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72화 (956/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2화 >

    "그렇단 말이지······."

    장소는 마을 밖의 산. 그중에서도 유독 수풀이 우거진 곳. 살짝 비밀 결사 같은 기분을 맛보면서, 우리는 도구점에 의뢰한 물건이 완성되는 동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신과 유리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들었다.

    물론 우리는 플리투스의 사람이기 때문에 바프라의 상황은 잘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서.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이, 신과 유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귀한 집 자식이었다는 점이었다.

    또 무협지 세계로 비유하자면, 구파일방이니 몇대세가니 하는 것들 있잖아?

    신은 그런 곳의 장남이었고, 유리도 일단 장녀였다는 모양이다.

    뭐, 아무리 귀한 집 자식이라도 여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세계이다 보니, 유리의 경우는 신만큼 의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의 몸으로 암갈대. 그러니까 뛰어난 후기지수를 묶어 부르는 속칭에도 포함된 걸 보면, 실력이 인정받고 있기는 한 모양이지만.

    아무튼 둘 다 그런 출신이다 보니,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제일 솔깃한 정보가 바로 이 녀석들과 같은, 그러니까 이성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어버린 놈들이 모인 비밀 집단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생각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바프라의 최고위급 간부도 몇 섞여 있다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비밀 집단이다 보니 신과 유리도 그 집단의 멤버 전원과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어서, 건너들은 소문이라는 모양이지만.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얘기가 있었다.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얘기였지만, 원래 세계에 있을 때 성 소수자들은 자기들끼리 몰래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다고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게다가 성 소수자라고 불릴 만큼 인원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결국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가 된다고.

    그러니 그걸 생각해보면, 바프라의 최고위급 간부가 섞여 있다는 소문도 전혀 믿지 못할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집단 중에 너희가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믿을만하다는 거지?"

    바프라의 금기를 깬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다. 아마 신용은 확실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일단 확인을 위해 신과 유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우리가 그나마 여기까지 도망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런 내 질문에, 신은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는 대답을 내게 들려줬다.

    이거 진짜로 생각보다 훨씬 일이 잘 풀리겠는데?

    이 커플이 종종 짜증 나는 점도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이렇게 데리고 다니기를 잘했어.

    "제 생각은 달라요."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지금까지 웬만하면 말을 아끼던 유리가 갑자기 끼어들어서는 내 좋은 기분에 찬물을 끼얹었다.

    "무슨 소리야. 유리. 잭이 우리를 얼마나······."

    "네. 그랬죠. 저희의 도피행을 지극정성으로 도와주고, 응원해줬죠. 하지만 도와줄 내용이 바프라의 배신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질 거예요."

    신은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게 클럽에 대한 믿음을 표출했지만, 유리는 그런 신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지금까지 조용히만 있었고 이 세계의 분위기도 있어서 유리는 신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오히려 신이 살짝 유리한테 잡혀 사는 거 아니야?

    뭐, 남의 연애사에는 쥐뿔도 관심 없으니까 아무래도 좋지만.

    "과연······하긴 그렇겠지. 너희처럼 이성을 사랑하게 됐으면서도 너희와 달리 바프라를 떠나려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이니까. 그렇다면······레온."

    "어, 어엉?"

    내가 갑자기 자기 이름을 제대로 부르자 놀랐는지, 쓰레온은 멍청한 목소리를 흘렸다.

    얼빠진 표정 짓지 마 이 멍청아.

    "이렇게 되면 조금 계획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어."

    "흠······그렇군."

    내가 눈치를 주면서 그렇게 말하자, 쓰레온은 턱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행히 분위기 파악은 제대로 한 모양이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고 심각한 표정 짓는 거냐?

    뭐, 저래 주는 편이 나도 편하지만 말이야.

    "좋아. 그럼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서 잘 처신할게. 아마 믿음을 얻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신. 유리. 우선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우릴 데려다주지 않겠어? 이왕이면 너희가 여기까지 오면서 도움받지 않은 곳이 좋겠어."

    "뭐? 그렇게 되면 바프라의 중심지로 되돌아가게 될 텐데?"

    그야 그렇겠지. 얘들도 그 나름대로 지위가 있었으니까. 원래 사람들은 끼리끼리 논다고 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최고위급 간부까지는 소문으로밖에 못 들어본 모양이지만, 면식이 있는 다른 클럽 사람들도 그 나름대로 지위가 있는 사람이겠지.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는 건, 당연히 바프라의 안방에 제 발로 기어들어 가는 꼴이 될 거다.

    지은 죄가 있는 신은 살짝 겁먹은 표정을 지었지만, 유리는 오히려 당돌하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되물었다.

    "어쩔 생각이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자는 거지. 추적자들도 설마 너희가 다시 바프라의 중심지로 돌아갔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할 거야. 오히려 그쪽에서 활동하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어."

    "제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요?"

    대충 얼버무리려고 했지만, 유리는 오히려 더욱 눈매를 날카롭게 빛내며 날 다그쳤다.

    쳇. 귀찮기는. 뭐, 그래 봤자 귀하게 자라다가 가출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다. 내 상대는 아니지.

    "아까 우리가 말하는 거 들었잖아? 계획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거야. 어쩌면 너희가 굳이 바프라를 배신하지 않는 쪽으로 얘기가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어때? 너희도 그러는 편이 더 좋지 않아?"

    "어떻게 말이죠? 그리고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 당신이 처음 만나서 말했던 임무와는 상반되는 것 아닌가요? 당신에게 그럴 권한이 어디에······."

    "전혀 상반되지 않아. 우리 계획은 바프라에서 사랑에 고통받고 있는 자들을 구원해주는 것이니까. 바프라를 배신하지 않고 그 뜻을 이루게 해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면 그만이야. 그리고 권한? 지금 권한이라고 했어?"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유리에게 피식 웃어 보인 후, 나는 쓰레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온. 그것 좀 보여줘."

    "무, 뭐?"

    물론 쓰레온은 그런 내게 당황하기만 했지만.

    그래. 이런 즉흥극에 대응할 수 있으면 네가 쓰레온이 아니지. 기대도 안 했다 인마.

    "뭘 그렇게 당황해? 보여줘도 상관없잖아? 나도 딱히 이 녀석들을 완전히 신뢰하겠다는 게 아니야.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그러니까 그냥 보여주자고. 우리가 어디 가문의 사람인지."

    나는 아예 대놓고 신과 유리에게 까불지 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쓰레온에게는 가문의 징표를 요구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제아무리 쓰레온이라도 내가 뭘 원하는지 대충 눈치를 채겠지.

    저래 봬도 유서 깊은 용사 가문의 가주다. 그 몸에 자기 가문을 상징하는 물건을 하나 정도는 달고 다니겠지.

    "그렇군······."

    쓰레온은 그제야 쓸데없을 정도로 눈을 날카롭게 희번덕이면서, 자신의 목 쪽에 손을 넣어 펜던트 하나를 꺼내 펜던트를 신과 유리의 얼굴 앞에 들이밀면서, 살짝 깔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해줬다.

    "너희도 이 문장이 무얼 의미하는 것 인지 알고 있겠지?"

    "허업!"

    "그, 그건······!"

    그리고 문장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신은 물론 지금까지 앙칼진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마저도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바르르 떨기까지 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내 도박은 성공한 건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확률은 반반이다 싶었어. 그래도 쓰레온네 성이랑 사라네 엄마 성이랑 똑같은 거 보고 혹시나 한 거지.

    성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는 걸 보니,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도 그대로 쓰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

    그리고 그런 내 도박은, 멋지게 성공했다는 얘기다.

    만약 실패했으면 상당히 귀찮아졌겠지만, 성공했으니 됐잖아?

    "조, 조금 모양이 다르기는 하지만······그 문양은 플리투스 가문만이 쓸 수 있는 문양!"

    아, 조금 다르기는 다르구나. 그래도 쓰레온네 조상이 여신님 쪽에 붙으면서 가문 문양도 쓰던 걸 그대로 쓰기는 조금 그러니까, 살짝 고쳐서 쓴 건가?

    휴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하, 하지만! 하지만 용사는 리리안 플리투스를 마지막으로······!"

    "그, 그래! 그냥 모양을 본따서 만든 위조물 따위! 누구라도······!"

    이 세계에서 용사의 존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갖는지, 신과 유리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현실을 부정하려고 했다.

    "야. 우리 나이가 어떻게 보이냐?"

    물론, 나는 친절하게 그 둘의 눈을 현실로 돌려줬지만.

    "뭐? 그야 우리와 비슷한 나이로······."

    "그런 우리가 그 귀검이라는 할아범을 가볍게 찍어눌렀는데, 뭐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었냐? 이렇게 젊은 우리가, 그것도 고작 5명이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맡고 적대 세력인 바프라의 한복판에 멀쩡하게 있는데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정말로 안

    들었어?"

    여기는 다른 것보다 힘이 최고인 전쟁광들의 세상.

    아무리 사랑을 좇아 바르파를 탈출하려고 했던 이 둘이라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사상 자체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긴말할 필요 없이, 실력으로 인정하게 하는 게 제일이겠지.

    여기서 굳이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정말로 용사가 없는데도 우리 세력이 플리투스의 이름을 자처했다고, 그냥 순수하게 할머니의 뜻을 따르고자 플리투스의 이름을 계승한 것뿐이라고, 진심으로 순진하게 그렇게 믿은 건 아니겠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하, 할머······아, 아아······아아아······그, 그럼 정말로······."

    아까의 따박따박 따지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유리는 다리에 힘까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떨리는 눈동자로 우리를 올려다봤다.

    좋아. 그럼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줄까.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하도록 하지. 여기 레온 플리투스. 그리고 나는 원 플리투스라고 한다."

    ······야. 쓰레온.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너만 플리투스라고 소개하면 네가 우리 대장처럼 되어버리잖아.

    너 그렇게 되면 혼자 감당할 수 있기는 하냐? 지금도 내가 즉흥적으로 내뱉는 임기응변에 따라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나도 플리투스가 될 수 없는 게 아니야.

    사라가 할머니 성을 따라서 사라 플리투스가 되고, 내가 사라한테 데릴사위 자격으로 들어가면 원 플리투스가 되는 것도 딱히 이상한 건······어, 억지인 건 나도 아니까 그딴 시선으로 보지 마!

    "그래서, 아까 권한이 뭐가 어쨌다고?"

    "다, 당시······당신들은······."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이 세계에서 용사는 절대적인 존재인 모양이다.

    아마 위쪽 세계에서 성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존재겠지.

    뭐,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가 있을 땐 찍소리도 못하던 놈들이 리리안 플리투스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기가 최고라면서 들고 일어난 거다.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뭘 그렇게 겁먹어? 딱히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적어도 너희가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 한은 말이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유리를 안심시키듯,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쓰다듬어줬다.

    "아, 아아······."

    아마 무섭겠지. 눈앞에 절대적인 존재인 용사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두려움을 강제로 중화시켜버릴 정도로, 내 매력 수치가 주는 효과도 절대적이었다.

    특히나 이 두 녀석은 나보다 레벨이 한참 낮으니까 더욱 그랬다.

    내가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져 준 것만으로도, 유리의 입에서 김빠진 소리가 흘러나오며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던 그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그리고 원래라면 이런 상황에서 악을 지르며 대들었을 신도,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런 내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제였으면, 아니. 바로 조금 전이었어도 내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바락바락 소리 질렀을 텐데.

    이거, 처음부터 이렇게 기를 죽여 놓을 걸 잘못했나?

    뭐, 결과적으로 확실히 밟아놓게 됐으니 상관없지만.

    지금까지 자기가 우리한테 한 행동을 떠올리면서, 앞으로는 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할 테니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2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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