이는 말수가 적고 경계심이 강한 성격이니까 말이야. 그렇다 보니 레이는 헬레나를 자기 등 뒤에 숨긴 채 다른 파티원들에게 경계심을 가득 담은 시선을 보냈고, 헬레나는 그런 레이의 뒤에서 어쩌

    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레이와 헬레나를 어떻게 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 둘을 바라봤고, 결과적으로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게 됐다는 얘기다.

    모처럼 사람이 바람의 정령으로 공기 방울까지 만들어줬는데.

    "안녕하십니까. 저는 그렉이라고 합니다. 두 분은······."

    "네놈에게 알려줄 이름은 없다."

    그래도 제일 사교적인 성격인 그렉이 나서서 둘과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격침되어 버렸다.

    호랑이 얼굴인 주제에 불쌍한 표정 지으면서 구호 요청하지 말라고.

    하여간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니까.

    "야. 그렇게 말하지 말고 이름 정도는 알려줘라. 어차피 한동안 같이 다녀야 할 텐데 이름도 모르면 널 부를 때마다······."

    "어째서 이들과 한동안 같이 다녀야 하지?"

    거드름 피우는 표정으로 레이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던 나였지만, 레이는 그런 나한테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얘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네.

    뭐, 모르는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니 긴장으로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건 이해하지만.

    "잠깐 실례."

    나는 레이의 팔을 붙잡고 모두의 머리를 잇고 있던 공기 방울에서 빠져나온 다음, 서로의 마스크를 맞댔다.

    응. 그래도 얘랑 하는 건 아까 저 호랑이 놈이 들이댈 때랑은 달리 그렇게까지 거부감이 안 생기네. 역시 사람은 예쁘고 봐야돼.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뭐, 정작 이번엔 레이가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괜찮아. 상처 안 받았어. 그럴 수 있어. 얘는 남자에 대한 인식이 개차반일 테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난 상처 안 받았어.

    "물속에서 얘기하려면 이럴 수밖에 없으니까 가만히 있어. 둘만 따로 얘기하려고 쓸데없이 마나를 더 쓸 수도 없잖아."

    황급히 멀어지려고 하는 레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서 고정하면서, 나는 진정하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최근 남들 몰래 섹스하려고 바람의 정령을 매번 써대서 내 정령사 레벨이 급상승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공기 방울 두 개를 각각 유지하는 건 마나 소모가 심하니까.

    그런 멀티태스킹은 단순히 마나가 두 배 소모되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고.

    진짜 디아나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어? 잠깐만. 디아나? 마, 망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내가 마스크를 맞댄 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레이가 슬슬 짜증 난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 그래. 우선은 얘랑 말하는 게 먼저지.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자.

    "그럼 우선 네 사정부터 들어볼까? 아까 말해준다고 했었지?"

    "······ 여기서 갑자기?"

    "그래. 다른 녀석들한테까지 들려주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여기라면 아무도 엿들을 수 없어."

    "윽······ 아, 알았어."

    스스로 말해준다고 했어도 저항감이 아예 없는 건 아닌지, 레이는 조금 주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자신의 사정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확실히 알게 된 레이의 사정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순혈주의에 미쳐있는 바프라는, 유일하게 남아있던 다크 엘프 여자가 후계자인 남자도 남기지 못하고 죽자 말 그대로 미쳐 날뛰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다크 엘프 여자를 죽게 한 증오스러운 딸마저 죽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순간, 바프라는 깨달은 거다. 아직 순혈 다크 엘프 여자가 하나 더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 이후로 바프라는 때를 기다렸다. 레이가 자신의 아이를 낳을 완벽한 모체로 성장할 때까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애지중지하면서, 보통 여성에게는 가르치지 않을 고급 무술까지 철저하게 가르쳤다.

    물론 남들에게는 딸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밝히지 않을 정도였으니 새장 안에 갇혀 애완동물과 비슷한 신세였지만, 레이는 몰랐다.

    그저 자신을 애지중지하는 바프라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아빠는 이 세계의 다른 남자들과 달리 딸에게마저 애정을 쏟는 최고의 아빠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레이가 드디어 자기 아들을 낳을 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한 바프라가 레이를 덮치러 온 그날 밤에 깨졌다.

    평생을 믿어온 아빠가 자신을 덮치러 온 거다, 레이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서 바프라가 자신의 옷을 벗길 때에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굳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레이에게, 바프라는 잔인하게도 비열한 웃음을 띠며 자신이 왜 지금까지 레이를 그렇게 소중하게 키워줬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고 한다.

    "그, 그때부터는 제대로 생각나지 않아. 나, 난······ 난 그저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피가······."

    얘기하다 보니 또 그때의 생각이 떠올라 트라우마가 자극된 건지, 레이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았어. 더 얘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진정해. 괜찮아. 괜찮으니까."

    나는 그런 레이의 몸을 끌어안고,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면서 레이를 진정시켰다.

    들을 얘기가 더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래서는 제대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바프라 그놈도 어지간히 미친놈이네. 완벽한 아들을 낳기 위해서 30년 가까이 그런 노력을 퍼붓다니. 게다가 덮치기 직전에 사정을 다 설명해주는 악취미까지.

    자기가 그렇게 기른 레이의 잠재력을 얕보고, 아니. 여자라는 성별 자체를 얕본 건가?

    아무튼 너무 얕본 나머지 결국 레이를 덮치기 바로 직전에 실패해버린 모양이지만, 레이가 받은 충격이 어느 정도 일지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레이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건 그냥 아빠한테 처녀를 잃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또라이 같은 짓을 당한 거였다니.

    예상외로 처녀는 잃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런 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 난······ 나는······ 그, 그 남자를······."

    내가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도 그다지 효과는 없었는지, 레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으응······ 죽이고······ 죽이고 싶어. 복수하고 싶어. 그러니까 도와줘. 너도 바프라의 파멸을 원하지? 아까 말했잖아? 바프라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고."

    내 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레이는 간절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달라는 것처럼.

    과연.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어쩐지 순순히 자기 사정을 말해준다고 하더라. 이렇게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오들오들 떠는 주제에.

    뭐, 나도 처음부터 바프라를 무너뜨릴 건수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 레이를 도와줬던 거니, 잘된 일이다.

    "그건 상관없지만."

    "어, 없지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가슴에 얹은 두 손에 힘을 꼭 주면서, 레이는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별거 아니니까.

    "그러려면 우리랑 같이 다녀야 하는데? 너 아까 어째서 쟤들이랑 한동안 같이 다녀야 하냐고 안 했어?"

    "그, 그건······."

    "말해두지만, 난 쟤들이랑 떨어져서 너랑만 다닐 생각 없다."

    나머지 떨거지들은 그렇다 쳐도, 실비아랑 떨어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여기에 남아있는 내 유일한 안식처에서 스스로 멀어진다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야.

    "아, 알고 있어. 하지만 저들도 그, 그 남자에게 대항할 생각이······."

    과연.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그런 거라면 문제없어. 다들 언제든 바프라의 심장을 찌를 준비가 된 놈들이니까."

    뭐, 신이나 유리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쟤들한테 기대하고 있는 건 그런 부분이 아니니까 문제 될 건 아니지.

    "너, 너희들은 대체······."

    "그렇군. 네 사정도 들었으니, 우리 사정도 알려주지 않으면 공정하지 않겠군. 무엇을 숨기랴. 우리는 바로, 플리투스의 인간이야. 내가 바프라의 인간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잖아?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

    그런 안타까운 사정을 다 들어놓고 거짓말을 한다는 게 무척이나 양심이 찔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신님의 사도라는 걸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얘 정도로 바프라에게 복수심을 가진 놈이라면 설령 여신 측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손을 잡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런 위험한 도박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

    "플리투스의······ 어째서 이런 곳까지······."

    "자세한 사정은 저 녀석들한테 들으라고. 아까 못했던 통성명도 마저 할 겸."

    힐끗 다른 놈들이 모여있는 곳을 바라보니, 다들 헬레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따듯하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네가 설명해주지 않는 거야?"

    하지만 레이는 여전히 다른 남자들과 얘기하는 건 거부감이 있는지, 내가 떨어지려고 하자 황급히 내게 매달려서 이번에는 자기가 내 마스크에 자신의 마스크를 꼭 밀착시켰다.

    뭐, 자기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고 평생을 믿고 살았다가, 아빠가 갑자기 자신을 덮치러 왔다는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자기도 다른 여자랑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달아 버린 거다.

    지금까지 도와준 나야 둘째 치더라도 다른 남자한테 거부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내가 감싸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 눈에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는 남자와의 대화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난 조금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괜찮아. 다들 착한······ 나쁜 녀석들은 아니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레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레이의 몸을 다들 모여 있는 곳으로 밀었다.

    그리고 나 자신은 건틀렛을 벗고 황급히 그 안에 있는 반지를 빼서, 마스크 아래에 뒤집어쓰고 있던 복면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러면 다른 사람들 눈에 반지가 빛나는 것도 보이지 않을 테니, 통화하는 걸 들키지 않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뒤까지 돈 다음, 나는 얼른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으아아. 벌써 4시잖아. 망했다. 진짜 망했어.

    원래 잠깐 정찰만 하다가 돌아온 다음 여관방에서 언제나처럼 실비아 테라피를 맛보며 행복하게 통화할 생각이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여버린 거야?!

    레이를 만났을 때부터인가?! 아니!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여보세요? 혹시 주무세요?"

    "구원!"

    혹시나 싶어서 조용조용하게 말을 건네봤지만, 대답은 곧장 들려왔다.

    게다가 자다가 깬 목소리조차 아니었다.

    그리고 심지어 들려온 건 사라 목소리였다.

    아, 아니. 사라라서 싫다는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조금 그, 혼나는 게 무섭다고 할까······.

    "걱정했잖아! 어디 다친 거야!? 괜찮아?!"

    크흑. 사라야아! 이 오빠가 의심해서 미안하다아아!

    "괘,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목소리가 떨리잖아! 진짜 어디 다친 거 아니야? 어설프게 숨기려고 하면 나중에 가만 안 둘 거야."

    가만 안 두겠다고 말하는 사라였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나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듬뿍 담겨있었다.

    봤냐?! 너희들 보고 있어?! 이게 내 여자라고!

    아니. 뒤돌아 있으니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안 보이겠지만.

    "아니. 정말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목소리는 그냥 사라 목소리를 들으니까 너무 좋아서 감동으로 떨리는 거야."

    "새, 새벽에 연락해서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바보는! 아무 일도 없으면 연락은 왜 이 시간에 했어?"

    "그냥 조금 밤에 가볍게 정찰만 하려고 했는데, 뭔가 일이 이리저리 꼬여서 때아닌 잠입 놀이를 하게 되어서 시간이 좀 걸렸어."

    할 수 있으면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반지가 허용하는 통화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 정말 괜찮은 거지?"

    그리고 사라도 그런 사정을 이해해주는 건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런 질문만 다시 반복해줬다.

    "그럼.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너무 잘 풀렸어. 어쩌면 여기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빨라질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만······."

    "응. 빨리 보고 싶다."

    "······ 나도 보고 싶어. 그렇다고 해서 또 무리하는 말고, 바보야."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따라 저 바보라는 말이 너무도 사랑스럽게 들렸다.

    아까 이상한 애한테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역시 나한테 바보라고 해도 되는 건 너뿐이야. 사라야.

    아니. 사라 너도 하려면 오빠를 덧붙여야 하지만, 오늘만큼은 용서해주지.

    오늘은 맘껏 바보라고 해도 좋아!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7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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