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7화 >
"알고 있어. 우리의 각오를······보여주면 되는 거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신은 그렇게 말하고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 마치 지금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매서워서, 나는 새삼 여기가 전쟁에 미친 놈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약한 놈마저도 이런 독기를 품고 있다니. 여신님이 괜히 어중간한 레벨로는 접근도 하지 못하게 봉인해 둔 게 아니었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겁먹었다는 건 아니다.
저 독기를 잘 이용만 하면 오히려······.
푸욱!
으, 응? 푸욱? 게다가 뺨에 튄 이 끈적끈적하고 미지근한 감촉은······.
"으악?! 씨······!"
잠깐 딴생각을 한 사이에, 녀석은 손에 쥐고 있던 검으로 바닥에 쓰러져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찌르고 있었다.
그래. 아까 이 녀석들을 덮쳤던 걔들 말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안 죽였거든.
그야 그렇잖아? 던전 바깥에서는 아무리 싸움이 벌어졌다고 하더라도 무턱대고 사람을 죽이고 보는 일은 없으니까. 그러니 당연히 실비아나 세 떨거지의 머릿속에는 죽인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모처럼 힘들여서 제압해둔 녀석들을, 이 망할 것이 전부 죽여버린 거다. 그것도 전원 깔끔하게 머리를 꿰뚫어서.
눈만 힐끔 돌려서 실비아와 세 떨거지를 살피니, 역시나 다들 딱딱하게 굳어져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렉과 듀크 모험가 콤비보다는 원래 성에서 일하며 사람 상대하는 일을 하던 실비아와 쓰레온이 그나마 괜찮해보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그나마 그렇다는 것뿐이었다.
다시 말해 지금 저 녀석한테 제대로 태클 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거지.
"뭐 하는 거야?! 너 돌았어?!"
"조국과 싸울 각오를 보고 싶었던 거잖아?"
게다가 이 녀석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왜 화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뚱하게 날 쳐다봤다.
이거 진짜 사이코패스 아니야?! 여기 새끼들은 다 이런 거야?!
"누가 이런 각오가 보고 싶대?! 이 아까운 걸 왜 죽여?!"
"아깝다니? 살려두면 오히려 방해되잖아."
"죽이면 우리 위치가 들키잖아! 게다가 조력자가 있다는 것도 들켜버렸다고! 너희 둘이서 얘들을 이렇게 깔끔하게 머리만 뚫어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추격대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아, 그, 그런가······그러면 어떻게 하면······."
녀석의 멱살을 틀어잡고 나무에 밀어붙이며 일갈하자, 겨우 녀석도 상황을 인지한 듯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꼴에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신의 멱살을 잡고 나무에 처박히자 유리가 그만하라는 듯 내 팔에 매달려 와서, 그게 또 내 신경을 건드렸다.
"나한테 묻지 마! 젠장!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데!"
신의 몸을 가볍게 바닥에다가 내팽개치고,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은근슬쩍 실비아의 앞에 서서 그 눈에 시체가 보이지 않게 하면서.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화난 건 아니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화가 안 났다는 건 아니고, 방금 내 모습에 조금 과장이 들어갔다는 얘기지.
‘싸우지 말고 섹스해 섹스!’를 설파하기 위해 온 우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런 걸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정도로 나는 순진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이 녀석들과 앞으로 얼마나 더 같이 있어야 할지 모르는데, 그때마다 매번 이런 식이면 곤란하잖아?
그리고 이렇게 은근슬쩍 힘을 과시함으로써 기를 죽여버리는 효과도 있고.
"그······미, 미안하다······."
저거 봐. 효과 좋지?
하지만 사과하는 모습이 무지막지하게 어색한 걸 보니, 어지간히 귀하게 자란 모양이다.
아까 별생각 없이 제압한 놈들을 찔러버린 것도 그렇고, 이것들 괜히 짐만 되는 게 아닌지 몰라.
뭐, 일단 여기 상황을 자세히 모르는 우리로서는, 이런 녀석들이라도 데리고 다니면서 정보를 얻어야 하겠지만.
"······이대로 작전은 속행할 거다. 예상보다도 더 위험한 임무가 되겠지만, 너희가 자초한 일이야. 나중에 불평하지 마라."
"작전?"
고개 갸웃거리지 마라. 이 살인광아.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어야지.
하아. 진짜 벌써 우리 애들이 그립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바로 알아들어 줬는데.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아, 그, 그런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더 구하는 건가."
내가 보충설명을 해주고 나서야, 녀석은 겨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있잖아? 너도 아는 사람이 없지 않을 텐데?"
보아하니 여기 녀석들은 남녀가 같이 어울리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걸 금지한다고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섹스라면 모를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섹스를 금기시하는 것부터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거기에 더 나아가서 남녀 간의 사랑까지 막고 있는 거다. 눈앞에 있는 커플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반발이 없을 리가 없
다.
원래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금주령이 매번 실패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지.
사람의 본능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까 이 녀석들을 보고, 생각보다 일이 쉬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여신에 대한 반발심에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에 대한 반발심을 겹치고 쌓아서 세운 댐에, 조그만 구멍 하나만 뚫어주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댐은 무너져서, 지금까지 막혀있었던 만큼 그 여파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겠지.
"그럼 가자. 이 녀석들에게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된 만큼, 너희가 도움 되기를 기대하지."
즉흥적이지만 꽤나 그럴듯한 작전에 내심 흡족한 미소를 띠면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어차피 살려뒀어도 입을 열 사람이······."
"날 무시하지 마라. 입을 열게 할 수단은 무궁무진하게 있으니까."
아직도 자기가 도련님인 줄 아는지 말꼬리를 무는 사내새끼를 가볍게 밟아주고, 우리는 커플의 안내에 따라 마을로 향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에서 마을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희미한 등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의외로 꽤나 멀쩡해 보였다.
전쟁신의 종족들이 사는 곳이니, 뭔가 좀 더 살벌한 곳을 기대했는데.
뭐, 생각해보니 던전 위의 세계도 모든 사람이 섹스 전문가인 건 아니니, 여기도 비슷한 건지도 모른다.
이런 세계라도, 전쟁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거지.
"그럼 우선은······."
마석을 교환해서 이곳의 돈을 얻는 게 우선인가.
여기에도 몬스터는 있고 마석의 효용성도 알려졌을 테니, 분명 마석을 취급하는 곳이 존재하기는 할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옮기려고 한 나였지만, 또다시 신이 발목을 잡았다.
"잠깐 기다려."
"뭐야 또?"
"설마 이대로 마을에 들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왜? 누가 너희를 알아보기라도 할까 봐?"
"······."
진짜냐. 이쯤 되니까 슬슬 이 녀석들을 버리고 새로 협력자를 구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드는데.
"너희 나름 높으신 분의 자제였다면서. 망신살이 뻗치긴 싫을 테니, 수배 같은 거 없이 조용히 해결하려 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너희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그 할아범을 보낸 거잖아?"
"할아범이라니······. 너 설마 귀검 할을 모르는 거냐?!"
뭐야. 그 멍청한 칭호는. 이름은 서구식이면서 왜 별칭은 한자어인 건데. 그러니까 괜히 더 멍청하게 들리잖아.
그리고 할아범, 그런 멍청해 보이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네임드였어? 쓰레온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눌리던데. 아, 찍소리는 했던가? 뭐, 아무렴 어때.
"난 나보다 약한 놈의 이름 따위 기억하지 않는다. 그렇지 쓰레온?"
"누가 쓰레온이라는 거냐?!"
쳇. 맞장구 좀 쳐주면 어디 덧나냐. 그래서 네가 쓰레온인거야 이 쓰레온아.
뭐, 그런 것보다.
"그래서, 설마하니 너희도 나름 유명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암갈대의 신과 유리라고 하면······."
놀고 있네. 암갈대는 또 뭐야. 무협에서 후기지수만 모아놓고 몇룡몇봉인지 하는 의미 없는 칭호 붙이는 그거 말하는 거냐?
그런 거 보면 보통 제대로 된 놈들은 끽해야 하나둘 정도고 나머지는 주인공한테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엑스트라들이던데.
"관심 없고. 정 불안하면 이거나 뒤집어쓰고 있어라. 아니. 일단 우리도 뒤집어쓸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후드를 여러 개 꺼내서 각각 하나씩 나눠줬다.
"무?! 가, 갑자기 어디서?!"
신과 유리는 그걸 보고 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전원이 칙칙한 후드를 두르고 마을에 접근하자, 마을 사람들이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를 경계했다.
그야 그렇겠지. 모습은 가렸어도 후드 안에서 풍겨오는 진한 혈향까지 감출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 아까 저 망할 놈이 열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의 얼굴을 뚫어버렸잖아. 덕분에 전신이 피범벅이거든. 아무리 던전 안에서 사는 놈들이라도 할지라도, 몬스터와 달리 사람은 마석만 남기고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라서 말이야.
실은 이것 때문에 아까부터 찝찝해 죽을 지경이었다.
빨리 돈부터 만들어서 여관 잡고 씻으러 가야지.
예상대로 마석을 돈으로 바꿔주는 곳은 이곳에도 존재해서,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돈을 챙겨 여관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1층이 식당으로 되어있고 그 위가 여관으로 되어있는 평범한 여관. 그 카운터 앞에 서서, 나는 대표로 계산하기로 했다.
솔직히 괜찮은 집 자제라는 저 커플이 대신 계산해주는 것도 살짝 기대했지만, 저 망할 것들은 우리한테 대줄 여관비는커녕 자기 여관비도 없다는 모양이다.
돈 자체를 안 들고 온 건 아니지만, 도피행 중 떨어뜨렸다나 뭐라나.
저 망할 커플의 여관비까지 대주는 건 매우 불쾌했지만, 이것도 투자라고 생각하자.
진짜 도움 안 되기만 해봐라. 절정 속박 걸고 성자의 파동 하나씩 박아준 다음 어디 밀실에 가둬버릴 테니까.
"방은 세 개면 되겠지? 나랑 실비아. 신하고 유리. 그리고 나머지 셋."
빨리 방 잡고 들어가서 쉴 생각이었던 나였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서마저 또 태클이 들어왔다. 그것도 예상외의 인물이.
"이런 미친! 내가 잘 때까지······!"
"무,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솔직히 쓰레온이 발광할 것은 조금 예상했지만, 저 망할 놈은 또 왜 발광이지?
"왜 또?"
"나, 남녀가 어떻게 함께······!"
일단 모처럼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는지, 놈은 목소리를 낮춰서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더러운 사내새끼가 가까이 붙지 마라.
"뭐야.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을 속삭여놓고. 너희 설마 안 해봤냐?!"
"하! ······할 리가 없잖아!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증오스러운 걸레 신의······."
우와아······우리 여신님 인식이 진짜 그 정도 수준이었어?
여신님. 혹시 엿듣고 계신 거면 귀 막고 계세요. 여기 애들 못 쓰겠네.
"바보가. 걸레 신의······아니. 귀찮으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오늘은 그냥 쉬자."
여신님. 혹시 귀 안 막고 계실까 봐 말하는 건데요. 제가 말한 걸레 신은 그냥 말맞춰준 것뿐이니까요. 전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남녀가······!"
"아 귀찮아 죽겠네! 그냥 너희가 알아서 손만 잡고 자면 그만이잖아! 싫으면 너희가 돈 내서 각방 잡던가!"
"으윽······! 이, 이까짓 여관······유, 유리.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까."
아무리 이 녀석이라도 무일푼인 입장으로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는지, 녀석은 결국 유리에게 가서 필사적으로 아무 일도 없을 것을 장담하고 있었다.
저거 잘하면 오늘 안에 동정 처녀 졸업하겠는데. 뭐, 그러든 말든 별로 관심도 없지만.
"그럼 방 세 개로."
그리고 신에게 타이밍을 빼앗겨 별다른 항의도 못 해본 쓰레온이 다시 발광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방 세 개를 잡고 열쇠를 각각 던져준 다음 실비아를 데리고 우리 방으로 향했다.
드디어. 드디어 실비아 테라피를 만끽할 수 있어!
세 쓰레기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귀찮은 게 둘이나 더 붙어서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던지!
게다가 옆에 실비아가 있는데도 껴안고 있을 수도 없어서, 진짜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다.
"실비아아아!"
"네, 네햐으으읏?!"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실비아의 몸을 껴안고 그대로 그 복슬복슬한 머리 위에 뺨을 마구 비벼댔다.
우리 실비아의 머리는 숏컷을 해도 복슬복슬하구나.
게다가 이 떨림. 그래. 이게 바로 실비아 테라피지. 하아. 정신이 안정된다. 이대로······.
"야! 구원!"
침대에 다이빙하려고 한순간, 방문을 박차고 쓰레온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심지어 귀검인지 뭔지 하는 노친네랑 싸울 때조차도 전혀 품지 않았던 살의를 진심으로 품었다.
"······잠깐만 기다려. 실비아. 자기 전에 쓰레기부터 쓰레기통에 정리하고······."
"아, 안됩니다아! 참으셔야 합니다아!"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7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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