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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78화 (962/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8화 >

    "그러고 있을 시간 없을 텐데? 너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 여기 잠입한 거 아니야? 아까는 운 좋게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결국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걸."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댁과 싸울 생각 없다는 의미로 두 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 보였다.

    "시간이 없는 건 네놈도 마찬가지일 텐데."

    뭐, 그래도 경계를 완전히 풀 생각은 없는지, 여 암살자는 단검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어 보였지만.

    그나저나 네놈이라. 상당히 고압적인 말투인데.

    특히나 여기는 세계가 세계인만큼, 여자가 저런 말투를 쓰는 것에 상당히 위화감이 느껴졌다.

    귀한 집 딸이라는 유리조차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야 별거 아닌 목적으로 왔으니까. 금방 해결할 수 있거든."

    사실 경비병을 처리해버리는 바람에 몰래 배에 타는 건 물 건너간 것 같아 상당히 골치 아팠지만, 그래도 나는 겉으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어 보였지만,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는 내 노력에 여 암살자는 전혀 응해주지 않았다.

    대신 용건이 뭔지 말해보라는 듯, 단검을 치켜들며 자세를 낮출 뿐이었다.

    과묵한 데다 고압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진짜 위험한 여자네 이거.

    뭐, 위험하지 않은 암살자가 어디 있겠냐마는.

    "별거 아니야. 그냥 우연히 여기로 수상한 물건이 옮기는 걸 봤는데, 뭔지 궁금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이쪽의 목적을 밝히지 않는 이상 계속 저 상태일 것 같아서, 나는 우선 내 목적부터 어느 정도 털어놓기로 했다.

    사실 진짜 목적은 배에 잠입하는 루트를 찾기 위함이지만, 이 방에는 진짜 궁금해서 온 거니까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궁금해서?"

    그리고 그제야 여 암살자의 목소리의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아까까지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면, 지금은 살짝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런 위험한 곳을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내 의도대로 긴장이 살짝 풀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래. 아무래도 평범한 물건을 싣고 있는 것 같지가 않거든."

    가까이에 있는 나무통을 손끝으로 톡톡 치면서 그렇게 말한 다음, 나는 아예 허리를 숙여서 통 위에 난 구멍에 천천히 눈을 가져다 댔다.

    물론 만에 하나 여 암살자가 공격해올 것을 대비해서, 언제든 그림자 이동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통 안은 말 그대로 완전한 어둠이 자리하고 있어서, 야간투시 스킬을 찍은 내게도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물론 스킬 포인트를 더 투자하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단 내용물이 뭔지 대충 짐작은 가니까 말이야. 이렇게 섹스 애널라이즈를 사용해보면······빙고.

    섹스 애널라이즈는 사람의 성감대를 핑크색 빛으로 표시해주는 스킬이다.

    그리고 특성을 응용하면, 이런 식으로 어떠한 어둠 속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거지.

    섹스 애널라이즈를 사용하자, 통 안에 웅크린 자세로 기절해있는 듯한 여자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말해서 안에 든 게 남자면 거기 모습을 밝은 핑크빛으로 보게 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눈 테러를 당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 아닐 수······아, 아니. 이게 아니지.

    "역시 사람이었군. 그것도 여자라니. 설마 다른 통에 든 것도 전부 여자인가? 그러면 당신 목적도······."

    "네놈과는 관계없다."

    야. 치사하게 내 목적은 들어놓고 자기 목적은 말 안 하기냐?

    "그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알았으면 꺼져라."

    와. 말투 더러운 거 봐. 얘가 내 청개구리 본능을 살살 자극하네.

    이렇게 된 이상, 오기로라도 네 목적이 뭔지 알아내야겠어.

    "싫어."

    "······뭐?"

    내가 짧은 대답이 상당히 심기를 거슬렀는지, 드러내고 있는 신체 부위 중 유일하게 새하얀 여 암살자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아까 말했잖아? 내가 여기 왜 왔는지."

    "호기심은 풀렸을 텐데."

    "그야 통에 담긴 게 뭔지는 확인했지만, 새로 궁금한 게 생겨서 말이지."

    "날 말하는 건가."

    "그런 거지."

    "······그런가."

    다행히도 이해력이 부족한 건 아닌지, 여 암살자는 곧바로 내 말뜻을 이해했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숙이더니, 양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 같은 건가? 살벌한 버릇을 가지고 있네.

    "······지나친 호기심을 화를 부른다."

    그리고 단검을 가지고 놀던 손이 단검을 다시 꽉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여 암살자는 마치 충고라도 하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줬다.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거겠지.

    아까 도와준 정도 있으니 지금이라면 봐주겠다. 그러니 그냥 가라.

    "그걸 신경 쓰면 내가 여기에 있겠어?"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고도 나는 일부러 어깨까지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가."

    그리고 그런 내 대답에 여 암살자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또 한 번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다만, 이번에는 단검을 꽉 움켜쥐고 있는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럼 죽어라."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있던 공간을 은빛 섬광이 가로지르며 지나갔다.

    진짜 미리 대비를 해두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무슨 여자가 저렇게 살벌해?

    지금까지 각양각색의 타입의 여자를 만나봤다고 자부하는 나지만, 저만큼 살벌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역시 여신님의 세계와 마신의 세계는 기본 바탕이 되는 정서부터 다르다는 건가.

    "크윽!"

    내가 턱에 손을 대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여 암살자는 갑자기 사라진 내 모습에 당황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까 경비병이 숨어있던 것도 제대로 눈치를 못 챘던 녀석이, 이런 새까만 어둠 속에서 월영무사의 은신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꿰뚫어 보기는커녕,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도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눈치를 못 채니까 재미있네. 게임을 할 때도 암살자는 이런 재미로 했었지.

    "후우."

    "흐읏?!"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훤히 드러난 등에 가볍게 숨을 불어넣어 봤고, 여 암살자는 등에 뭔가 닿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듯 몸을 바르르 떨며 귀엽게 반응했다.

    "야. 너무 목소리 높이지 마라.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안 그래도 여자 목소리는 남자 목소리보다 높으니까 조심해야지. 과학적으로도 사람이 잘 때 주파수가 높은음을 들을수록 깰 확률이 더 높아······."

    "헛소리하지 마라!"

    여 암살자를 놀리듯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막 내뱉고 있자, 다시 한번 내가 있던 공간을 은빛 섬광이 가로질렀다.

    그래도 일단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기는 했는지, 목소리를 확 줄이기는 했지만.

    이상한 데서 기특한 녀석이네.

    "크윽. 숨어있지 말고 남자답게 당당히 나와서 싸워라!"

    그리고 슬슬 내 장난이 먹히기 시작했는지, 과묵하던 애가 조금 열 받은 목소리로 저런 말까지 했다.

    하지만 난 딱히 싸울 생각 없는데. 진짜 뭐 하러 온 건지 궁금한 것뿐이지.

    "그러니까 난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보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무, 뭐냐."

    갑자기 진지해진 내 목소리에, 여 암살자도 살짝 긴장했는지 손에 든 단검을 꽉 움켜쥐었다.

    "내가 말한 볼 일이라는 건 쉬야를 말하는 게 아니라 네가 여기 온 목적을 말하는······."

    "그정도는 알고 있다! 장난하자는 거냐?!"

    이래봬도 꽤나 진심인데 말이야.

    왜 나는 진심을 말해도 장난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 걸까.

    "아니. 진짜로."

    "크윽?!"

    여전히 내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여 암살자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서, 나는 몸을 팔 바깥부터 통째로 꽈악 끌어안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당연히 여 암살자는 엄청나게 발버둥 쳤고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기도 했지만, 250레벨을 돌파하면서 스탯의 한계치가 늘어난 내 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팔에 힘을 꽉 줘서 몸을 조이자, 여 암살자의 팔에 들어간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 손에 쥔 단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난 네가 여기 온 목적을 반드시 알아낼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냥 이대로 여기 온 목적이나 달성하고 빠져나가는 게 좋을걸?"

    그리고 완전히 제압된 여 암살자의 귀에다 대고, 뭐 귀도 복면에 가려져 있어서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귀가 있을 자리에 입을 가져다 대서는, 조용히 속삭여줬다.

    그리고는 팔에 힘을 풀고,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감췄다.

    "큭!"

    여 암살자는 풀려나자마자 뒤로 팔을 거칠게 휘둘러 날 공격하려고 해봤지만, 피가 통하지 않아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팔로 그림자 이동을 쓰는 날 맞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네놈. 처음부터 내가 목적이었던 거군."

    여 암살자는 결국 포기했는지 팔을 주물러 피를 통하게 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들고는, 한층 경계심이 가득해진 목소리로 분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니. 어째서 얘기가 또 그렇게 되는 건데. 뭐, 보아하니 그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인 것 같기는 하다만.

    "무슨 소리야. 아까 내가 여기 온 이유 말해줄 때는 뭐 들었어? 그냥 난 호기심이 많은 성격뿐이라니까? 자의식과잉도 그정도면 병이다. 병."

    "자의······!"

    다시 한번 내가 가벼운 말투로 그렇게 받아쳐 주자, 여 암살자는 살짝 충격을 받았는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뭐, 태어나서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봤을 테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네, 네 놈······크윽. 헬레나! 헬레나!"

    여 암살자는 굴욕이라는 듯 단검을 꽉 쥐면서 부들부들 떨더니, 결국 날 상대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뭐, 일부러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면서 힘의 차이를 보여줬으니, 굳이 나랑 싸우고 싶지도 않을 테고.

    "헬레나라니. 사람 찾으러 온 거였어?"

    "그게 어쨌다는 거지?"

    야. 장난 좀 쳤다고 말에 너무 가시가 돋쳐있잖아. 이번에는 장난치려고 말 건 거 아니니까 조금 진정하라고.

    "아까 내가 본 통의 여자는 약이라도 쓴 건지 쥐죽은 듯 잠들어있었어. 아마 불러도 대답은 못 들을 것 같은데."

    "뭣?! 그렇다면······!"

    콰직!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마자, 여 암살자는 손에 든 단검을 곧바로 나무통 하나에 꽂아 넣고는 그대로 뚜껑을 따버렸다.

    야! 소리 엄청 크잖아?! 암살자 주제에 뭐 하는 거야?! 너 혹시 그 옷 코스프레냐?! 그러고 보니 아까도 들어오자마자 경비병한테 들켰지?! 전투도 묘하게 암습보다 전면전을 더 잘하는 것 같았고!

    "야. 잠깐만."

    "또 뭐지?!"

    "설마 여기 있는 통을 일일이 다 따볼 생각은 아니지?"

    "문제 있어?!"

    "그럼 없을 것 같아? 그거 다 따는 것보다 소리 듣고 누군가 찾아오는 게 더 빠르겠다."

    설령 운 좋게 아무도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하더라도, 곧 있으면 또 아까처럼 나무통을 든 선원들이 여기로 들이닥칠 거다.

    아무리 여기가 어두워도, 나무통 뚜껑이 다 따여있으면 들키지 않을 리가 없잖아.

    "겁나면 먼저 도망가라! 어차피 호기심도 다 풀리지 않았나?!"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이번에는 헬레나라는 여자가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잡혀들어오는 처지가 됐는지, 그리고 넌 그여자랑 어떤 관계길래 여기까지 구하러 왔는지 속사정이 궁금해졌거든.

    "헬레나라는 이름. 본명이야?"

    하는 수 없으니, 나도 조금 실력 발휘를 해서 여 암살자를 도와주기로 했다.

    "갑자기 무슨 말이지?"

    "대답해."

    "······본명이다만."

    억지로 대답을 들어낸 다음, 나는 곧바로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 나무통에 난 구멍을 하나하나 재빨리 엿봤다.

    다른 사람이 보면 마치 분신을 쓰는 것처럼 빠르게 위치를 옮기며 다니니, 방에 있는 수십 개의 나무통을 전부 확인하는데에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안 됐네. 아무래도 여기엔 헬레나라는 여자가 없는 모양이야."

    그리고 나무통을 다 확인한 나는,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낸 다음 가볍게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난 처음 본 사람이라도 사람의 본명을 알 수 있는 힘이 있거든. 뭐, 자그마한 재주 같은 거야. 그걸로 나무통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 번 다 훑어봤지."

    정확히는 애널라이즈 스킬로 확인해본 거지만, 굳이 그걸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이상한 재주, 들어본 적도······."

    "네가 들어본 적 없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결정지어 버리는 건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니야. 레이 바프라양. 세상을 넓게 봐야지."

    내가 그렇게 별거 아닌 것처럼 여 암살자, 레이 바프라의 본명을 말해준 순간,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하얀 눈이 커다랗게 떠지며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8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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