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85화 (96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5화 >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아까부터 느껴졌던 미심쩍은 기분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분명 더 안쪽으로, 더 중요한 장소로 가고 있는데 인기척은 줄어들었던 이유.

    이 녀석들은 처음부터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던 거다.

    레이에게 협력자가, 그것도 상당한 잠입 능력을 갖춘 협력자가 있는 건 확실하니, 레이를 잡아놓고 있으면 분명 구하기 위해 올 거다.

    그러면 언제 올지 모르는 놈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아예 우리가 판을 깔고 초대해주자.

    주변에 선원들을 물려서 경계를 약화시키면, 얼씨구나 하고 덤벼들겠지.

    의심을 품더라도 상관없다. 아무리 의심스럽더라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냥 기다리는 것도 재미없으니, 한 가지 더 쇼를 준비하자.

    어차피 선원들은 다 물려놨으니, 문을 열더라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놈은 없다.

    그러니 찾아올 협력자가 제일 눈이 돌아갈 만한 상황을 연출해주자.

    자기들의 실력에 웬만큼 자신감이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성격이 지랄 맞게 더럽지 않은 이상 생각해낼 수 없는 수법이었다.

    "놀랐나?"

    문을 열고 마중 나온 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굳어져 버린 날 바라봤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저리 꺼져!"

    나는 놈의 몸을 밀치고,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본 광경은······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광경이었다.

    아니. 남자가 여자를 범하고 있는 것 자체는 맞았다. 다만 범해지는 여자는 레이가 아니었던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레이가 여기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아······아아아······그, 그마······."

    레이는 후배위 자세로 팔을 잡아당겨 진 채 범해지고 있는 여자의 바로 정면에서, 벽에 찰싹 달라붙어 불쌍할 정도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고 해도, 손이 등 뒤로 묶여 있는지 열심히 발로 바닥만 밀어내고 있었지만.

    남자를 말리고 싶지만 두려움 때문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망가려고만 하는 모습이, 아까의 내가 봤던 그 레이 바프라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크하하! 친구가 이렇게 당하고 있는데 말리지도 못하는 모습이라니! 이러니까 여자는! 왜? 무서운가 보지?! 너도 곧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몸이 안 움직이나?! 아앙?!"

    여자를 범하고 있는 놈은 그런 레이의 모습에 희열을 느낀다는 듯, 더욱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이며 레이를 다그쳤다.

    그러고 보니 그랬지. 아까 항구에서 대화할 때, 이 녀석들은 아직 레이에게 손을 댈 수 없다고 했었지.

    게다가 저 여자를 범하고 있는 놈은 처음부터 레이에 대한 욕망을 엄청나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문을 열고 날 마중해준 놈은 진지하게 임무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놈이 레이를 범해서 도발하자는 계획에 찬성할 리도 없고, 이렇게 태연히 문을 열고 마중해줄 리도 없잖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신음의 주인이 레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니. 범해지는 여자가 레이가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전혀 아니지만.

    대충 봐도 레이는 완전히 멘탈이 박살 난 모양이고, 저 범해지고 있는 여자는······친구라는 말로 유추해봤을 때 저 여자가 헬레나인가.

    아무튼 그 헬레나 씨도 상당히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랐나?"

    너무 예상과 다른 모습이 펼쳐지고 있어서 잠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자니, 갑자기 뒤에서 비릿한 웃음소리가 목덜미를 간질였다.

    "이런 씹······!"

    "훗. 보기보다 감은 좋은 놈이었군."

    더러운 남자 입김이 닿는 감촉에 황급히 거리를 벌리며 뒤를 바라보자, 거기에는 단검을 찌르는 자세로 있는 진지남이 있었다.

    아니. 단검 느낌에 피한 게 아니라 네 입김이 더러워서 피한 건데.

    그보다 너. 저기 저 강간마보다는 진지한 놈 아니었냐? 말투는 정정당당하게 정면승부만 할 것처럼 진지한 놈이 치사한 수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네.

    아, 그러고 보니 바프라는 사파에 해당하는 곳이었지. 여기선 저게 기본이라는 건가.

    "뭐야. 실패한 거냐."

    그리고 동료의 기습 실패를 비웃으면서, 강간마 녀석이 천천히 허리를 빼고 여자를 놔줬다.

    헬레나는 정신을 잃은 건지 그대로 허물어지며 레이의 몸 위로 쓰러졌고, 레이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지 시야가 가려지자 발을 버둥버둥 움직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지금은 이 두 녀석을 상대하는 게 우선이겠지.

    빨리 끝내버릴까. 마침 레이의 눈도 가려졌으니, 숨기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내 기습을 눈치챘다. 생각보다 강해. 방심하지 마라."

    아니. 그러니까 네 기습은 눈치 못 챘다니까. 그냥 네 입 냄새가 더러워서 피했다고요.

    하지만 뭐, 내가 강하다고 오해해주는 편이 오히려 더 상대하기 편할 테니까 가만히 있자.

    바지춤을 끌어 올리고 온 강간마까지 합세했지만, 놈들은 내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는지 좀처럼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대치만 했다.

    은근슬쩍 애널라이즈를 써보자, 둘 다 레벨 230대.

    아무리 내가 레벨 250을 돌파해서 스탯의 한계치도 확장됐다고는 하지만, 보너스 스탯은 대부분 매력에 투자했고 전투직업인 월영무사의 레벨은 250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만약 둘이서 진심으로 덤벼들면, 내 전투력으로는 결국 밀리게 되겠지.

    뭐,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싸움을 했을 때의 얘기지만.

    "전쟁 신을 섬기는 자로서의 긍지도 없는 놈들 같으니."

    "오, 뭐야 이 새끼. 진짜 감 좋은데? 저년은 어디서 이런 걸 물어왔지? 그냥 덤볐으면 큰일 날뻔했어."

    내가 성자 스킬을 쓰기 위한 밑밥을 깔기 위해 그런 말을 하자, 강간마놈이 갑자기 이죽이죽 웃으며 그런 말을 해왔다.

    뭐? 무슨 뜻이지?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섹스할 때 나는 특유의 냄새에, 희미하게 다른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내 몸에서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디버프가 걸린 건가? 서둘러서 스탯창을 열어보니, 역시나 모든 스탯이 20% 정도 깎여있는 것이 보였다.

    "바보. 이제 와서 깨달아도 늦었다고!"

    내 표정에서 당혹스러움을 엿봤는지, 강간마가 기세 좋게 외치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진지남도 내게 달려든 순간, 나는 정확히 그 둘만 들어올 범위에 성역 선포를 발동했다.

    "으헉!"

    "으윽?!"

    바보는 누가 바보라는 거야? 이 강간마 새끼는.

    확실히 대단한 디버프지만, 내 매력이 20% 줄어든다고 해서 너희 매력 수치로 내 성자 스킬에 저항이나 할 수 있을 것 같냐?

    무릎을 꿇고 쓰러진 강간마의 머리를, 나는 성자의 손길을 두른 발로 지그시 밟아줬다.

    "끄아흐으으윽!"

    허리를 움찔움찔 떨면서 바닥에서 바동거리는 게 상당히 기분 나빴지만, 그 정도는 관대한 내가 참아주도록 하지.

    "바프라는 대체 언제부터 전쟁 신님을 배신하고 더러운 걸레 신에게 농락되게 된 거지?"

    "그, 그게 무슨 소리냐?! 그보다 이 힘은!"

    아직 성역 선포밖에 받지 않아서 그나마 말대답할 기력이 남아있는 진지남은 내 말에 곧장 반박했지만, 성역 선포의 효과를 참작하더라도 그 목소리는 너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인가. 여자를 그렇게 공수해갈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저 모습을 보고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지?"

    놈이 성자의 힘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놈의 말을 끊고 쓰러져있는 헬레나 쪽에 눈짓했다.

    "네놈들은 타락했다. 그러니 전쟁 신님의 사도로서, 너희에게는 타락한 모습 그대로 욕망에 삼켜져서 죽는다는 형벌을 내려주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진지남의 안면도 성자의 손길이 걸린 발로 지그시 밟아줬다.

    "끄아아악!"

    그렇게 해서, 방 안에는 복상······아니. 혼자 죽은 거니까 자기색정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나? 딸치다 죽은 건 아니지만. 아니. 애초에 죽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쓰러진 두 놈의 몸의 발로 밀어서 구석에 처박아 놓고, 나는 황급히 레이와 헬레나에게 다가갔다.

    "야. 괜찮냐?"

    "시, 시, 싫어! 오지마! 나······."

    "야!"

    레이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지 공허한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헛소리를 중얼거렸지만, 내가 그 뺨을 몇 대 쳐주자 겨우 정신이 들어서는 눈에 초점을 맞추고 날 바라봤다.

    "너, 넌? 왜 여기에?"

    "이게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고 있어. 너야말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 안 했어?!"

    "구, 구하러······온 거야······?"

    왜? 감동했냐? 그렇다고 해서 반하지는 마라. 임자 있는 몸이니까.

    "그럴 리가 있냐. 이 도둑놈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감동을 손수 박살 내주기로 했다.

    감동 브레이커란 바로 날 두고 하는 말이지.

    "도, 도둑?"

    "그래! 내가 준 마스크 어쨌어?! 그게 얼마나 비싼 건데 그걸 들고 튀어?!"

    "저, 저기······."

    설마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인지, 레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상 위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것도 뺏겼던 거냐. 저거 일단 여신님 세계의 물건이라 뺏기면 나중에 그 여파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물건이라고. 이거 진짜 큰일 날 애네.

    얼른 마스크를 회수하고 나서, 나는 힐끔 레이의 안색을 엿봤다.

    음. 저 정도면 이제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겠네.

    아니. 트라우마인지 뭔지는 몰라도, 아까 그 모습은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말이야.

    이런 식으로 가벼운 농담도 섞어주면서,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해줬다는 얘기지.

    나도 장난을 맨날 생각 없이 그냥 막 하는 건 아니라고.

    "음. 좋아. 그래서, 그 여자가 네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헬레나?"

    레이의 안색을 살피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그 몸 위에 쓰러져있는 헬레나를 가리켰다.

    "핫?! 헤, 헬레나! 헬레나! 이거 풀어줘!"

    그리고 그제야 자기 몸 위에 헬레나가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레이는 내가 등 뒤로 묶인 손을 풀어주자마자 황급히 헬레나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 안색을 살폈다.

    솔직히 말해서 헬레나의 모습을 보고 또 트라우마가 자극된 것처럼 발작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럴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죽진 않았으니까."

    자세히 살펴본 건 아니지만, 아까 기절하기 직전까지 신음을 흘렸으니까 말이야.

    "그런 문제가······읏!"

    내 말이 무심하게 들렸는지 레이는 안광을 번뜩이면서 날 노려봤지만, 날 탓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는지 황급히 시선을 피해버렸다.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나도 한 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쟤도 일단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는 건가.

    "간호할 거면 일단 거기에 있는 침대에 제대로 눕히지?"

    "······그럴 거야."

    그 후로 한동안은 헬레나를 간호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뭐, 간호라고 해도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건 레이였고, 나는 그냥 해독제 정도만 찾아냈지만.

    저기에 쓰러져있는 헬레나도 그렇지만, 이 배로 옮겨지고 있는 여자들은 전부 정신을 잃고 있었잖아?

    그 정신을 잃게 한 약이, 아무래도 아까 내가 들이마신 그 냄새와 같은 종류의 것이었던 모양이어서 말이야.

    놈들은 영향이 없었으니 혹시나 해서 그 몸을 뒤져봤더니 역시나 해독제가 튀어나와서, 나와 레이, 그리고 헬레나가 나눠서 복용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약을 먹자 창백했던 헬레나의 안색에 점점 혈색이 돌아오게 되어서, 그제야 레이도 한시름 놓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냐?"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되고 나서, 나는 드디어 여기 온 진짜 목적을 꺼낼 수 있게 됐다.

    "······할 말?"

    "그래. 설마 없다고는 안 하겠지?"

    "······내 사정이 궁금하다는 거지? 알았어. 나중에 여길 벗어나서 전부 얘기해줄게."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순순하게 얘기해주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데.

    이 시건방진 녀석의 지금까지 행동을 생각해보면, 어차피 대충 다 들었으니까 어떤 사정인지 알잖아? 라고 말하고 넘어갈 줄 알았더니.

    "그것도 그거지만. 그 전에."

    생각보다 너무 순순히 말해준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조금 얘기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응?"

    "그 전에 할 얘기 없냐?"

    "그런 게 있었던······아야!"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의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꿀밤을 한 대 놔줬다.

    이건 진짜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렇게 뻔뻔해?

    아, 그런가 엄마는 낳을 때 죽었고 아빠는······왠지 미안해지네.

    아, 아니!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

    "사과해야지 사과!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멋대로 움직이다가 여기에 잡혀있는 거야?!"

    "그, 그건 네가 너무 안 오니까······."

    마치 태어나서 꿀밤 같은 걸 맞아본 적은 처음이라는 것처럼, 레이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는 기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변명을 늘어놨다.

    "오래 걸린다고 했잖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그, 그건······."

    "그건?!"

    "······미, 미안······."

    이제야 사과하는 거냐. 이거 완전히 엎드려 절받기네.

    하지만 이왕 엎드려 절받는 거, 조금 더 해줘야겠어.

    "그리고 감사 인사는?"

    "아까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구, 구해줘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이번에도 다른 말부터 하려고 했던 레이였지만, 내가 안광을 빛내자 곧바로 말을 바꿔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도 애가 아예 눈치가 없지는 않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5화 > 끝

    ⓒ CurtainCall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