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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77화 (961/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7화 >

    우선 배 내부를 탐색해볼까.

    아무리 경비가 빡빡해 보여도, 경비병들이 한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걸 이용해서 내부구조와 이동 경로를 잘 파악하다가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면서, 나는 돛대에서 내려가 배의 내부에 침입했다.

    은신에 그림자 은신의 효과가 더해지자 그 성능은 절대적이어서, 내가 1m 가까이 접근해 스쳐 지나가도 경비병은 내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덕분에 손쉽게 내부로 진입했지만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물자 운반을 은밀하게 진행하려는 건지 바깥에는 최소한의 불빛만 밝혀져 있었지만, 내부는 이제 사람 눈을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전부 환하게 밝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빛이 천장까지 환하게 닿는 건 아니었으니 위에 달라붙어 있으면 그림자 은신의 효과를 충분히 볼 수 있었지만······이상하다. 난 분명 다크 히어로의 기분을 맛보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친절한 이웃이 되어버린 거지?

    게다가 나는 진짜처럼 벽에 달라붙는 능력도 없어서, 천장에 달라붙어 있기 상당히 고됐다. 그나마 이동은 그림자 이동으로 끝낼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아무튼 천장에 달라붙어 다니면서, 나는 일단 물자가 운반되는 경로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 경로가 제일 경비가 삼엄할 테니, 우선 그 경로를 파악한 다음 거기만 피해 가자는 생각이었다.

    물자는 크게 세 개의 방으로 나뉘어서 운반되고 있었다.

    그중 두 개는 음식과 식수로, 이쪽은 그냥 배를 운용하기 위한 필수품만 채워 넣으려는 건지 그다지 물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나머지 하나가 이놈들이 수도로 진상하려는 물건이 된다는 얘기인데, 대체 뭘 옮기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다 큰 장정들이 술을 담을 때 쓰는 커다란 나무통 하나하나를 무겁다는 듯이 나르는데, 안에 든 내용물은 액체가 아닌 건지 거칠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리저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부딪히는 소리는······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안은 딱딱한데 표면이 말랑말랑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는 물건의 소리라고 하면 좋을까? 둔탁한 소리가 마치 사람이 어디 부딪히는 것 같은······잠깐만. 사람?

    그러고 보니, 나무통 위에는 동그랗게 구멍이 뚫려있었다.

    원래는 술 같은 걸 담을 때 쓰는 물건일 테니 액체를 담고 빼기 위한 구멍이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런 게 아니라 저게 숨구멍이라면?

    신경 쓰인다.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냥 이대로 물자 운반 루트는 피해서 숨을만한 곳을 찾아야 하겠지만, 이런 걸 눈앞에 두고도 그냥 지나가 버릴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인신매매라니! 하늘이 용서해도 이 구원이 용서 못 한다!’같은 정의 바보나 할 법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 순수하게 그냥 궁금하잖아.

    저 안에 든 내용물이 진짜 뭔지, 그리고 대체 어떤 사정이 있는 건지.

    그리고 아까 밖에서 선원들이 한 말을 생각해보면 이 물건들은 바프라, 그러니까 이 나라의 왕 같은 놈한테 진상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저 안에 든 내용물과 사정을 알아내면, 나중에 뭔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호기심을 채우려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나는 더욱 은밀하게 나무통이 운반되는 곳으로 따라갔다.

    나무통이 운반된 곳은, 배 안에서도 가장 내부에 있는 방이었다.

    밖에 불을 밝히지 않았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역시 이 물건을 옮기는 건 상당히 남한테 들키기 싫은 모양이었다.

    복도와 달리 불 하나 밝히지 않은 넓은 방. 그 어두운 공간에는, 그냥 나무통들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처럼 어둠에 동화되어서, 다른 경비병들보다 한 단계 더 레벨이 높은 경비병들이 여기저기 숨을 죽인 채 물건을 지키고 있었다.

    물론 내 눈에는 전부 똑똑히 보였고, 반대로 놈들은 내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자기들 딴에는 침입자를 방심시키기 위해 방안을 어둡게 한 모양이지만, 그게 오히려 내게 도움을 준 꼴이 된 거지.

    뭐, 그래도 일단 밖에 있는 놈들보다 레벨이 높으니, 신중을 기하기로 할까.

    나는 숨어있는 놈 중 하나에 조용히 접근했다.

    하지만 1m 가까이 다가가도, 역시나 놈은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다가가도 눈치를 못 채면, 일단 들킬 일은 없다고 봐도 되겠네.

    나는 편한 마음으로 나무통 하나에 다가가서, 숨구멍으로 생각되는 곳에 눈을 대고 안쪽을 엿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스르릉.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검 뽑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게다가 내 근처에 있는 한 놈만 그런 게 아니라, 방 안에 숨어있던 네 명이 동시에.

    뭐, 뭐야. 설마 들킨 건가? 아까 더 가까이 다가갈 때는 반응도 없었잖아? 왜 갑자기?

    "쥐새끼가 하나 숨어들었군. 우리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젠장. 진짜냐. 아니. 어차피 성자 스킬을 활용하면 6명쯤 조용히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렇게 하면 이 배에 잠입해서 수도까지 간다는 내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잖아. 하필 꼬여도 이렇게 꼬이냐.

    가볍게 혀를 차면서, 나는 손에 성자의 손길을 둘렀다.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싸느라 장비를 전혀 착용하지 않았으니,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중요하다.

    그림자 이동으로 교란하면서 하나하나 확실하게 처리하자.

    "큿!"

    그렇게 생각하며 한 놈의 뒤로 돌아가 그 목덜미에 최대 파워의 성자의 손길을 때려 박으려고 한 그 순간, 갑자기 방 한가운데에서 소리과 함께 웬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또 뭐야.

    설마 나 말고 또 침입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순간 얼이 빠져서 성자의 손길을 경비병한테 날리지도 못한 채 또 다른 침입자를 멍하니 바라보게 됐다.

    그리고 그 당사자로 말하자면, 두 손에 각각 단검을 역수로 쥔 채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나 있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사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 모습을 보아하니, 저 여자는 아직 경비병에 어디에 숨어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 놀랍게도 침입자는 여자였다.

    뭐,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렇게 바로 보니 더욱 확실했다.

    나처럼 대충 검은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진짜 암살자처럼 몸에 딱 맞는 검은 옷을 맵시 있게 소화해낸 모습. 딱 달라붙는 그 옷은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원피스형의 옷은 상반신은 손끝까지 완전히 가리고 있는 주제에 하반신은 핫팬츠 수준이었고, 상반신마저도 가슴 부위가 커다랗게 파여있어서 쓸데없이 섹시어필을 하고 있었다.

    다리에 딱 붙는 검은 롱부츠를 작용하고 있어서 일명 절대 영역이라고 불리는 곳밖에 드러나지 않았고, 피부가 검어서 옷이 파여있어도 은신에는 크게 지장이 없어 보이지만, 굳이 절대 영역과 가슴골을 드러내고 있을 실용적인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 뭐, 보기에는 눈 호강하고 좋지만.

    아무튼 그 여 암살자는 날카로운 눈매를 번뜩이며 사방을 주시하더니, 결국 경비병들의 위치를 파악했는지 빠른 속도로 쇄도해왔다. 그것도 하필 내가 뒤를 잡고 있던 그 경비원에게로.

    "어림없다! 크윽?!"

    붉은 불꽃을 튀기며, 여 암살자의 단검과 경비병의 검이 충돌했다.

    하지만 경비병한테 바로 들킨 은신 능력과 다르게 직접 전투는 강한 편인지, 오히려 경비병의 몸이 뒤로 밀리며 자세가 무너졌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 암살자는 절대 영역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부츠 안에서 작은 투척용 나이프를 몇 개 꺼내서는 경비병에게 던졌다.

    과연.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저기가 괜히 뚫려있는 건 아니었구나. 저런 활용법이······으악?!

    젠장! 실용적인 이유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군!

    하긴.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니, 저런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복장이 더욱 효과적이겠지.

    완전히 색기에 당해버려서 멍하니 그 섹시한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투척용 나이프가 내 코앞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마 내가 아니라 경비병을 노리고 던진 거겠지만, 나도 바로 그 뒤에 있었으니까 말이야. 경비병이 몸을 피하면서, 나이프가 자연히 내 쪽으로 날아오게 됐다는 얘기다.

    다행히도 뛰어난 신체 능력 덕분에 나이프가 미간에 꽂히기 전에 몸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면서 기껏 유지하고 있던 은신이 한순간 풀려버리고 말았다.

    "누, 누구냐?! 크헉?!"

    경비병은 갑자기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당황해서 내 쪽을 돌아봤고, 그 순간 그 목덜미에 여 암살자의 단검이 꽂히며 그대로 허물어졌다.

    "크윽?!"

    그리고 냉정하게 경비병을 처리한 여 암살자는, 설마 여기서 또 다른 놈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나이프를 치켜들고 경계하는 눈을 내 쪽으로 보냈다.

    야. 지금 날 경계할 때가 아니지 않냐? 네 뒤로 경비병 세 명이 덮쳐들고 있는데.

    "우선 남아있는 놈들부터 처리하자!"

    상대방의 정체도 목적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재빨리 경비병부터 처리하는 게 급선무다.

    내 작은 외침에는 여 암살자도 동의했는지, 여 암살자는 경계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우선 이쪽으로 덮쳐드는 경비병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사이에 나도 인벤토리에서 건틀릿만 꺼내서 착용한 뒤 전투에 가세해서, 세 명의 경비병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누구냐. 네놈은."

    물론 그러고 나서도 여 암살자의 경계심은 전혀 풀어지지 않아서, 경비병을 처리하자마자 곧장 내 쪽으로 단검을 들이밀었지만.

    너무하지 않냐? 방금 전투에서 우리 꽤 손발이 잘 맞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쪽이······잠깐. 누가 온다."

    "으읏!?"

    나는 황급히 시체들을 구석에 던져놓고, 여 암살자의 허리에 팔을 감아 잡아당기며 그림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잠시 몸을 숨기고 있자, 또다시 나무통을 든 선원 무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응? 뭐 이상한 냄새 안 나?"

    그리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선원 하나가 코를 킁킁거리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내가 은신과 그림자 이동으로 적을 교란하는 동안 여 암살자가 일격에 숨통을 끊는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피를 흘리는 건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코가 좋은 사람에게는 미약하게 혈향이 풍기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무통 냄새밖에 안 나는데. 빨리 가자."

    "아니야. 난다니까. 이 냄새는······."

    다른 선원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해도, 그 개 코 선원은 자신의 후각에 확신이 있다는 듯 코를 킁킁대며 점점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선원이 바로 우리가 있는 그림자 근처까지 다가온 순간, 내 품에 있던 여 암살자의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지금 당장에라도 튀어 나가려는 것처럼.

    이 녀석, 저 선원들도 깡그리 죽여서 입막음할 생각인가.

    대체 여기 세계 놈들은 왜 다들 하나같이 이 모양이야.

    원래 숨어있던 경비병들이야 그렇다 쳐도, 물자를 나르던 선원을 해치워버리면 여기에 침입자가 있다고 선전하고 다니는 꼴이잖아.

    "뭐 하는 거냐."

    여 암살자가 품 안에서 튀어 나가기 전에, 나는 그 몸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음침하게 선원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으헉?!"

    설마 이렇게 가까이에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뒤로 넘어지는 개코 선원.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할 일이나 해라."

    밖에 있던 경비병도 떠드는 선원을 향해 비슷한 말을 했었으니, 여기에 있는 경비병이 이렇게 말해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을 거다.

    게다가 목소리도 아까 들었던 경비병의 목소리를 최대한 흉내 냈으니, 분명 괜찮을 거야.

    안 되면 뭐, 하는 수 없고. 내 품에서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여 암살자가 하자는 대로 해야지.

    "시, 실례했습니다!"

    "그, 그러게 내가 빨리 가자니까!"

    하지만 내게도 선원에게도 운이 좋게도, 내 어설픈 협박은 선원에게 완전히 먹혀들었다.

    지근거리에 있는데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실력자의 위협에 완전히 겁먹은 건지, 선원들은 허겁지겁 나무통을 위치에 가져다 놓고는 꽁무니를 뺐다.

    "놔라!"

    그리고 선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여 암살자가 자신의 허리에 감겨있던 내 두 팔을 거칠게 벗겨 내며 내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단검을 치켜들며 날카롭게 눈을 빛냈지만, 내 눈에는 안광이 아까보다는 살짝 약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7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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