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86화 (97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6화 >

    "으응······응······."

    그렇게 레이에게 엎드려 절을 받으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있자, 드디어 납치당한 히로인께서 눈을 뜨려고 하는지 몸을 뒤척였다.

    조금 더 기절해있었다면 레이에게 이것저것 더 캐물어 볼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지.

    기절한 이유는 아마 약물 때문이었을 테니까, 해독약을 먹은 만큼 바로 정신이 드는 모양이다.

    레이에게 자세한 얘기를 듣는 건 레이 말대로 나중에 하기로 하자.

    "헤, 헬레나! 정신이 들어?!"

    그러자 레이는 얼굴에 화색을 띠며 다시 헬레나에게 달라붙었지만, 저거 괜찮으려나.

    "응······레이······?"

    "미안. 미안해. 나 때문에······나 때문에 이런 짓을······."

    아까 나랑 잠입 액션 찍을 때의 그 말수 적고 날이 선 칼 같던 레이는 어디로 갔는지.

    레이는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헬레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런 레이를 바라보면서, 헬레나는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어쩌면 좋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야 그렇겠지. 둘이 어떻게 얼마나 우정을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걸 당해놓고 둘 사이가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가 깨어난 헬레나에게 달려들었을 때 불안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괜찮아. 레이.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내 예상과 다르게, 헬레나는 미소를 지으며 레이의 머리를 어루만져줬다.

    진짜입니까. 대체 얼마나 착해 빠진 거야? 저래서 레이가 그렇게 애타게 찾아다닌 건가?

    "하,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하게 될 운명이었는걸. 보통은 처음 할 때부터 여러 명을 상대로 하다가 지쳐 쓰러지는데, 그런 것에 비하면 오히려 나는 운이 좋았어."

    우와. 대체 머리구조가 어떻게 되어있으면 저렇게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아니. 저 여자가 긍정적이라기보다, 이 세계에서 여자들의 현실이 저렇게까지 가혹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뭔가 처음으로 이 세계에서 여자가 게 어느 정도 취급을 받고 있는지 피부로 느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 둘, 그러니까 유리와 레이는 그래도 귀한 집 딸이라 그런지 그렇게까지 비참하단 느낌은 안 들었었으니까 말이야.

    "우으······헬레나······."

    "정말 괜찮으니까. 울지 마."

    "응······."

    생각했던 것과 달리 너무도 훈훈한 전개에 나도 뭔가 좋은 얘기를 본 것 같은 흐뭇한 감정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크흠! 크흠!"

    "엣? 앗, 으으······."

    날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둘을 향해 가볍게 헛기침을 해주자, 드디어 내 존재를 눈치챈 헬레나가 고개를 들어서 날 바라보더니 두려움에 물든 표정으로 잘게 몸을 떨었다.

    역시 레이 앞에서 괜찮을 척을 하고 있었던 건가.

    그야 그렇겠지. 아무리 여자가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한 세계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난폭하게 다뤄지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괘, 괜찮아. 구해준 녀석이야."

    야. 구해주신 은인한테 지금 녀석이라고 했냐? 어딜······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까 신과 유리가 30년 전쯤 바프라가 딸을 낳았다고 했었던가? 얘 설마 나보다 연상이야?

    아까 애널라이즈를 썼을 때는 이름에만 너무 시선이 가서 나이까지는 제대로 안 봤었지만······진짜네.

    은근슬쩍 애널라이즈를 써보자, 레이의 나이는 32살. 진짜로 나보다 연상이었다.

    겉보기에는 끽해야 20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다크 엘프라서 그런 건가?

    "하지만 남자······."

    "괜찮아. 믿을 수 있는 녀석이야. 아마도."

    "야. 뒤에 아마도는 왜 붙이는 거냐? 여기서 얼마나 더 해줘야 믿을 건데?"

    뭐, 나이를 알았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다.

    나도 누나 취급해줄 생각은 없으니, 그냥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대해주자.

    "아야! 이, 또······!"

    레이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주고 나서, 나는 헬레나에게 말을 걸었다.

    "막 기절에서 깨어난 사람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 움직일 수 있겠어?"

    "네? 네에······."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왜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데?!"

    헬레나는 남자와 이렇게 대화하는 게 무척이나 어색하다는 듯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지만, 옆에서 레이가 눈에 불을 붙이며 반대했다.

    "당연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대장 두 놈이 계속 얼굴도 안 비치면 선원들이 찾아올 거라고. 아직 선원들이 의심하지 않을 때 움직여야지."

    게다가 지금은 자기 실력을 과신한 멍청이 둘이 근처에 있는 선원들을 다 물려놨으니까.

    일반인으로 보이는 헬레나를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서는 지금이 제일 적기였다.

    "그런 거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어차피 제일 센 놈들은 죽였으니까, 나머지는······."

    그러니까 넌 왜 그렇게 죽이는 걸 쉽게 생각하냐고.

    "그렇게 죽이면 또 다른 선원이 올 거고, 그것도 또 죽이면 또 다른 선원이 올 거야. 그렇게 전부 죽여버리면, 배는 어떻게 움직일 건데? 너 이 배 조종할 수 있어? 아니면 헤엄쳐서 땅까지 갈 수 있어?"

    강이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강의 크기를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렇게 커다란 배를 띄우고 있는 거니까.

    레이는 가능할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헬레나는 확실하게 땅까지 헤엄칠 수 없을 거다.

    "윽······."

    내 말에 할 말이 없어졌는지, 레이는 이를 악물고 날 노려보기만 했다.

    하는 말은 타당하지만, 그래도 기절에서 막 깨어난 친구에게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리고 이 녀석들 아직 안 죽었어."

    "윽?!"

    그런 레이에게 지금 당장 움직이어야 할 확실한 이유를 말해주기 위해 구석에 쓰러져있던 두 놈의 몸을 발로 툭툭 차자, 레이와 헬레나가 둘이 동시에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왜, 왜 안 죽였어!"

    그리고 황급히 단검을 꺼내서 두 놈을 찌르려고 달려드는 레이였지만, 나는 그사이에 파고들어 레이를 막아섰다.

    "막지 마!"

    너야말로 죽이려고 달려들지 마, 이것아.

    나는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레이의 팔을 잡고 등 뒤로 꺾어서 제압했지만, 그래도 레이는 어떻게든 저 두 놈을 죽이고 싶은 건지 끊임없이 몸을 버둥버둥 움직였다.

    아니. 죽이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말이야.

    나는 그 허리에 팔을 감고 힘을 꽉 줘서 완전히 제압한 다음, 그 긴 귀에 차분하게 설명해줬다.

    "당장의 감정에 눈이 멀지 말고 좀 더 멀리 봐. 바프라 직속 부하로 보이는 이 녀석들까지 죽여버리면, 나 바프라 사람 아니라고 선전하고 다니는 꼴 밖에 더 되겠어? 하지만 이렇게 살려두면, 이 녀석들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아무리 그래도 바프라 님의 직속 부

    하까지는 죽일 수 없었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그 협력자는 바프라 내부 사람인 건가. 라고. 그러면 네 도피행도 더 안전해지지 않겠어?"

    사실은 전혀 다른 이유로 죽이지 않은 거지만, 일단 이런 계산도 들어가 있기는 했다.

    "게다가 임신과 관계없는 섹스를 하고 있다는 걸 들킨 거야. 처음에는 불안해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의구심이 들기 시작할 거야. 바프라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폭로하지 않는 거지? 이윽고 그 의구심은 의심으로

    변하겠지. 설마 그 협력자는 처음부터 바프라와 그 측근이 섹스를 즐긴다는 걸 알고 있는 놈이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 협력자 자신부터 이미 섹스를 즐기고 있는 놈이었던 게 아닐까?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점점 커질 테고, 놈은 결국 자신의 최측근을 의

    심하며 스스로 무너져내릴 거야."

    사실 여기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지만, 말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됐다.

    하지만 꽤 그럴듯하지 않아? 운만 좋으면 진짜로 저렇게 흘러갈 수도 있는 일이잖아. 그렇게 흘러가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고 말이야.

    그때는 내가 그걸 이용해서 바프라를 무너뜨리면 그만이니까.

    아무튼 내가 차분하게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있는 힘껏 버둥거리던 레이의 몸도 점점 발버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고개를 뒤로 돌려서,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그 남자를······."

    "그래. 무너뜨릴 수도 있는 거야. 기대되지 않아?"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레이는 고개를 더욱 내밀어 떨리는 눈동자를 내 눈에 똑바로 마주쳤다.

    바프라한테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애처롭게 벌벌 떠는 것을 보나, 바프라와 관련된 놈은 철저하게 죽여버리려고 하는 것을 보나, 레이가 자기 아빠를 죽여버리고 싶어 하는 건 명백했으니까.

    "너, 넌 대체······."

    야. 얼굴 가깝다고. 이러다가 배가 조금 기울어지기라도 하면 바로 키스해버리겠네.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난 임자 있는 몸이니까, 혹시 기회를 엿보고 있는 거라면 포기해라.

    하여튼 나란 놈은 너무 멋져도 탈이라니까.

    "그래. 그래. 내가 적이 아니라 다행이지? 그러니까 자, 이거 받아."

    힘이 빠진 레이의 몸을 품에서 놔주며 적당히 대답하고는, 나는 품에서 포션 하나를 꺼내 헬레나에게 던졌다.

    "이, 이건?"

    "마셔. 몸에 좋은 거니까. 조금은 체력이 회복될 거야. 슬슬 움직여야지."

    헬레나가 물약을 마시는 걸 확인한 다음에, 나는 둘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밤이 깊은 시간. 방 주변에는 사람이 없고, 우리에게는 배 구조를 훤히 꿰고 있는 레이도 있었다.

    헬레나를 데리고 창문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 밑으로?"

    "그래. 레이 넌 마스크를 써봤으니까 알잖아. 그걸로 배 밑에 달라붙어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달라고."

    "하지만······."

    "괜찮아. 레이. 어차피 내가 있으면 숨어있지도 못하는걸."

    레이는 헬레나가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는 듯 불안한 시선을 보냈지만, 헬레나는 기특하게도 오히려 레이를 격려해줬다.

    "아니. 그건 아니야. 헬레나 네가 없어도 어차피 숨어있지는 못해. 레이 이 녀석, 이런 차림을 하고 다니는 주제에 은신 엄청 못하니까."

    "무, 뭐!?"

    갑자기 디스 당한 레이는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런 레이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헬레나에게 말을 건넸다.

    레이 네가 그렇게 아끼는 헬레나를 다독여주고 있는 거니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그러니까 헬레나 네가 괜히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안심해. 애써 매달려있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다 손을 써놨으니까. 밑에 내 동료들이 있거든. 애석하게도 대부분 남자지만, 좋은······나쁜 녀석들은 아니니까 겁먹지 않아도 돼."

    차마 내 입으로 그 떨거지들이 좋은 녀석들이라는 얘기는 못하겠어서, 나는 도중에 말을 바꿨다.

    "대부분이요?"

    그런 내 너스레가 먹혀들었는지, 헬레나는 작게 쿡쿡 웃으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보니 좋기는 하다.

    "그래. 일단 여자도 있거든."

    "여자도?"

    내가 대답해주자, 헬레나가 아닌 레이가 옆에서 여자라는 말에 반응했다.

    뭐, 내가 바프라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디 사람인지는 모를 테니까. 여자가 동료로 있다는 게 신기하기는 하겠지.

    그 여자도 바프라 사람이었지만, 설명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그래. 뭐, 보면 알 거야. 그럼 가자. 아, 헬레나는 내 목에 팔을 감고 있어줘. 안전하게······."

    "내가 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헬레나와 같이 다이빙하려 했던 나였지만, 레이가 거칠게 내 몸을 밀치며 헬레나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저건 진짜. 기껏 호의를 베풀어줘도. 누가 잡아먹는데냐?

    나도 임자 있는 몸이라서 전혀 아쉽지 않거든?! 애초에 그 여자는 생긴 게······아니. 내 눈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평범한 마을 아가씨 외모를 괜히 이러쿵저러쿵 비하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둘이 잘 먹고 잘살아라.

    레이와 헬레나를 먼저 마스크를 씌워 보내준 다음, 나는 그대로 창틀에 발을 디디고······아니. 잠깐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창틀에서 물러나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서 칠흑같이 어두운 창밖으로.

    크크큭. 이것이 바로 완벽한 밀실 범죄! 눈에 보이는 그림자는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이란, 생각해보면 참 활용도가 다양하단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능력에 흐뭇해하면서 다이빙한 내 눈에 처음 들어온 장면은, 헤엄을 못 치는지 팔다리를 심하게 바동거리고 있는 헬레나와 거기에 말려들었는지 자기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대고 있는 레이였다.

    그러니까 내가 데리고 다이빙한다니까. 아니. 덕분에 밀실 범죄가 가능해졌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준 다음, 나는 두 아가씨의 허리를 각각 한쪽 팔로 끌어안아 옆구리에 끼고는 발장구만으로 배 밑까지 헤엄쳐갔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6화 > 끝

    ⓒ CurtainCall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