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79화 (963/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9화 >

뭘 그렇게 놀라. 아무리 내가 호기심이 왕성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여 암살자 레이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어쩐지 신이나 유리보다 말투가 더 건방진 게 이상하다 싶었거든.

그래서 이름을 알아낸 다음 나중에 그 커플한테 은근슬쩍 물어볼 생각으로 애널라이즈를 써봤는데, 이게 웬걸. 바프라라는 이름이 딱 나오지 뭐야?

아까 위에서 염탐할 때 선원들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바프라 님은 이런 걸 뭐 하는 데 쓰려는 거지? 라고.

거기서 나는 바프라라는 명칭이 보스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이렇게 눈앞에 똑같이 바프라라는 성을 쓰는 여자가 나타난 거다.

그것도 바프라에게 바치는 진상품을 실은 배에 잠입해서, 바프라의 수족들을 무참하게 죽이기까지.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속사정이 궁금해지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는 아까부터 이 여자한테.

"으악?! 뭐 하는 거야?!"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피하자, 방금까지 내 미간이 있던 자리에 새파랗게 날이 선 단검이 공간을 가르며 찔러 들어왔다.

내 반사신경이 뛰어났기에 망정이지, 진짜 방심을 할 수가 없네!

나는 황급히 레이 바프라의 손목을 잡아채서는, 그대로 힘을 꽉 줬다.

"큭!"

그러자 그 손에서 힘이 빠지며 단검이 아래로 떨어져 내겠지만, 그래도 이 여자는 아직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손으로 떨어지는 단검을 받아내서는 곧장 내 명치를 찔러오는 레이.

하지만 나는 그림자 이동으로 반보 옆으로 살짝 이동해 피해내고는, 레이의 두 손을 잡아 등 뒤로 꺾으며 앞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누가 마신의 종족 아니랄까 봐 진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여자네.

그나마 여기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공간이라 월영무사의 패시브가 최대로 발휘되고 있었으니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아마 대낮에 만났으면 성자 스킬 없이 제압하기는 힘들었을 거다.

"크윽! 놔! 이거 안 놔?!"

그렇게 제압당하고도 레이는 한동안 몸을 버둥거리며 저항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야 내 힘을 당해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흐윽······날······또 그 남자한테 데려갈 생각이야······?"

그렇게 한참을 발버둥 치던 레이는, 결국 아무리 발버둥 쳐도 풀려날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힘이 없는 목소리로, 어떤 면에서는 겁먹은 것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얘는 또 뭐라고 하는 거야? 그 남자? 정황상 바프라를 말하는 건가?

"너······."

바보냐? 머리가 나빠?

그런 말로 비꼬아주기 위해 입을 열었던 나였지만, 손으로 누르고 있는 레이의 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뭐야. 진짜로 그렇게까지 무서워하고 있는 거였어?

"하아······."

나도 진짜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차라리 사내새끼였으면 어디서 약한 척이냐고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왜 하필 또 여자여서 사람 마음을 약하게 하냐.

"그 남자라는 건, 바프라를 말하는 거지?"

"······뭐?"

제압하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빼면서 그렇게 물어보자, 레이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간신히 돌려서 날 올려다봤다.

직접 대답한 건 아니었지만 날 바라보는 그 떨리는 눈에는 미약하게나마 희망이 담겨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답은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야. 너 내가 아까 저 경비병들 처리할 때 도와준 건 기억 못 하냐? 이 배 바프라한테 가는 배잖아? 거기 경비병을 처리하는데 일조한 내가 널 바프라한테 데려갈 리가 없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손에 힘을 완전히 빼고는 천천히 레이에게서 떨어졌다. 저 녀석이 또 돌발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 일단은 주의를 기울이면서.

"난 바프라랑 아무 관계도 없어."

하지만 내게서 해방되고도 레이 바프라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 또 이걸로 갑자기 날 공격하면······혼난다."

그래서 나는 조금 안심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서, 다시 레이에게 돌려줬다. 일단 가벼운 경고와 함께.

경고라면서 고작 혼난다가 뭐냐고? 어쩔 수 없잖아. 무서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애한테 죽인다고 할 수도 없고.

"아······."

그리고 레이로 말하자면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얼떨떨한 느낌으로 내게서 단검을 받아들더니, 떨리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물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떨리는 거겠지.

그래. 그래. 감동했냐? 내가 좀 멋있기는 하지. 그렇다고 해서 너무 반하면 안 된다. 난 이미 임자 있는 몸······.

"바보?"

"누가 바보라는 거냐?! 바보라고 하는 놈이 바보거든?!"

이 망할 것이! 난 아까 바보라고 하려던 것도 참아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그럼 정말로······그냥 호기심 때문에 여기 있다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말했잖아."

"······역시 바······."

"너 한 번만 더 바보라고 해봐라."

"혼내려고?"

······그냥 아까 경고할 때 죽여버린다고 할걸.

놀리는 말투도 아니고 진지한 목소리로 저런 걸 물어보니까 괜히 더 화나잖아.

하지만 그래도 참자. 예상외의 반격을 맞고 살짝 평정심이 깨져버릴 뻔했지만, 그 정도 공격. 펠리시아의 말장난으로 단련된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 것보다 너 할 일이 있는 거 아니었냐?"

"읏! 너, 이름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사실이겠지? 정말로 여기에 헬레나는 없는 거겠지?"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말투가 건방진 건데. 너 아까 나한테 제압당한 거 벌써 까먹었냐?

"그래. 딱히 거짓말할 이유도 없잖아?"

하지만 착한 나는 그냥 솔직히 대답해주기로 했다.

일일이 다 따지다가는 오늘 내에 이 녀석의 속사정을 다 알아내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뭔가 여기 온 목적이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렴 어때.

바프라의 보스가 가족이랑 뭔가 트러블이 있는 것 같잖아. 내막을 알아두면 분명 어딘가에 쓸 일이 있을 거야.

배 같은 건 굳이 이 배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배를 알아보면 그만이니까.

정 안 되겠으면 굳이 잠입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배 밑에 매달려서······어? 잠깐만. 진짜 그래도 되겠는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뭐,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 녀석이 우선이다.

"······."

레이는 또다시 단검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내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믿어달라고 주장하는 대신 가벼운 눈웃음으로 그 시선을 받아쳐 줬고.

"큭."

결국 레이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듯 몸을 완전히 돌려버렸다.

"야. 어디 가려는 건데."

"······너하고는 관계없어."

내 제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는 툭 내뱉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곧장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아니. 그야 관계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궁금하다니까. 너 진짜 사람 얘기 잘 안 듣는구나?

물론, 나도 은신을 쓰고는 그대로 레이의 뒤를 밟았다.

들어오자마자 바로 경비병한테 들켰을 정도로 은신 능력이 떨어지는 레이가 어떻게 거기까지 침입할 수 있었는지는, 그 뒤를 쫓아가면서 확실해졌다.

마치 배의 내부 구조와 경비병의 이동 루트를 샅샅이 꿰고 있다는 듯, 레이는 거침없는 발놀림으로 사람이 없는 곳을 쏙쏙 골라서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나보다 훨씬 먼저 정찰하면서 구조를 꿴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은 바프라니까, 뭔가 자기만의 루트로 바프라의 배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가?

아무튼 그렇게 아무에게도 걸리지 않고 창문이 있는 방까지 도착한 레이는, 창문을 통해 그대로 강물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잠수한 채로 헤엄쳐갔는지 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빠져나온 다음, 마치 정해진 목적지가 있다는 듯 또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가는 레이.

물론 나는 그림자 이동이 있기 때문에 딱히 잠수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뒤를 밟을 수 있었다.

레이가 도착한 곳은 바로 선원들이 짐을 꺼내고 있는 창고였다.

과연. 거기에 없으면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처음부터 배보다 여기부터 알아보는 게 더 빨랐던 거 아냐? 라는 의문이 잠깐 들기도 했지만, 아까 탈출할 때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배 구조를 잘 알고 있으니, 여기보다 배가 더 잠입하기 쉬웠던 거겠지.

자신의 은신 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레이 본인도 잘 알고 있는 건지, 레이는 창고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의 옥상에서 몸을 낮추고 가만히 창고를 노려봤다.

그리고는 두 손에 단도를 불끈 쥐더니, 그대로······.

"야. 잠깐 스톱."

"으흐읍!"

달려가려는 찰나에, 내가 레이를 불러세웠다.

설마 아직도 따라오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한 레이였지만, 다행히도 그 전에 내가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창고를 지키고 있는 놈들한테 들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용히. 들키고 싶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경고와 함께 입을 막았던 손을 떼주자, 레이는 안광을 번뜩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날 쏘아붙였다.

"말했잖아. 난 호기심이 왕성하다고. 그보다 너, 설마 그대로 창고에 돌진할 생각은 아니겠지?"

괜히 나한테 신경 쓰는 것보다 우선은 네 할 일에 집중하는 게 어때?

그런 의미로 적당히 얼버무리며 말을 돌리자, 레이도 포기한 건지 아니면 아까의 일로 내가 그렇게 위험한 놈은 아니라고 판단한 건지 내 말에 응해줬다.

"문제 있어?"

"엄청 많지. 우선 네 차림부터 문제잖아."

"큭······어차피 어두우니까 문제없어."

그제야 자신이 어떤 차림인지 눈치챘는지, 레이는 한쪽 팔로 은근슬쩍 가슴을 가렸다.

안 그래도 몸에 딱 달라붙고 노출도가 높은 차림인데, 그게 흠뻑 젖기까지 했으니까 말이야.

덕분에 더욱 눈 둘 곳이 없어진 레이의 모습이었다. 물론 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지만. 내가 뭐하러 눈을 돌려? 저런 건 감사히 감상해줘야지.

그나저나 얘도 이렇게 가리는 걸 보면 일단 수치심은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런 차림을 안 했으면 됐······아니! 이게 아니지! 난 지금 네 노출도를 지적한 게 아니라고! 그야 뚫어져라 감상하기는 했지만!

"젖은 걸 말하는 거야. 그렇게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잠입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은신도 잘 못 하면서."

"큭!"

은신도 잘 못한다는 말이 상당히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레이는 또다시 침음성을 흘렸다.

그나마 자기도 알긴 아는지 반박은 안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물의 정령을 불러 레이의 몸에 있는 물기를 털어냈다.

"이, 이건······?!"

그러자 마치 이런 건 처음 본다는 듯,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구미호의 결계를 보면서 마법 구조가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했었지.

설마 여긴 정령술 같은 것도 없는 건가? 괜히 썼네.

"뭐, 이름을 알아내는 것처럼 이것도 별거 아닌 특기야. 그보다 할 일이 있잖아?"

대체 정체가 뭐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레이의 시선을 필사적으로 모른 척하면서, 나는 또다시 창고로 주의를 돌렸다.

"저것들도 뒤가 구린 게 있는지 나무통을 나르는 인원은 적으니까. 선원이 한 차례 빠져나갔을 때······야!"

창고를 내려다보며 차분히 계획을 짜려고 했던 나였지만, 그보다 레이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다.

설마 얘기도 다 안 듣고 갑자기 튀어 나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에 허를 찔린 나도 이번에는 몸을 잡아 세우지 못해서, 땅으로 착지한 레이는 나무통을 들고나오던 선원들에게 쇄도해서 순식간에 멱을 따버렸다.

이런 미친······여기 놈들은 진짜 하나같이 다들 왜 이 모양이야?!

"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이러면 침입자가 있을 거라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황급히 따라가서 레이를 다그쳐봤지만, 레이는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어차피 안에 있는 사람을 다 조사하려면 경비는 다 처리해야 해. 그리고 이놈들이 나르는 여기에 헬레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어."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좀 더 온건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냐?! 꼭 이렇게 피바다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미친 세계에서는 오히려 적을 꼭 죽일 필요 없다는 말이 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안 그래도 정령으로 건수를 하나 줘버렸는데, 괜히 건수를 더 줘서 여신님 쪽 인간이라는 걸 들키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동안 레이는 선원들이 들고나온 나무통의 뚜껑을 다 따서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역시 헬레나라는 사람은 없었는지 가볍게 혀를 찬 다음, 레이는 날 바라보며 이번에는 반대로 명령까지 했다.

"칫. 내 사정이 궁금한 거지? 그럼 너도 도와."

어차피 날 떼어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 이용하겠다는 건가.

오냐. 어디 한 번 해보자.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오기로라도 네 사정을 알아내고 말겠어.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9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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