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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70화 (954/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0화 >

    "응. 그럼 일단 그렇게 가볼게."

    필사적으로 성적 정체성을 사수한 격정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아침.

    나는 이른 아침부터 디아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 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한 안부 인사를 마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지만, 디아나는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열심히 들어줬다.

    나는 우선 신과 유리를 만나면서 알게 된 이 세계의 추가적인 정황을 전달해주고, 이어서 어제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의 검토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온 대답이, 우선은 그대로 가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생각할 시간이 무척이나 짧았기 때문에, 디아나도 내일까지 좀 더 검토해 보겠다는 첨언을 덧붙였지만.

    "그럼 디아나.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니까······."

    "음. 몸조심하게. 아, 그리고!"

    반지에서 발하는 빛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보고 인사와 함께 통화를 끊으려는 찰나, 디아나가 뭔가 생각난 듯 다급한 목소리로 날 멈춰 세웠다.

    "응?"

    "이런 식의 연락 말이네만, 가능하면 앞으로는 아침보다는 저녁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

    "아, 미안. 너무 이른 아침부터 깨워버렸어?"

    "그런 것은 아니네. 다만, 다들 어제는 밤늦게까지 자네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대화 가능한 시간이 짧으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기는 힘들겠네만, 이왕이면 모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자네에게도 더 좋지 않은가?"

    과연. 그런 거였나. 하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모두 모여있기 힘드니까.

    그건 그렇고 디아나도 디아나다.

    아무리 서로 친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서로 연적이라는 인식은 남아있고 특히 사라 하고는 아직도 틈만 나면 투닥거리니까, 이런 건 혼자 독점하고 싶을 법도 한데.

    그런데도 디아나는 꼭 이런 상황에서 다른 애들도 챙겨준다니까.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생색도 전혀 내지 않고.

    너무 착해 빠졌다고 해야 할지, 역시 최고 연장자라고 해야 할지.

    "흐음."

    "뭐, 뭔가?"

    의지와 관계없이 흐물거리는 입가를 필사적으로 다잡고 있자, 반지 너머로도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는 듯 디아나의 목소리에 살짝 당황스러움이 섞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사랑해."

    "가, 갑자기 뭔가?!"

    "그럼 앞으로는······."

    반지 너머로도 부끄러워하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디아나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반지가 발하던 희미한 불빛이 결국 완전히 꺼져버리고 말았다.

    쳇.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짧은 거 아니야? 뭐, 불평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만.

    "우으응······."

    빛을 잃은 반지를 바라보며 혼자 투덜거리고 있자, 지난밤의 격렬한 행위로 지금까지 기절한 듯이 잠들어 있던 실비아가 귀엽게 눈을 비비며 몸을 뒤척였다.

    "미안. 깨웠어? 아직 시간 있으니까 조금 더 자도 돼."

    하지만 내가 사과의 의미를 담아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렇게 말해주자.

    "······히우으으······."

    실비아는 손으로 눈을 비비는 자세 그대로 잠깐 혼자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하더니, 결국 다시 스르르 무너지며 잠이 들고 말았다.

    왠지 잠이 든 게 아닌 것 같은 느낌도 없잖아 있었지만, 뭐 괜찮겠지.

    아무튼 그렇게 밤부터 아침까지 우리 애들의 기운을 받으면서 활력을 되찾은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뭐냐 그 얼굴은."

    뭐, 그래 봤자 종일 봐야 하는 놈들의 얼굴이 이래서는, 모처럼 충전해둔 활력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지만.

    "하아······아무것도 아냐."

    쓰레온아. 제발 아침에 거울이라도 보고 나와라.

    너라면 그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 이런 표정이 안 되겠냐?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실비아가 준비한다면서 스패츠 안에서 쌍두 딜도를 다시 삽입하는 걸 보고 흥분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사람의 기분을 시궁창으로 처박아주다니. 어떤 의미로는 저것도 재능이다. 재능이야.

    "그것보다."

    나는 쓰레온에게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신과 유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제 준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표정까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둘 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이 녀석들, 쫓기는 몸인 주제에 제일 늦게 내려왔단 말이지.

    "결국 했냐?"

    "하, 할 리가 없잖아! 우리가 바······! 크윽······우린 어디까지나 바프라를 배신한 거지, 위대하신 그분의 뜻을 저버린 게 아니야!"

    툭 던져본 질문에 과하게 흥분하면서, 그래도 일단 쫓기는 몸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신은 자신들의 결백함을 토로했다.

    그분이라는 건, 전쟁 신을 말하는 거겠지? 여기선 그렇게 부르는 건가.

    "그러니까 어제도 말했잖아. 그거 좀 한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저버리는 게 아니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플리투스는 그분의 최후마저 잊은 거냐?! 그분이 그 더러운 걸레 신에게······."

    "바보야. 생각해봐. 그 걸레 신의 목적이 뭐야? 왜 그렇게 섹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여신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아무튼. 아시죠?

    "뭐? 그게 무슨 뜻이지?"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내 말에, 신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미끼를 덥석 물었다.

    얘도 어지간히 유리랑 하고 싶은 모양이다.

    뭐, 난 충분히 이해한다. 남자의 본능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암.

    "걸레 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아이를 많이 낳게 하는 것이지. 섹스를 그렇게 권장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다시 말해서······."

    "크하악!"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나도 덩달아 목소리를 내리깔고 달콤한 말로 신을 구슬리려고 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웬 덩치가 공중에서 우리 식탁 위로 내리꽂혔다.

    덩치가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식탁에 앉아서 쿨하게 젓가락 든 손만 올리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아니. 저쪽도 우리처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런 세계니까. 남자겠지 뭐.

    "네, 네 노오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아무튼 그 쿨내 심하게 풍기는 남자를 가운데에 두고, 힘깨나 쓰게 생긴 우락부락한 마초 남들이 한껏 성을 내며 몰려들었다.

    목소리 보니까 이 덩치가 한 방에 날아가는 걸 보고 벌써 쫄았구만.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아니면 수에는 장사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쿨남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기는 했지만.

    뭐라고 할까. 이것도 무협의 객잔에서 자주 보이는 클리셰 중 하나네.

    아니. 여기도 생긴 건 전형적인 판타지 풍 술집 겸 식당의 모습이지만.

    "후우. 조금 조용히 해주지 않겠나? 모처럼 코끝을 자극하는 부드러운 차를 마시며 따스한 햇살이야. 귀를 더럽히는 자네들의 목소리만 없으면 완벽한 아침이 될 것 같군."

    아무튼 그렇게 마초 남들에게 둘러싸이고도, 쿨남은 어디까지나 쿨했다.

    후드 안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보이스가 조용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모든 이들의 귀로 전달됐다.

    아니. 그러니까 거기 식당 한가운데잖아. 햇살이고 뭐고 창문에서 거기까지 빛이 닿지도 않는데 뭔 햇살 타령이야.

    그렇게 생각한 건, 분명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개소리······크하아악!"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마초 남 중 하나가 또다시 폭발하며 쿨남한테 달려들었고, 이번에도 역시 쿨남은 가볍게 젓가락을 움직여서 덤벼드는 남자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 반대쪽으로 던져버렸다.

    그래. 이번에도 우리 식탁 쪽으로 말이다.

    물론 이번에는 처음부터 상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식탁으로 날아온 덩치 때문에 다시 한번 음식이 튀는 일은 없었지만.

    저 놈, 혹시 우리한테 시비 거는 건가?

    덩치를 공중에서 쳐내 바닥으로 떨군 후, 나는 그런 합리적인 의심을 품으며 계속해서 상황을 주시했다.

    일단 계속 보긴 보는 거냐고? 그야 그렇지.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하잖아.

    "커헉!"

    "끄악!"

    그런 와중에도 마초맨들은 공중을 부양해 각자 다른 테이블로 떨어지며 식당을 박살 내고 있었고, 결국 식당 안에 있는 식탁들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야 겨우 소동은 진정됐다.

    "후우. 이 정적에 걸맞은, 좋은 아침이다."

    쿨남······아니. 중2병 환자는 그제야 젓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찻잔을 들어 올려 그 향기를 한껏 음미한 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 올려 햇빛을 가리는 제스처까지.

    눈부신 아침 태양을 찬미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저 중2병이 있는 곳은 여전히 햇살이 닿지도 않는 식당 한가운데였다.

    물론, 고개를 들어 올린다고 해서 태양 같은 게 보일 리도 없었다.

    저거 대체 뭐 하는 새끼야.

    "크읏. 이런 나조차도, 역시 태양을 직시하는 것은 어렵군. 아무리 뛰어나 봤자 결국은 인간. 대자연의 앞에서 인간이란 어찌하여 이토록 작은 존재라는 말인가."

    그러다가 손발이 오글거리다 못해 시공간이 뒤틀리는 것 같은 대사를 한 번 더 내뱉고 나서, 중2병 환자는 찻잔에 남은 차를 후루룩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장. 오늘이라는 아침에 걸맞은 좋은 차였소. 분명 당신도 이런 차를 우려내기 위해, 그 손이 부르트도록 수십 년간 지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거겠지."

    "아, 아뇨. 그 차는 어제 막 들어온 알바가······."

    "대금은 여기 있소. 그럼."

    주인장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것처럼, 중2병 말기 환자는 카운터 위에 돈을 몇 푼 던져주고는 식당을 뒤로하려 했다.

    물론, 식당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것에 비하면 턱도 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소, 손님! 이대로 가시면······!"

    "잠깐 기다려 인마."

    "음?"

    식당 주인의 애달픈 목소리는 쿨하게 무시하는 놈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나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면서, 놈은 무슨 일이냐는 듯 내게 턱짓을 했다.

    "남의 고귀한 식사를, 그것도 두 번이나 망쳐놓고 뭘 도망가려고 하고 있어. 제대로 낼 건 내고 가."

    솔직히 말해서, 그깟 음식값 몇 푼 정도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내가 돈을 못 버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왠지, 왠지 그냥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직감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직감에 몸을 맡겨 행동하기로 한 거다.

    원래 보통 무협에서도 이런 만남이 계기가 되어서 사건이 확대되거나 하잖아?

    "흠······."

    후드 사이로 유일하게 엿보이는 가는 턱선에 손을 가져다 대고, 놈은 우리 일행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힐끔 고개를 돌렸다.

    "잠깐 같이 걷지."

    그리고는 갑자기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대로 날 이끌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야. 식당은 좁으니까 밖에서 한 판 해보자는 거야?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하며 전투 준비를 한 나였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자 이걸 봐. 아니. 몸으로 느껴 봐.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 인간사의 문제는 전부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대자연의 위대한······."

    "됐고 돈."

    "······."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딱 말을 끊어버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중2병 말기 환자는 잠깐 말을 멈췄다.

    물론 어디까지나 아주 잠깐으로, 다시 입을 나불나불 대기 시작했지만.

    "땅 위로 시선을 돌려봐. 저기 집 앞에 물을 뿌리는 도구점의 아이도. 이제 막 장사 준비를 시작하려는 마석상의 어르신도. 각자 저마다의 고민을 안고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그 고민에만 얽매이지 않고, 저마다의 하루를 살기 위해 저렇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거야. 그러니 자네도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좀 더 마음은 편하게 먹고 이 자유로운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게 어때? 자, 이렇게. 나처럼."

    헛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진짜로 바람을 타듯이 몸을 움직이는 중2병이었지만, 물론 그런다고 해서 내가 그 심리전에 말려들 리가 없었다.

    "너 때문에 식당 주인장은 그 하루를 못 살게 생겼는데 무슨 헛소리······."

    아니. 말려들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바람을 나부끼며 폴짝이는 놈의 몸이 점점 옅어지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씹! 어딜 도망가려고!"

    "하하하핫! 미안하게 됐어! 주인장에게는 대신 사과해줘!"

    황급히 놈의 옷깃을 잡아채려고 했지만, 내 손은 그 몸을 관통하며 허망하게 공중을 가르고 말았다.

    "내가 너 대신 사과를 왜 해?!"

    분통을 터뜨려봤지만, 점점 흐려지는 중2병의 몸을 막을 방법은 내게 없었다.

    막을 방법은 없었지만, 이건 어떨까?

    뭐 하는 새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보내는 건 내가 열이 뻗쳐서 안 되겠다.

    어차피 나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으니, 저쪽도 내 정체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

    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나는 녀석이 딱 들어오기만 할 정도로 작은 범위에 성역 선포를 발동했다.

    "으윽?!"

    그리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놈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70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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