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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73화 (957/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3화 >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계까지 몰아붙이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실은 이윽고 끊어지는 법이니까.

    계속해서 겁만 줬다가 우리들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감정을 다 뛰어넘어 버리면, 그건 그거대로 골치 아파지지 않겠어?

    "뭐,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도 용사인 걸 자랑하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그냥 조금 많이 강한 든든한 동료가 생겼다고 생각해. 난 구원, 이 녀석은 쓰레온이라고 편하게 부르면서."

    "레온이다!"

    그래서 신과 유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긴장을 끈을 풀어준 나였지만, 아무래도 쓰레온 녀석은 거기에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저건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하지만 나란 남자는 그런 도움 안 되는 행동마저도 좋은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는 남자.

    넌 진짜 내가 같이 다니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넌 또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애들 겁먹게."

    "너한테 소리 지르고 있는 거다!"

    "하여간 고집하고는. 하는 수 없지. 둘 다 내키지는 않겠지만, 저 녀석은 되도록 레온이라고 불러줘. 둘이 있을 때는 얼마든지 쓰레온이라고······."

    "네 녀서어억!"

    내가 계속해서 살살 신경을 긁자, 쓰레온도 드디어 분노가 임계점까지 달했는지 전신에서 살기를 내뿜으며 쥐고 있던 검에 무식하게 강대한 마나를 둘렀다.

    살을 에는 듯한 살기와 직시하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검.

    그야말로 ‘나 용사다!’ 하고 전신으로 외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뭐, 얼굴이 얼굴이다 보니 우리 사라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뭐, 농담은 이쯤하고. 아무튼 그 정도로 편하게 대하라는 뜻이야. 알았지? 잘 부탁한다."

    "네, 넵!"

    나는 그런 레온을 완전히 무시하고, 신과 유리에게 손을 내밀어 새삼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두 커플은 행여나 놓칠세라 황급히 내 손에 매달려 손을 위아래로 붕붕 흔들어줬다.

    쓰레온의 저 모습을 보고, 우리가 용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거겠지.

    훗. 봤냐. 이게 바로 쓰레온을 이용하는 방법이야.

    "그럼 도움 줄 사람이 있다는 곳으로의 안내, 부탁해도 되겠지?"

    게다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이 두 커플 상대로는 당근과 채찍 작전이 너무도 잘 통해서, 둘은 결국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아, 하지만 그전에 의뢰했던 물건부터 받아오지 않으면. 잠깐만 기다려. 다녀올게."

    "성······구원 님. 혼자 다녀오실 생각입니까?"

    "우르르 마을을 나와놓고 또다시 우르르 들어갔다가 오면 너무 눈에 띄잖아. 안 그래도 전원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녀서 엄청 눈에 띄었을 텐데. 그냥 혼자서 후드 벗고 조용히 다녀올게."

    "후드를 벗으면 네가 제일 눈에······젠장!"

    야. 쓰레온아. 잘생긴 게 부러운 건 알겠는데, 혼자 말하고 혼자 화내지 마라. 신이랑 유리가 괜히 또 겁먹잖아.

    "그럼 네가 다녀올래?"

    "죽어도 싫다!"

    다녀오면 내가 제일 평범하게 생겼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잖아!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쓰레온은 또 쓸데없이 고집을 부려댔다.

    딱히 다녀오지 않아도 네가 제일 평범한 얼굴인 건 변함이 없는데 말이야.

    뭐, 어차피 지금은 나도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내가 다녀오겠다고 한 거니까, 별로 상관은 없지만.

    "그러면서 뭘 그러냐."

    "하지만 구원 님. 레온 님 말처럼 구원 님은 너무 눈에 띄시는 게? 시선을 끌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차라리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너도 충분히 눈에 띄어 인마.

    그렉은 호인족이니까 그나마 자기가 눈에 덜 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너도 고레벨 남자 모험가인 만큼 얼굴로 시선 끌고 다닐 정도로는 생겼거든.

    특히 주변에 자기 취향의 어린 여자만 없으면 멀쩡해져서, 은근히 주인공 상이니까.

    그리고 나도 생각이 있어서 내가 가겠다고 한 거야.

    "후후훗. 과연 그건 어떨까?"

    나는 후드를 벗고 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던 스킬을 발동했다.

    "응······너 그 얼굴······아니. 얼굴은 딱히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왠지 평범하지 않냐?"

    스킬의 효과는 절대적이어서, 다들 이변을 감지하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잘 된 모양이네. 쓰레온한테 평범하다는 말을 듣는 건 무지막지하게 본의가 아니었지만.

    "어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겠지?"

    "아닙, 으음······."

    실비아야. 혹시 이래도 멋있다고 말하려고 한 거야? 하여간 귀엽다니까.

    뭐, 자기가 지금 남장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지만.

    "그럼 다녀올게."

    나는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내게 주목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1레벨 때부터 유독 매력 수치가 높았던 만큼 조금은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뭐, 그래 봤자 1레벨 스탯으로는 그냥 잘생긴 일반인 수준일 테고, 여기는 남자밖에 없는 곳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이쯤 되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이 되겠지?

    그래. 내가 사용한 스킬은 바로 약자 태세였다.

    원래는 레벨이 너무 높아졌을 때 레벨이 낮은 여자를 기절시키지 않으면서 섹스하기 위한 스킬이었지만, 일시적으로 저 레벨을 가장하면서 능력치도 그에 맞춰지는 스킬의 특징상 이런 활용법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물론 모든 능력치가 저레벨 수준에 맞춰지는 만큼 위험에 노출되기는 쉽지만, 그땐 바로 스킬을 풀면 그만이니까.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점심때 온다고 하지 않았어?! 하늘을 봐! 황금빛 태양이 완전한 원을 그리며 찬란하게 떠 있잖아!"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셔도······."

    도구점에 다가가니, 가게 안에는 이미 선객이 하나 있지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필사적인 목소리로 주인장을 다그치는 모양이었지만, 주인장은 곤란하다는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주인장뿐만 아니라, 다그치는 쪽도 왠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같은데. 게다가 다급해 하면서도 앞에 수식어를 주렁주렁 다는 저 중2병 같은 말투는······.

    "으으윽! 조금 후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그리고 그런 외침과 함께, 도구점의 문이 활짝 열리며 튀어나온 몸이 내 몸에 부딪혔다.

    "큭······실례!"

    1레벨의 스탯인 그 가벼운 몸통박치기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져 버렸지만, 안에서 튀어나온 선객은 그런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짧게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만 내뱉은 후 황급히 발을 움직여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역시나. 저거 아까 놓쳤던 그 중2병이잖아.

    그제야 나는 아까의 중2병과 도구점 주인이 나눈 대화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저 녀석, 날 찾고 있었다는 건가.

    이렇게 간단하게 뒤를 밟히다니, 역시 7명이나 되는 인원이 후드를 걸치고 우르르 몰려다녔던 건 너무 눈에 띄었나.

    게다가 도구점 주인장이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올 거라는 말까지 함부로 해버리다니.

    손님의 정보를 그렇게 함부로 팔아도 되는 거냐.

    다행히 저 녀석이 계속 기다리지 않고 가게를 나가버렸으니 망정이지.

    기다리고 있으면 무조건 잡을 수 있는데도 가게를 박차고 나가다니. 저 녀석도 여유로운 말투와는 달리 상당히 침착하지 못한······아, 성역 선포에 걸려 있으니까 딸치러 간 건가.

    훗. 그럼 내가 콘돔 사고 빠져나가는 동안 즐딸해라.

    "주인장. 아침에 의뢰한 물건을 찾으러 왔어."

    도구점에 들어가면서, 나는 도구점 주인의 눈에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네? 아침에······늘어나는 얇은 고무를 의뢰하신 그분입니까?"

    후드까지 뒤집어썼으니 겉보기는 전혀 차이가 없을 텐데도, 주인장은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일반인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만 봐도 눈치챌 정도로, 지금의 나는 몸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물건은 완성됐겠지?"

    "네. 일단 이런 식으로 여러 개를 만들어봤습니다만······."

    "좋아. 가격은?"

    주인장이 내민 물건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완성도 높은 콘돔이었다. 그것도 숫자도 생각해보다 더 넉넉했다.

    나는 흡족한 마음이 들어 흥정할 생각도 하지 않고 주인장이 제시한 금액을 그대로 내줬다.

    ······잠깐만. 생각해 보니, 내가 쓸 콘돔도 아닌데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뭔가 이상하지 않아?

    "아, 손님. 그런데 말입니다. 가게에 손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손님이 들어오시기 직전에 가게를 엇갈려 나간 사람입니다만, 혹시 아시는 분입니까?"

    하지만 통 크게 가격을 내준 대가는 절대 나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진 주인장이 내게 나지막하게 경고를 해줬다.

    우리 정보를 다 불어놓고 돈을 내니 이제 와서 경고해주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걸 잘 이용하면 추적자를 따돌리는 것도······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중2병,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내가 놓칠 정도의 실력자였단 말이지. 이용가치가 있겠어.

    "맞아. 엇갈려버리다니 운이 안 좋았군. 만약 또 찾아오면 우린 지금부터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간다고 말해줘."

    "네. 알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그 검귀인지 뭔지 하는 할아범의 시체가 잠들어 있는 방향을 알려준 다음, 도구점을 빠져나왔다.

    그 녀석도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걸 보면,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놈이겠지.

    그런 놈이 시쳇더미를 발견한다고 해서 어딘가에 신고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고, 분명 그냥 그 길을 뒤로하게 될 거다.

    그러면 나중에 찾아온 추적대도 녀석의 흔적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지겠지.

    성자 스킬을 걸어놓은 것도 모자라서 누명까지 씌우는 건 너무하지 않냐고?

    훗. 인생이란 게 원래 다 그렇게 험난한 거야.

    뜻밖의 소득까지 올린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실비아와 떨거지들이 기다리던 곳에 다시 찾아간 내 눈에 제일 처음 들어온 광경은 바로······.

    "이런 식으로 하면 좋을 겁니다."

    "듀크 씨, 두 분은 처음이실 테니 조금 더 부드럽게 하지 않으면······."

    무지막지하게 진지한 얼굴로 토론을 나누고 있는 그렉과 듀크의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렉이 땅에 누워있고, 듀크는 그 위를 덮치고 있으며, 심지어 듀크의 손 하나는 그렉의 가슴 위에 얹어져 있기까지 하다는 점이었지만.

    투욱.

    오는 동안 여기저기 살피며 가지고 놀던 콘돔을 무심코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을 정도로,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아, 구원 님. 다녀오셨습니까."

    게다가 놈들은 내 기척을 알아채고는, 지금의 자세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서 내게 인사를 해왔다.

    "으악! 다가오지 마, 이 미친놈들아! 어쩐지 수상하다 했어! 그 지옥에서 그렇게 팔팔했던 것도! 이상한 노래만 불러댔던 것도! 나한테 계속 반지를 껴달라고 부탁할 때도! 실비아! 이리 와! 넌 저런 거 보면 안 돼!"

    나는 그만 신과 유리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고, 실비아의 몸을 끌어안아 그 두 눈을 손으로 꽉 가려버렸다.

    실은 내 눈도 가리고 싶었지만, 손이 두 개밖에 없으니 실비아밖에 가려줄 수 없는 게 통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오, 오해십니다!"

    "이, 이건 지도를 위해······."

    "뭘!? 뭘 지도한다는 거야 이 미친놈들아! 멀쩡한 커플을 게이로 만들 셈이야?!"

    젠장! 실비아 앞에서 결국 욕지거리까지 해버리고 말았잖아!

    내가 진짜 저 두 새끼를 왜 데려왔지?! 그냥 쓰레온만 데려올걸!

    "구, 구원 님······."

    "응. 실비아야. 많이 힘들었지? 미안해. 내가 너만은 반드시······!"

    "그, 그것이 아니라 그게······오, 오해십니다아······."

    ······응? 오해?

    저 두 놈은 그렇다 쳐도, 실비아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신 씨와 유리 씨를 위한 지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여성역을 맡아주실 분이 파티에 안 계시니, 하는 수 없이 제가······."

    "······하, 하하핫. 당연히 알았지.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너무 정색한다야. 아니. 미안. 너무 눈에 해로운 광경인지라 나도 모르게 그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광경을 보여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실비아에게 손댈 생각은 전혀 안 했다는 점만은 칭찬할만했으니까. 나도 이번만큼은 순순히 고개를 숙여 두 놈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는 거냐. 이 녀석도 은근히 그릇이 크다고 해야 할지.

    "이해해주니 고맙다. 그, 그보다 쓰레온! 너는 왜 그걸 또 열심히 보고 있는데?!"

    왠지 할 말이 궁해진 나는, 괜히 또 쓰레온에게 시비를 걸었다.

    아니. 신이랑 유리는 그렇다 쳐도, 저 녀석도 그렉과 듀크가 하는 짓을 가까이서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단 말이야!

    "나도 배우고 싶어서 그랬다! 왜?! 문제 있냐?!"

    "······아니. 미안······진짜 미안."

    "사과하지 마, 새끼야! 크흑! 나도! 나도 언젠가······! 씨바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3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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