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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83화 (967/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3화 >

    "실례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한바탕 전투가 벌어질 것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예상외로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우리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고 있는 경비병을 보면서, 나는 잠깐 조금 전에 자신이 얼마나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해냈는지 다시금 생각하며 흐뭇한 감상에 젖었다.

    제일 처음 온 감시병이 실비아한테 제대로 손도 못 써보고 제압당하는 걸 보고, 뒤늦게 몰려온 감시병들도 우리에게 섣불리 덤벼들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비아한테 명령을 내린 나는 뒤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으니까 말이야.

    부하가 저 정도 실력자인데 뒤에 있는 놈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아마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한 거겠지.

    "거기!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우리를 못 본척할 수도 없어서 놈들은 우리를 둘러싼 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대치했고, 그러고 있는 사이에 분대장 격으로 보이는 놈이 등장한 거다.

    "고작 두 놈을 상대로 겁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놈은 경비병이 제압되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는지 겁도 없이 우리한테 덤벼들었고, 역시나 실비아한테 쪽도 못 써보고 제압당했다.

    "흠.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가는 잔챙이가 계속 꼬일 것 같군. 실비아. 일단 본보기로 그놈의 대가리를 으깨···."

    "끄으윽! 어르신! 말로 하시죠!"

    그리고 내 무감정한 말과 동시에 실비아가 진짜로 분대장의 머리를 무릎으로 짓누른 순간, 놈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순식간에 변했다.

    바프라는 무협으로 치면 사파에 속하는 곳이니까 말이야.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면 같은 소속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죽여버리는 놈도 꽤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해본 말이었는데, 상상 이상의 효과였다.

    그나저나 누가 어르신이냐. 누가. 설마 그 얼굴로 나보다 어리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흠. 유언 정도는 들어주지. 지껄여봐라."

    "저, 저희는 바프라 님의 명령으로 사람을 찾는 중이었습니다!"

    내가 실비아에게 턱짓해서 실비아을 잠깐 멈추게 하자, 놈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필사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네가 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는 놈이라도 바프라 님의 이름을 들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이걸 어쩌나. 난 그런 놈 이름 들어도 전혀 무섭지 않은데.

    "특징은?"

    "네, 네?"

    "찾고 있는 사람의 특징 말이다!"

    "그, 그것이···!"

    내가 전혀 기죽지 않고 윽박지르자, 놈은 이게 아닌데? 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레이 바프라를 찾고 있다는 건 비밀로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비아."

    "끄아아악! 용서해주십시오! 기밀 사항입니다! 이것만큼은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짜식. 그래도 제법 입은 무겁네.

    다시 한번 실비아의 무릎에 머리를 짓눌리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놈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나는 아예 쪼그려 앉기까지 했다.

    "좋아. 그럼 이거 하나만 묻자."

    "네, 넵."

    "그 찾고 있는 놈이라는 특징이, 나랑 비슷해?"

    "저, 전혀 다릅니다."

    잘 보라고 얼굴까지 들이밀면서 말하자, 놈은 내 얼굴을 자세히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야 그렇겠지. 피부도 검지 않고, 애초에 여자도 아니니까.

    "그런데 아무 상관 없는 나한테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 새끼가 덤벼들었다고?"

    "그, 그것이···놈에게 협력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게 난 줄 알았다고?"

    "그, 그렇습니다."

    쳇. 역시 일이 귀찮게 됐군. 앞으로도 레이하고 같이 다니려면, 협력자가 있다고 알려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뭐, 엎질러진 물이니 이제 와서 불평해봤자 소용없는 짓이지만.

    우선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부터 생각하자.

    "그럼 실비아가 그놈이랑 특징이 비슷하다는 말이겠지?"

    "저, 전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마치 레이와 협력자가 같이 행동하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질문했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라는 건 한 번 고정 관념이 생기면 의외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법이라서, 놈은 실비아를 힐끔 보더니 곧바로 우리에게 사과했다.

    실비아는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가슴···아, 아니. 몸집만 보더라도 레이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말이야.

    "죄송해? 뭐가?"

    "과, 관계없는 분을 붙잡아 둔 것입니다."

    "붙잡아 두기만 했어?"

    "그, 그것이···덤벼들어서 죄송···."

    "그래. 그럼 유언은 끝이지?"

    "히이익!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사과하지 마라. 나도 진짜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너희같이 수틀리면 죽이고 보는 놈들이랑 다르게, 나는 자애로운 여신님의 사자시거든.

    그러면 슬슬 우리도 이 자리를 벗어나 볼까. 조금 전에 레이는 협력자와 같이 행동하고, 덤으로 그 협력자가 하나뿐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으로 볼일은 끝났으니까.

    뭐, 그 볼일도 즉흥적으로 생각해낸 거였지만.

    아, 그러고 보니 즉흥적이라고 하면···좋아.

    "후우. 뭐, 좋아. 실비아. 풀어줘."

    "어, 어어?"

    내가 일어나며 말하자 우리 실비아는 곧장 놈을 풀어주고 내 한 발자국 뒤로 이동했다.

    그런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면서, 나는 팔을 주무르며 일어나는 분대장 놈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어두운 밤에서도 찬란하게 불을 밝히며 빛나는 이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에 감사해라."

    "네, 네?"

    야. 풀어줬는데 그 당황스러운 표정은 뭐냐? 뭐, 갑자기 이런 말을 들이면 나 같아도 웬 미친놈이 떠드나 싶겠지만.

    "이런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을 피로 물들이는 운치 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놈의 표정에 신경 쓰지 않고, 잔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내가 갑자기 이런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건 정신이 나가서 그런 게 아니야. 물론 내면에 잠들어있던 중2병이 갑자기 폭발해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고.

    난 단지 누명을 씌우고 싶을 뿐이야.

    어차피 한 번 누명을 쓴 거니까, 한 번 더 쓴다고 해서 문제없잖아?

    문제 있다고? 뭐, 아무렴 어때. 내 문제도 아닌데.

    그 중2병도 후드로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 가는 턱선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를 생각해봤을 때 아마 생긴 건 꽤나 준수하게 생겼을 거다.

    물론 그래 봤자 나한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약자태세로 매력 수치를 낮추고 있는 지금의 나 정도 수준은 되지 않을까?

    게다가 만약 우리 뒤를 제대로 밟고 있다면 머지않아 여기 또 들르기까지 할 테니, 누명을 씌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인재가 없었다.

    그러니까 탓할 거면 그때 식당에서 근육 덩어리를 우리 테이블에 두 번이나 던졌던 자신을 탓하라고.

    "그, 그렇습니까···."

    "그래. 너희도 엄한 사람을 붙잡아서 이 풍치를 더럽히지 마라."

    "네, 넵!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의 그 90도로 우리에게 인사하는 경비병의 모습이 완성됐다는 얘기다.

    음.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난 역시 임기응변 능력은 타고난 것 같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세계에 떨어져 놓고도 지금까지 잘 살아 있는 거지만. 크하하.

    "음."

    경비병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나는 실비아를 대동하고 그대로 마을을 빠져나갔다.

    "형님! 무사하셨습니까!"

    그리고 삼인방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말했던 이정표를 향해 조금 걷자, 신과 유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일대의 감시병들을 전부 붙잡아두고 있는 동안 무사히 마을을 빠져나왔던 모양이다.

    "당연하지. 날 뭐로 보고. 저런 잔챙이들. 전부 한꺼번에 덤벼들어도 상대도 안 돼."

    허세가 아니라 진짜로. 성역 선포 한 방이면 다들 다리 사이를 부여잡고 쓰러질걸?

    마신 부활만 아니었으면 아예 싹 다 천국을 보여주는 건데.

    신은 내 말을 조금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지만, 딱히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아무튼 두 커플과도 합류해서 같이 삼인방에게 말해뒀던 곳으로 향하니, 다들 무사히 도착했는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삼인방의 모습이 보였다.

    쓰레온 녀석, 저 둘이랑 같이 오래 지내더니 이제 딱히 고통받는 모습도 없이 잘만 얘기하네.

    "앗, 구원 님! 무사하셨습니까?"

    "어, 그래. 너흰 괜찮았냐?"

    "네. 저희는 별문제 없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저렇게 많은 경비병이 돌아다니다니. 무슨 일입니까?"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는데, 정말로 별문제 없었던 모양이다.

    쳇. 우리처럼 경비병한테 시비도 안 걸린 건가.

    아니. 그야 우리는 내가 일부러 시선을 모으려고 처음부터 창을 밀어내며 거칠게 대응해서 그런 점도 있겠지만.

    "그래. 숨어 탈 배를 알아보려고 조금 정탐을 나섰는데, 거기서 예기치 못한 인물과 만나서 말이야."

    "이런 곳에서···예기치 못한 인물입니까?"

    어차피 저희는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듀크가 되물었다.

    뭐, 지당한 의문이다.

    "그래. 듣고 놀라지 마라. 바로···레이 바프라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오늘 최고의 성과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론 삼인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애초에 얘들한테는 기대도 안 했다.

    내가 기대하는 건 두 커플뿐. 자, 어서 놀라!

    "저···형님? 레이 바프라라는 사람은 대체? 어째서 바프라 님···바프라 놈과 같은 성을?"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신과 유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잠깐만. 너희도 레이 바프라를 모른다고?

    바프라를 적으로 보고 님에서 놈으로 바꾸는 센스는 마음에 들었다만, 어떻게 자기가 살던 곳 보스의 딸 이름도 몰라?

    "바프라에게 가족은···아, 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 그렇군!"

    내가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자 둘은 이마를 맞대고 고민하더니, 유리가 먼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자기들끼리만 알지 말고 뭔가 깨달았으면 좀 말해라.

    "바프라는 지독한 순혈주의자라서, 아이를 낳을 여자도 같은 다크 엘프 여성 하나만 골랐다고 해요. 하지만 다크 엘프는 아이를 가지기 힘든 체질이라 좀처럼 후계자를 가지지 못했는데, 30년 전쯤 겨우 아이를 하나 가졌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하지만 태

    어난 아이는 여자였고 여자는 출산 후 사망했다고 하죠."

    그 녀석, 다크 엘프였구나. 어쩐지 피부가 검더라니.

    내가 아는 여자 중 제일 피부가 검은 건 앨리시아였는데, 그 엘리시아도 밀크커피 수준이었다면 레이는 그보다도 더 검었으니까 말이야.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러면 딸은 있는 거잖아. 왜 가족이 없다고 그래?"

    "그것이, 유일한 다크 엘프 여성을 잃어서 순혈 다크 엘프 후계자를 가지지 못하게 된 바프라는 미쳐 날뛰며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다 죽여버렸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딸의 소문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 당연히 딸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 줄 알

    았습니다만, 혹시 그때의 그 아이가 살아있다면···."

    과연. 그래서 가족이 없는 줄 알았다는 건가.

    게다가 30년 전쯤이면 이 녀석들이 태어나기도 전 얘기니, 얘들도 누구한테 전해 들은 게 전부겠지. 그렇다면 기억해내는 데 시간이 걸린 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얘기를 듣고 나서 아까 레이와 숨어서 들었던 대장 격 둘의 얘기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머릿속에서 모든 정황이 퍼즐이 딱딱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레이가 가출한 이유. 레이가 바프라를 그 남자라고 부르며 끌려가길 두려워하는 이유. 그리고 대장 격 중 경박한 쪽이 바프라의 일이 끝나면 자기도 레이를 따먹을 수 있을 거라고 한 말에서, 바프라의 일이 뭔지 까지도.

    그러니까 바프라는 애초에 레이를 딸 취급하지 않은 거다.

    바프라 본인이 자기한테 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귀한 집 자식이라고는 해도 결국은 아직 유망주 수준의 아무것도 아닌 이 녀석들이 그 딸의 존재를 몰라도 이상할 건 없지.

    "잠깐만요. 그런데 그 딸을 지금 여기서 만났다는 얘기는···."

    "그래. 너희와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레이 바프라 역시도 도망 중이라는 얘기지. 잘만 흘러가면 바프라를 무너뜨릴 최강의 병기를 손에 넣게 되는 걸지도 몰라."

    게다가 이쪽의 패는 레이 바프라 하나뿐만이 아니니까.

    배에 실린 수많은 여자를 가리키면서, 선원들은 분명 바프라에게 바칠 진상품이라고 말했다.

    순혈주의라서 순혈 다크 엘프가 아닌 여자와는 애를 가질 생각도 안 한다는 놈이, 그렇게까지 많은 여자를 필요로 한다니.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슬슬 구린내가 느껴지지 않아?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3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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