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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81화 (965/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1화 >

    새로운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캐물을 때가 아니었다.

    우선 하나부터 차근차근 해결하자.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그냥 네 사정이 궁금하다고. 처음부터 계속 그렇게 말했잖아?"

    이 장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데다가 혐오감까지 가지는 건 나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황급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바프라의 이름을 쓰면서 바프라의 수하를 거침없이 해치는 녀석.

    그 속사정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라면, 앞으로 오래 얼굴 보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히 지금부터 사이가 나빠질 필요는 없지.

    "조금이라도 좋으니 네 사정을 말해줘. 내 호기심을 충족해주면, 나도 그 헬레나라는 사람을 구할 방법을 알려줄게.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아예 같이 도와줄게."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레이는 이쪽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날 바라봤다.

    "그러니까 너무 뚫어지게 보지 말래도. 너무 잘생겨서 자기도 모르게 보게 되는 건 나도 이해하지만."

    분위기를 잡고 있었으면 더 믿음을 심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천성이 그런 녀석이 아니라서 말이야.

    레이가 계속해서 얼굴을 빤히 보자, 나는 반사적으로 또 농담을 던지고 말았다.

    뭐, 상관없잖아. 어차피 이 녀석도 내가 아니면 믿을 구석도 없고.

    "너. 아까부터 계속 자기가 잘생겼다고 말하는데."

    "응?"

    왜? 그게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얼굴 가리고 있어서 안 보여."

    아차! 그러고 보니 그랬지!

    그럼 아까부터 슬쩍슬쩍 기회 댈 때마다 던졌던 매력적인 스마일도 다 헛짓거리였다는 얘기인가!

    내가 머리를 움켜쥔 채 좌절하고 있자, 레이는 ‘이 녀석 정말 믿어도 되는 건가?’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자, 잠깐 헷갈렸을 뿐이잖아! 믿어도 된다고!

    "그 방법이라는 건, 확실한 거겠지?"

    내 속마음을 알아줬는지, 아니면 그냥 믿을 구석이 나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믿어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레이는 내게 협력을 구하기로 정했는지 마지막으로 그렇게 내게 확인을 했다.

    "그래."

    "······친구다."

    내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레이는 정말 대답해도 좋은 건지 스스로 확신이 없다는 듯 잠깐의 침묵 끝에 그렇게 툭 내뱉었다.

    "헬레나라는 사람이?"

    "그래."

    "설마 그걸로 얘기 끝이라는 건 아니지?"

    "······날 감싸다가 대신 잡혀갔다."

    다시 생각해도 분통이 터진다는 것처럼, 레이는 손에 쥔 단검을 더욱 꽉 움켜쥐면서 분노로 눈을 불태웠다.

    "‘감싸다’라고? 바프라의 수족한테?"

    "······그래."

    "너도 바프라지?"

    "······그래."

    아니. 야.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끝내지 말라고.

    보통 이렇게까지 말하면, 왜 바프라가 같은 바프라 성을 쓰는 널 잡아가려고 하는지 얘기해야 할 것 아니야.

    "다시 말해서 넌, 바프라랑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뜻이지?"

    반응을 보아하니 그에 관한 일은 절대 입에 담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일단 확실히 알아야 할 것부터 알아내기로 했다.

    "당연하다! 누가 그런 남자랑!"

    살짝 화까지 내며 대답하는 레이였지만, 그 목소리와 달리 검은 암살자 복에 감싸인 그 몸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분노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참고로 알고 싶은데, 얼마나 사이가 안 좋아? 설마 죽이고 싶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왜? 이제 와서 겁먹었나? 하지만 약속은 제대로 지켜줘야겠어.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는 쥐고 있던 단검을 슬며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니까 넌 왜 모든 일을 그렇게 폭력으로 해결하려 하는 건데?

    그리고 아까 나한테 제압당했던 건 벌써 까먹었어? 네가 그래 봤자 난 하나도 안 무섭거든?

    "설마. 오히려 네가 바프라를 그정도로 싫어하진 않는다고 했다면, 그게 더 문제였어. 이제 와서 뭘 숨기랴. 나는······."

    "여기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진짜냐. 그렇게 티 났어?

    뭐, 바프라의 수족들을 처리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힘을 보탰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대충 사정은 알았어.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 일을 도와주는 것치고는 착수금이 너무 짠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만큼 사례금이 크기를 기대하지."

    어쩌면 오래 얼굴 보고 지내게 될 사이일지도 모르니, 나는 일단 얘기를 이쯤에서 마치기로 했다.

    "그러면 빨리 방법을 말해라."

    오래 보고 지내려면, 언제 한 번 저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만.

    "알고 있어. 그리 어려운 방법도 아니야. 단순히······잠깐만."

    "헛짓거리하지 말고······으읍."

    "쉿."

    나는 한 손으로는 레이의 입을 틀어막고 나머지 한 손은 그 허리에 감은 다음, 근처에 쌓아 올려져 있는 상자와 벽 사이에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자 근처에서 들리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미끼를 물었군."

    "그래. 양쪽이 모두 털렸어. 틀림없어."

    양쪽이 모두 털려? 설마 우리 얘기를 하는 건가?

    "어쩐지 그년이 유독 수상하다 싶었지. 따로 빼둔 게 정답이었군."

    설마 헬레나를 말하는 건가?!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던 게 그냥 엇갈려서 그랬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따로 빼놓고 있어서 그랬던 거야?!

    품 안에서 레이의 몸이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팔에 힘을 줘서 그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고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겨우 여자 하나에 경비병 전원이 당하다니. 아무리 바프라님의 딸이라고 해도, 그정도 실력은 없었을 텐데? 너도 그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미끼를 물기 쉽게 일부러 경계까지 허술하게 하고 맞이해줬잖아."

    어?! 딸?! 지금 딸이라고 했어?!

    아니. 그야 혈연관계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 봤자 친척. 아무리 가까워도 4촌쯤 되는 관계가 아닐까 했는데. 설마 딸이었다니!

    얘 바프라 얘기 나올 때마다 그 남자라고 칭했잖아! 아빠한테 그 남자라고 하지 말라고! 헷갈리잖아!

    ······혹시 나, 철없는 보스 딸내미의 가출 소동에 말려든 건 아니겠지? 내가 기대한 건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 그래. 아닐 거야. 얘도 아까 바프라한테 엄청나게 적개심을 표출했잖아! 잡혀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불쌍할 정도로 몸을 바들바들 떨기도 했고! 설마 진짜 가출 소동이겠어?

    만약 진짜로 그런 거라면, 바프라의 인간이 아니라고 밝혀버린 내가 더 위험해지잖아.

    경우에 따라서는 이 녀석을······.

    "그래. 그 여자 혼자서 그 경비병을 모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 어쩌면, 아니. 분명 조력자가 있을 거야."

    "그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여자한테? 그것도 우리 바프라의 영내에서?"

    레이야. 너 버르장머리 없는 건 유명한 모양이구나?

    레이를 내 손으로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 머리가 복잡해졌던 나였지만, 다행히도 얘기를 계속 들어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말투가 평범한 보스의 딸 얘기를 하는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콩가루 가족이길래······뭐, 그것도 차차 알게 되겠지.

    "같은 여자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조력자가 하나 나타났잖아. 그런 특이 케이스가 또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 혹시 알아. 몸으로 어떤 멍청한 놈 하나를 유혹해냈을지."

    "확실히. 몸 하나는 끝내주니 말이야. 게다가 보란듯이 속살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니고. 젠장. 바프라님의 일이 끝나면 나도 한 번 따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르르.

    수치심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내 품 안에 있는 레이의 몸이 또 한 번 바르르 떨렸다.

    "말조심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미안. 미안. 그년 몸을 생각하니 좀 꼴려······알았어. 조심하면 되잖아. 조심하면. 하핫."

    그나저나 이거 점점 얘기가 묘해지는데.

    일단 이 녀석이 평범한 보스 딸 취급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지만, 그 외에도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섹스를 거의 금기처럼 생각하는 이 세계의, 그것도 하는 말을 들어보면 상당히 엘리트일 것 같은 놈들이 대놓고 섹스의 쾌락을 탐한다니.

    게다가 저 녀석, 분명 나도 따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도. 그 말은 즉, 나 말고도 누군가 먼저 레이를 따먹을 거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지금 대화 내용으로 유추해보자면 그 누군가는 자연히······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진다. 레이가 바프라를 그 남자라고 칭하며 증오하고, 잡혀가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것까지 전부.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진짜로?

    품 안에서 계속 몸을 바들바들 떠는 레이를 내려다봤지만, 이 자세에서는 그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감정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뭐, 얼굴이 보이는 자세라도 복면에 가려져서 눈밖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너, 혹여나 허튼 생각을 하는 거라면······."

    "알고 있다니까. 괜히 먼저 따먹었다가 임신이라도 하면 바프라님한테 맞아 죽을 테니까. 나도 그정도 분별력은 있다고."

    "······뭐, 좋아. 아무튼 그 여자는 분명 이 마을 어딘가에 있을 거다. 물건의 운반도 오래 지체할 수는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조금 소란을 일으키더라도 오늘 밤 중에 찾아낸다."

    "드디어 쥐새끼같이 소곤소곤 움직이는 것도 끝인가. 좋았어. 어차피 숨을 데도 마땅히 없을 테니 다 뒤집어엎다 보면 어딘가에서 튀어나오겠지."

    "적당히 해라."

    "헹. 그건 약속 못 하겠는데."

    우리가 몸을 숨기고 있는 상자 더미 근처를 스쳐 지나간 놈들은, 그대로 배의 갑판 위로 뚜벅뚜벅 올라가 모습을 감췄다.

    "후욱······후욱······후욱······."

    그리고 나서 레이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팔에 힘을 풀자, 레이는 황급히 내 품을 벗어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놈들의 말을 들으면서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나로서는 완전히 알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고 대충이나마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우선 몸을 숨기자. 수영은 할 수 있지?"

    뭐라고 위로라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정도 모르는 내가 위로랍시고 말을 해봤자 역효과만 나겠지.

    나는 섣불리 조금 전 얘기를 건드리는 대신, 지금부터 해야 할 일에 주목하기로 했다.

    "······!"

    그러자 레이는 의외라는 듯,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두 눈을 크게 뜨고 날 쳐다봤다.

    왜? 지금까지 계속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컨셉으로 밀고 갔으니까, 조금 전 얘기도 일일이 캐물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야 언젠가는 사정을 전부 알아낼 거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무리 나라도 분위기 정도는 읽을 줄 안다고.

    "왜? 수영 못 해? 아까는 잘하는 것 같더니."

    "큭. ······할 줄 안다."

    내가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고 그렇게 말하자, 레이는 애써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로 짧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가자."

    나는 레이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상자 그늘에서 빠져나가, 그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헤엄쳐서 놈들이 타고 있는 배의 아래로.

    설마 저 녀석들도 우리가 자기들 배 아래에 숨어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말이야. 여기에 숨어 있으면 일단 들킬 일은 절대 없을 거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지.

    물론 사람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는 사소한 문제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이렇게 4계층을 탐험할 때 쓰던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고.

    나는 인벤토리에서 마스크를 두 개 꺼내서 하나는 내가 쓰고, 나머지 하나를 레이에게 직접 씌워줬다.

    그리고 서로의 마스크와 마스크를 맞대서 대화를 시도했다.

    딱히 키스하려는 것도 아닌데 자세가 자세다 보니 괜히 찔리네.

    게다가 레이도 움찔하면서 고개를 뒤로 빼니까 괜히 더 그런 것 같잖아.

    얘들아. 나 믿지? 바람 피는 거 아니야!

    "뭐해? 이제 숨 쉴 수 있어."

    나는 레이의 머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 뒷머리를 잡고 앞으로 당긴 다음, 마스크를 맞대고 말을 건넸다.

    "하아······하아······이, 이건?!"

    역시나 이 세계는 이런 물건도 없었는지, 레이는 마스크를 쓰고도 숨을 참고 있다가 내가 지적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방법이 있다고.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나 혼자 밖에 좀 다녀올게.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올 테니까 섣불리 혼자 행동하지 말고 꼭 기다려."

    놀라는 레이에게 차분히 설명하는 대신, 나는 그렇게 단단히 말해두고 홀로 물 밖을 향했다.

    사정은 다르지만, 우리도 일단 쫓기는 몸이니까 말이야.

    저 녀석들이 진짜 레이를 찾겠다고 마을을 들쑤시고 다니면, 여관에서 편히 쉬고 있는 실비아와 떨거지들도 위험해지기 마련이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1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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