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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84화 (968/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4화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레이 바프라는 아직 우리 정체를 몰라. 그리고 사랑에도 딱히 관심 없을 거야. 그러니까 걔가 완전히 우리 편이 되기 전까지 말조심하는 거 잊지 마."

대충 얘기가 일단락된 다음, 나는 실비아와 떨거지들을 데리고 강가로 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을의 항구로 온 건 아니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강기슭이었지만.

조금 귀찮기는 해도 이렇게 우르르 몰려가면서 적에게 들키지 않을 방법으로 이보다 확실한 건 없으니까 말이야.

4계층을 탐험할 때 마스크를 여유분도 구비해놨던 게 지금 와서 보면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었다.

"자, 이거 하나씩 쓰고. 가자. 목적지는 바프라의 배 아래야."

"그렇군요. 배의 바닥에 매달려서 가는 겁니까. 역시 구원 님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내 또 하나의 목적을 깨달았는지, 그렉이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날 칭송했다.

"그런 거지."

그래. 레이를 거기에 놓고 온 건 단순히 레이 바프라의 목표가 그 배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파티의 목적과도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숨어 탈 필요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스크를 쓴 채 그 배 바닥에 매달려서 얻어타고 가면 그만이니까 말이야.

배도 얻어타면서 우리의 흔적까지 완전히 지워버리는, 도망자의 몸으로서는 최선의 항해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나 자기들을 위해 머리를 짜내며 방법을 강구해줬는데도.

"형님. 이 물건은 대체 뭡니까?"

이 두 커플 녀석은 감사나 감탄은커녕 우리 말을 제대로 이해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써보면 알아."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나는 마스크를 놈의 머리에 씌우고 억지로 강에 떠밀었다.

"어? 어?! 형님! 전 수영 못······!"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레이조차도 수영은 할 수 있었는데 넌 도망자라는 놈이 수영도 안 배우고 뭐했냐.

"하아······그렉. 배까지 네가 힘 좀 써줘라."

"네. 구원 님."

어차피 배까지만 가면, 거기부터는 배 아래에 매달려서 팔에 힘만 주고 있어도 된다.

잠깐만 고생하라고 호랑이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다음, 나는 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유리. 넌?"

"저, 저도 수영은······."

그래. 얘는 그래도 수영 못한다는 걸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하네. 그래도 네가 남자친구보다는 낫구나?

신은 부끄러워할 기회도 없지 않았냐고? 억울하면 여자로 태어나던가.

"그럼. 듀크. 너도 좀 부탁한다."

"아······듀크 씨인가요?"

내가 듀크에게도 마찬가지로 부탁하자, 유리는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자 친구가 있는 몸이니 다른 남자가 몸을 만지는 건 싫다는 뜻인가?

하지만 수영을 못하면 어쩔 수 없잖아. 널 끌고 갈 사람은 다 남자밖에 없으니까.

물론 실비아도 있기는 하지만, 유리는 실비아도 남자인 줄 알 테고.

게다가 실비아는 중갑옷을 입고 헤엄쳐야 하니, 그나마 듀크가 제일 적임이었다.

"걱정하지 마. 저놈은 로리······어린 여자가 아니면 서지도 않는 중증의 변태니까."

"구원 님! 너무하십니다!"

유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듀크가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화를 냈다.

물론 전혀 무섭지 않았지만.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냐?"

"네!"

뭐? 너 지금 뻔뻔하게 틀린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야. 넌 진짜 양심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 지금까지 그렇게 자기 취향을 드러내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최근 진지하게 생각한 겁니다만! 딱히 여자가 아니라도 귀여우면······."

"으악! 넌 진짜 씨······가까이 오지 마!"

어쩌지 이 변태 놈이 쓸데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더라니!

폼 안 나게 실비아 뒤로 숨어버렸잖아!

뭐, 실비아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뒤에 있는 나를 필사적으로 지켜주려고 했지만.

실비아야. 진짜 너밖에 없다.

"아, 괜찮습니다. 지금의 구원 님은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어차피 반지도 써주지 않을 테······아야!"

하지만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면서, 저 광기의 로리쇼타콤은 정색하며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어째서 네가 더 깬다는 표정을 짓는 건데, 이 호로 잡놈아!

"뭐, 아무튼 그런 거니까. 안심해."

듀크의 머리에 진심 펀치를 한 방 날려주고, 나는 유리에게 미소를 지어줬다.

"네, 네에······."

물론 그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응. 이해한다. 나 같아도 저런 대화 다음에 안심하라고 해봤자 전혀 안심이 안 될 것 같아.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신은 그렉이, 유리는 듀크가 손을 잡아끌면서 우리는 깊게 잠수한 상태로 바프라의 배를 향해 헤엄쳐갔다.

여관에서 마을 밖으로. 마을 밖에서 멀리 떨어진 강기슭으로. 그리고 강기슭에서 여기까지.

너무 빙 돌아오느라 레이를 두고 온 지 상당히 시간이 흐르는 했지만, 배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정박해 있었다.

창고에 남은 여자들이 몇 없었으니 그 시간이면 충분히 다 옮기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아직 여기에 있다는 건 역시 레이를 찾고 있기 때문이겠지.

덕분에 무사히 배 아래로 도착한 우리였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다들 도착하자마자 그 문제를 깨달았는지, 대표로 그렉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구원 님. 그 레이······."

으악! 호랑이 얼굴 들이밀지 마! 아무리 마스크로 얼굴 사이가 가로막혀 있어도 그렇지!

물론 그렉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황급히 바람의 정령으로 공기 방울을 만들어 우리의 얼굴 사이를 이었다.

여기엔 정령술이 없는 모양이니 되도록 신과 유리 앞에서 이런 건 쓰지 않는 게 좋겠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지.

후우. 우리 애들이랑 4계층을 돌아다닐 때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더러운 기분이었어.

그리고 쓰레온. 고소하단 표정 짓지 마라. 그래서 네가 쓰레온인 거야. 넌 나중에 안 당할 것 같지? 두고 보자.

뭐, 아무튼 지금은 저런 쓰레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바로.

"레이가 없군."

그래. 이게 제일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배를 잘못 찾아와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이 배가 맞았다. 지도상에 표시된 위치도 일치하고 있고.

그 녀석. 그렇게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혹시 내가 너무 오래 걸려서, 자기를 버리고 간 줄 알고 참다 참다 행동에 나서버린 건 아니겠지? 젠장. 그렇다면 최악인데.

어쩌지. 배 안으로 다시 잠입해봐야 하나?

아니. 하지만 레이가 찾고 있는 그 헬레나라는 사람이 꼭 배에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수상해서 따로 빼뒀다고 했으니, 허를 찌르기 위해 마을의 다른 장소에 숨겨뒀을 가능성도······.

"아니! 구원 님! 배가!"

잠깐 생각에 잠겼던 나였지만, 아무래도 이 망할 배는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아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거니,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잘 된 건 아니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중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거니까.

그래. 우리 위에 있는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이 배가 움직인다는 것은, 이곳에서의 볼 일이 모두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여자들을 배에 싣는 것은 물론, 레이의 생포까지도.

"칫. 하는 수 없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황급히 텐트용 못과 망치, 그리고 밧줄을 꺼내 그렉에게 건넸다.

아무리 우리가 레벨이 높은 모험가라고 하더라도, 배가 언제까지 이동할지는 모르는 만큼 계속 매달려 있을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

이걸로 배 아래에 밧줄을 연결하고 몸을 고정해두면, 신과 유리까지 무사할 수 있겠지.

"이걸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지? 그럼 난 잠깐 배에 갔다 올게."

"호, 혼자서 말이십니까?"

그렉은 반사적으로 내가 건넨 물건들을 받기는 했지만, 나 혼자 행동에 나서는 건 반대하는 모양이었다.

"왜? 못 미덥냐?"

"그럴 리가요! 하지만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이 녀석은 사람이 비꼬면서 말해도 조건 없는 신뢰를 보내니까 은근히 상대하기 귀찮단 말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까도 혼자서 다녀왔으니까. 그리고 무작정 들이댈 생각도 없고. 일단 은신하면서 상황을 본 다음 행동할지 말지 정하도록 할게."

뭐, 아까 다녀왔다고는 해도, 아까하고는 상황이 많이 다르겠지만.

괜히 이놈들은 안심시킨다고 시간이 더 끌리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서, 나는 대충 그렇게 말하고는 실비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기다리고 있어."

"네에······."

이번만큼은 실비아마저도 내 결정이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은신이 가능한 놈은 나밖에 없으니까.

미안한 마음을 담아서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서, 나는 은신과 함께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 배 위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배 위의 모습은 아까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짐은 다 실었고 배도 떠나는 마당에 더 숨어서 행동할 필요도 없다는 듯, 군데군데 보이는 창문에서는 환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래선 그림자 이동이나 그림자 은신은 봉인되는 거나 마찬가지겠네.

그래도 은신 자체는 아직 쓸 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 은밀 행동은 가능하겠지만, 골치 아파졌네.

그나마 희망적인 점이 있다면, 아까만큼 경비가 삼엄하지는 않다는 점일까?

어차피 할 일은 다 끝났고 이동 중인 배 위에서는 습격당할 일도 없으니, 밤이 늦은 만큼 잘 사람은 자러 간 건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그 풀어진 경계심을 이용해서 잠입 액션을 찍어보실까.

즐겨하는 장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입 액션 게임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게임 경험을 통해 얻은 잠입 액션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바로.

"끄어억······."

쫄면 안 된다는 점이다.

혹시 들키는 건 아닐까? 그렇게 겁을 먹고 행동을 망설이면, 들키지 않을 상황에서도 들키게 된다.

게임에서 배운 지식을 현실에 적용하지 말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여신님이 만든 사실 같은 AI의 게임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훗. 오늘도 불쌍한 영혼 하나를 천국으로 보내버리고 말았군."

나는 자신의 은신 능력을 믿고 재빠르게 갑판 위를 이동하면서 방해되는 녀석들을 제압해나갔다.

이런 곳에 경비병이 쓰러져있으면 더 빨리 들키지 않겠냐고? 괜찮아. 제압한 녀석은 이렇게.

첨벙!

물에 던져버리면 그만이니까. 이게 바로 선상 잠입 액션의 묘미 아니겠어?

게다가 내 성자 스킬로 제압되면서 지려버린 바지가 물에 씻겨나가며 흔적까지 사라지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흔적이 문제가 아니라 죽는 거 아니냐고? 에이. 설마. 바다도 아니고 강인데.

게다가 쾌감으로 잠깐 기절한 거니, 물에 빠지는 순간 정신도 바로 차릴 테고, 뱃사람인 만큼 헤엄 정도는 칠 줄 알 테니까 분명 괜찮을 거야!

만약 괜찮지 않다면······그 뭐냐. 명복을 빕니다.

강을 향해 가볍게 합장을 해주고 나서, 나는 문을 열고 드디어 배 안으로 들어갔다.

창밖에서 봤던 대로, 배 안도 역시나 환하게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래도 처음 잠입했을 때처럼 천장에 붙어 다니면, 어느 정도 은밀성은 확보되겠지.

들키면 뭐, 그때 가서 제압하면 그만이고.

그러면 우선 제일 먼저 가야 할 곳은······.

아까 레이를 따라 이동하면서 배 내부의 구조는 어느 정도 알아뒀기 때문에, 나는 맵을 둘러보면서 레이가 잡혀있을 만한 곳을 찾아봤다.

아마 아까 항구 쪽에서 얘기하는 걸 봤던, 그 대장 격 두 놈이 있는 곳에 있겠지?

그런 놈들은 다른 일반 선원과 달리 혼자 따로 방을 쓰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맵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럴듯한 방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이상한데. 왠지 가면 갈수록 주변을 돌아다니는 놈들이 줄어들고 있지 않아?

그리고 그 방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는 왠지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한밤중이다 보니 다른 곳도 보초병 몇 말고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이 근처는 유독 더 사람이 없는 느낌이었다.

아예 은신을 풀고 걸어 다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묘한 정적은 목표로 했던 방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돼서, 결국 나는 아무런 무리 없이 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우선은, 벽에 구멍이라도 뚫고 안의 상황을 엿볼까.

그냥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렇게 확인하는 게 더 안전하겠지.

물론 벽에 구멍을 뚫어도 방 안에 누가 있으면 들키기는 하겠지만, 그놈이 밖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여는 순간 제압할 수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단검을 하나 꺼내서 벽에 작은 틈을 내려고 한순간, 갑자기 방문이 덜컥하고 열렸다.

"함부로 구멍을 뚫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비싼 방음 설비가 되어있는 방이라서 말이지."

그리고 마치 내가 밖에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문을 열고 나온 놈이 차분한 말투로 그렇게 말을 건네왔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런 놈의 목소리 따위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흐읏! 하응! 흐아읏!"

활짝 열린 문 너머로, 그런 여성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 미친 새끼들이 설마······!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4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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