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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80화 (964/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0화 >

    "그러면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당장에라도 창고에 쳐들어가려고 하는 레이의 어깨를 잡아서 멈추고, 나는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도우라고는 했지만 거기까지 하라고는 하지 않았어. 은혜라도 입히고 싶은 건가? 그럴 생각이라면······."

    "그냥 나 혼자 가는 게 편하니까 그런 거야. 안에 어느 정도의 실력자가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 너처럼 은신도 제대로 못 하는 애랑 같이 갔다가 안에 있는 놈들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되느니, 차라리 나 혼자 잠입해서 한 명씩 조용히 처리하는 게 더

    간편하고 빨라."

    "······."

    레이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 안광을 빛내기는 했지만,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조용히 시선을 돌려버렸다.

    "애초에 내가 너한테 은혜를 입혀서 뭐하겠냐. 보아하니 제대로 된 옷도 못 입을 정도로 빈털터리 같은데."

    "제대로 입고 있다!"

    그런 레이에게 가볍게 핀잔을 던져보자, 역시나 이런 식의 공격에는 내성이 없는 건지 레이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게? 대충 봐도 천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이건 원래 이런 의상이다!"

    "······노출증?"

    욱해서 말하는 레이에게, 나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려줬다.

    "누, 누, 누······!"

    "뭐, 아무렴 어때. 그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수치심에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레이를 내버려 두고, 나는 곧장 은신을 사용해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훗. 바보라고 했던 보답이다.

    아무튼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서 간단히 창고 안으로 침입한 나는, 일단 안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쭉 훑어봤다.

    역시나 경비병의 숫자는 총 6명.

    배의 창고보다 숫자는 조금 많았지만, 대신 레벨은 조금 낮았다. 기껏해야 배 위에서 지시를 내리던 경비병들과 비슷한 수준일까?

    게다가 전원 숨어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까지.

    아니. 숨어있지 않았던 게 아니라······.

    "다음이 끝이지?"

    "그래. 대장도 너무 고지식하다니까. 아무리 기밀이 최우선이라고 해도 그렇지, 일꾼 정도는 좀 더 고용해도 되잖아."

    짐 나르기가 거의 다 끝나가서 풀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짐을 나르는 선원이 적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건가.

    이런 밤중에 불빛도 밝히지 않고 경비 인원도 최소한으로 하면서, 게다가 사람을 저런 나무통에 집어넣어서는 음식이나 식수와 같이 나르는 것으로 눈속임까지 하다니.

    그만큼 뒤가 구린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이거 점점 더 파헤쳐볼 이유가 늘어나는 느낌인걸.

    나는 손에 성자의 손길을 최대 파워로 두른 후, 그대로 경비병 하나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윽!"

    안그래도 레벨과 매력 차이가 심하게 나는 경비병이 내 성자의 손길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는데, 심지어 여기 놈들은 다들 섹스 경험조차 변변찮은 놈들이었다.

    때문에 내 손이 닿자마자 경비병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쓰러져버렸다.

    짜식.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겨우 이거 한 방에 기절하면 나중에 여자는 어떻게 만나려고 그러냐.

    "뭐지?! 무슨 일이야?!"

    다들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이 쓰러지자 나머지 경비병들이 한껏 경계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는 했지만, 그것 역시도 내게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창고 역시도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불이 완전히 꺼져있었으니까 말이야.

    경비병 전원이 전부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들어와. 다 처리했어."

    혹시 살려둔 걸 보고 레이가 죽이려 들면 귀찮으니 기절한 경비병들을 구석이 처박아두고, 나는 창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녀석들을 죽이려 하지 않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는 결국 전쟁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여기 온 거니까 말이야.

    여신님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쟁신의 힘이 쌓이고 있다고.

    문제는 그 전쟁이라는 게 어느 정도 규모까지 적용되느냐는 거다.

    호칭이 전쟁신이라고는 하지만, 이 세계의 놈들을 보면 굳이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싸움 그 자체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있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1대1로 전투를 벌이는 것만으로도 전쟁신의 힘은 축적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 자신은 최대한 피를 보지 말자고 생각한 거다.

    그야 이런 세계니까 전투 그 자체를 피하는 건 어렵겠지만,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봐야 하지 않겠어?

    아무튼 내 말대로 제대로 기다리고 있었는지, 레이는 내가 손짓하자마자 잽싸게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적어."

    아까 그렇게 놀리고 왔으니 오자마자 한소리 하는 걸까 생각했지만, 레이는 딱히 그럴 마음 없는 모양이었다.

    창고에 들어오자마자 황급히 주위를 살펴 나무통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레이는 눈을 찌푸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경비병이 하는 얘기를 봐서는 거의 다 나른 모양이야. 아까 배에서 확인한 게 대부분이었다는 거지. 뭐, 편하고 좋지 않아? 몇 개 확인 안 해도 되니까."

    나는 그런 레이에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가벼운 말투로 말해줬다.

    물론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겠지만, 설마 그렇게 되겠어?

    그렇게 쉽게 생각했지만, 역시 인생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내가 애널라이즈로 나무통 안을 확인하기도 전에, 레이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등 뒤로 돌리더니 크게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

    그러자 그 단검에서 하얀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뿜어져 나와 모든 나무통의 뚜껑 부분만을 깔끔하게 오려냈다.

    뭐야. 그거. 네가 무슨 용의 용사냐? 그런 필살기를 쓰게.

    그런 걸 쓸 줄 알면 배에서도 쓰지 그랬냐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이 녀석도 소란피우면 안 된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던 거겠지.

    입고 있는 암살자 복장과 다르게 엄청나게 화려한 기술이니까.

    "헬레나! 헬레나!"

    아무튼 그 화려한 스킬로 모든 나무통의 뚜껑을 베어낸 후, 레이는 황급히 다가가 하나하나 그 안을 들여다봤다. 필사적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물론 헬레나라는 사람이 대답을 해주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그 이유는, 단순히 나무통 안에서 잠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없어."

    마지막 남은 하나까지 모든 나무통을 확인한 후, 레이는 이 가는 소리와 함께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짜냐. 배에도 없었고, 여기에도 없으면 남은 건······.

    "그 헬레나라는 사람. 여기에 잡혀 온 건 확실해?"

    "확실해! 나······는 못 봤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랬어!"

    ······야. 지금 그 말로 엄청 설득력 떨어진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은 또 누구야.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건 또 하나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뭐, 확실한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

    "확실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엇갈렸다고밖에 볼 수 없겠네."

    박박 우기는 레이를 무시하면서, 나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우리가 여기에 오는 동안에도 배로 나무통을 나르는 선원은 있었으니까, 그 나무통 중 하나에 헬레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다.

    "읏! 헬레나!"

    그리고 내 말을 듣자마자, 레이는 또 곧바로 몸을 움직여 배를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거침없이 땅을 박차던 그 발은,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창고의 근처. 아까 레이가 선원의 목을 땄던 그 장소에, 불빛 몇 개가 모여있었기 때문이다.

    아차. 벌써 들킨 건가.

    잠시 시체 근처에서 모여있던 불빛들은, 이윽고 여러 갈래로 흩어지며 사방을 비추기 시작했다.

    마치 주위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게다가 그 불빛의 일렁임에 이끌리듯, 점점 거리와 건물에 불이 들어오며 일대 전체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젠장. 어쩐지 보스에게 보낼 진상품을 나르는 것치고는 경비 수가 너무 적더라니.

    일을 조용히 처리하기 위해서 필요 최소한의 인원만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목을 끌지 않도록 인원을 거리 곳곳에 분산시켜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래서는 아까 골목길에서 선원들을 죽인 것도 바로 들키지 않은 게 용한 수준이잖아.

    "정면으로 가는 건 힘들어. 돌아서 가자. 이쪽으로."

    이렇게 거리가 밝아져서야 내 그림자 이동도 아까처럼 활용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맵을 신중히 확인하면서, 외지인이라면 알 수 없을 만한 골목길만 골라 다니며 불빛을 피해 마을을 크게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렇게 해서 겨우 다시 배의 선착장까지 도착할 수 있었지만, 갑판 위의 모습 역시도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기는 그래도 창고 근처처럼 불빛이 환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뭔가를 급하게 지시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뭔가 일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창고 근처에서 선원이 죽었다는 사실이 퍼진 건가? 아니면 여자들을 모아놓은 방의 경비병들이 당했다는 걸 눈치챈 건가?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는 상당히 좋지 않은 신호였다.

    저래서는 아무래 배 구조를 훤히 꿰고 있는 레이라도 함부로 잠입은······.

    "헬레나! 기다려!"

    "어딜 가려는 거야?! 너 미쳤어?!"

    이, 이 녀석! 지금 내가 잡아채지 않았으면 분명 돌진했을 거야! 저 경비가 삼엄한 곳에!

    "이거 놔! 저 안에 헬레나가!"

    "이대로 가봤자 개죽음만 당할 뿐이잖아. 너 저기 있는 놈들 전원 상대할 자신 있어?"

    "죽는 것 따윈 두렵지 않아!"

    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고해줬지만, 이 녀석은 목표가 바로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눈이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럼 제압돼서 바프라한테 잡혀가는 건?"

    "으읏!"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잡고 있던 레이의 팔이 바르르 떨리면서 그 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떠는 강아지처럼.

    역시나. 아까도 느꼈던 거지만, 이 녀석은 바프라에게 잡혀가는 걸 엄청나게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똑같이 바프라라는 성을 쓰고 있으니까 가까운 가족, 그게 아니더라도 친척은 될 텐데 말이야.

    속사정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캐내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우선.

    "나, 나, 나는, 그, 그런 남자쯤······!"

    "그러니까 조금 침착하라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레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 머리에 손을 얹으면서, 나는 타이르는 말투로 그렇게 말해줬다.

    "방법이······있어······?"

    "그래. 저렇게 경계가 삼엄해서야 잠입하기 힘들지만, 바꿔 말하면 다시 경계가 느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잠입하면 그만이잖아."

    "그런 게······!"

    "알아. 출항할 떠날 때까지 계속 저 상태일 거고, 출항한 다음에는 배를 따라가서 잠입할 방법이 없으니 경계가 느슨해져도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하지만 괜찮아. 말했잖아?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어떤? 알려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에 매달리는 표정으로, 아니. 실제로 내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매달리면서, 레이는 간절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다.

    그 어떤 남자의 대답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눈동자였지만, 상대가 안 좋았네. 나한테 그런 미인계가 통할 리가 없잖아.

    "이다음 얘기는 유료 서비스입니다. 아가씨."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레이의 몸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얘가 어딜 임자 있는 남자를 유혹하려고 그런 차림으로 매달려.

    "유료? 큭······! 뭘 원하는 거냐!"

    그러자 아까의 그 간절한 눈빛은 어디로 갔는지, 레이는 눈동자를 증오로 이글이글 불태우며 날 쳐다봤다.

    처음에는 분명 과묵한 이미지도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그런 이미지가 사라져버렸다.

    아니. 과묵한 것하고 감정적인 것은 전혀 다른 문제지만.

    "너무 그렇게 이글거리는 눈으로 보지 마라. 아무리 내가 잘 생겼어도 그렇지. 너무 뜨거워서 데이겠잖아."

    조금 분위기를 가볍게 할 생각으로 농담을 던져봤지만, 물론 레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말고 뭘 원하는지나 말해."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별거 아니니까. 내가 원하는 것쯤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아?"

    배 안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딱딱한 말투로 돌아온 레이에게 묘한 미소를 지어주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 몸에 살짝 몸을 밀착시켰다.

    뭐, 이렇게 해봤자 이런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겠지만. 어차피 남자들이 섹스에 눈이 돌아간 세계도 아니고.

    "너, 너도······결국 내 몸을 원하는 거였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째선지 레이에게는 통했다.

    심지어 이런 상황을 지금 처음 겪어보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남자들이 섹스를 애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아니었어?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80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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