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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66화 (950/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6화 >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보니, 역시나 그곳에서는 사람들 간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것도 남녀 한 쌍이 여러 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양새로.

    전투의 양상은 누가 봐도 명확해서, 커플처럼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구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머릿수 차이로 지고 있다는 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커플 둘이서 열심히 노인 하나를 합공하고 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커플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는 남자들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 전투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고 그저 팔짱을 낀 채 히죽히죽 웃으며 노인과 커플 간의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아직 꽤 거리가 있다고는 하지만 여남은 명의 남자 중 아무도 우리의 접근을 눈치 못 채고 있을 정도였으니, 놈들이 얼마나 상황을 낙관해서 방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끼어든다면 누구 편에 붙어줘야 할지 또한 불 보듯 뻔했다.

    내가 딱히 정의의 사도라는 건 아니지만, 아니. 여신님의 사명을 받고 온 거니까 정의의 사도가 맞는 건가?

    아무튼 두 패거리 중 어느 쪽이 악당인지는 명확하잖아?

    "구해주죠!"

    "잠깐 기다려. 뭔가 이상해. 조금 더 상황을 보자."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정의감 하나만큼은 남들 이상인 로리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듀크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달려나가려고 했지만, 나는 조용히 팔을 뻗어 듀크를 가로막았다.

    누가 봐도 악당은 노인과 그 패거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더러운 사내새끼들로만 구성된 그룹을 구해주기 위해 몸을 던질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조금 더 살펴보고 상황 파악을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당장 위험한 상황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저 노친네는 쉽게 끝낼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까.

    "크하하하! 벌써 포기하는 거냐? 네놈들의 ‘사랑’이라는 것은 고작 그 정도 수준이었나? 그 ‘사랑’이라는 녀석을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커플의 공세를 여유롭게 받아치고, 그걸 넘어서 가지고 놀면서 도발까지.

    나이도 먹을 대로 먹은 것처럼 보이는 양반이 대체 얼마나 기력이 좋은 건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덕분에 멀리에 있는 우리에게도 그 대화 내용이 똑똑히 들려왔다.

    과연. 그런 거였군.

    어쩐지. 로엘의 말에 따르면 이 근방은 여자의 신분이 거의 노예처럼 다뤄지고 있는 곳인데, 남녀 둘이 저렇게 힘을 합쳐 싸우고 있다는 게 뭔가 이상하다 싶었거든.

    처음에는 유일하게 여자에 관대하다던 플리투스의 세력이 침략해온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또 수가 너무 적었으니까.

    하지만 방금 전 대사로 대충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라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게다가 저 싸우는 모습을 보니, 두 패거리 다 레벨이 우리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애널라이즈를 써서 두 패거리의 레벨까지 꼼꼼히 확인해 본 다음, 나는 드디어 실비아와 나머지 떨거지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가자. 누굴 도와줘야 하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리고 그 이후의 전투는, 딱히 길게 묘사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노인의 레벨이 가까스로 200을 넘기는 수준에, 나머지는 기껏해야 150대 수준이었으니까.

    "뭣?! 네놈들은 뭐냐?! 크아악!"

    같은 흔해빠진 대사밖에 남기지 못한 채, 노인과 그 떨거지들은 손쉽게 제압되었다.

    솔직히 전쟁신의 종족들이라고 하니 하나같이 무식한 전투력을 자랑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의 긴장한 것이 조금 억울할 정도로 손쉬웠다.

    이 정도면 굳이 내 성자 스킬을 쓸 필요도 없잖아.

    그야 물론 이 녀석들은 하나같이 전투직 레벨과 레벨이 똑같으니, 노친네 같은 경우는 내가 성자 스킬 없이 1대1로 상대했으면 꽤 고생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내가 굳이 그렇게 싸워줄 필요도 없고, 그냥 쓰레온한테 맡기면 가볍게 정리되는 수준이다.

    이거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훨씬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전투뿐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말이지.

    당황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커플에게 시선을 주면서, 나는 은근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당신들은······?"

    도와준 건 고맙지만, 정체도 모르는 사람에게 바로 긴장을 풀 정도로 녹록하지는 않다는 듯, 커플 중 남자가 우리에게 어색한 자세로 칼을 내밀며 경계했다.

    "사랑을 위해 지위도 버리고 도망 간다라······."

    물론 저런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해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딴소리를 하며 커플을 위에서 아래로 쭉 훑어봤다.

    그러자 더욱 경계심이 강화됐는지, 남자는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쥐었다.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검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뭐,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자신들은 한 명을 상대로도 그렇게 고생했는데,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여려 명을 쓸어버리는 걸 조금 전에 눈앞에서 똑똑히 봤으니까.

    "훗. 좋군."

    그리고 그 상태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나는 피식 웃으며 먼저 몸에서 힘을 빼보였다.

    방금의 반응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전부 얻었으니까.

    내 지위도 버리고 도망간다는 말을, 둘은 전혀 부정하지 않았으니까.

    그거,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여자도 같이 협공했었잖아? 즉, 여자도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검사였다는 얘기다.

    아무리 전쟁신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전쟁에 전혀 관계없는 사람은 존재할 거고,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제대로 싸울 줄 모를 거다.

    그리고 로엘의 말에 따르면 이 근방의 여자들은 대부분 전투와는 무관한 삶은 살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저렇게 싸울 줄 아는 여자가 있다는 건, 십중팔구 높으신 분의 자식이라는 얘기 아니겠어?

    아무리 전쟁에 미친 놈들만 있는 세계라도, 자기 자식은 예뻐 보이는 게 사람 마음일 테니까.

    높으신 분의 자제는 설령 여자라고 할지라도 노예처럼 다뤄지지 않고, 어느 정도 전투 기술을 습득하며 남자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삶을 살겠지.

    그리고 그런 여자랑 사랑하는 사이가 될 정도로 알고 지내려면, 당연히 남자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그렇게 생각하고, 블러핑을 걸어봤던 거다.

    그리고 내 예상은 멋지게 적중했다는 얘기지.

    디아나가 맨날 자신의 추측을 설명해줄 때마다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걸 듣고 있었으니, 나도 덩달아 머리가 좀 좋아진 건지도 모르겠는걸.

    "······좋아? 설마 당신들은! 플리투스의······!"

    내 반응에 처음에는 조금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다가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듯, 두 남녀의 눈에서 희망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과연. 둘의 도피처는 여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플리투스였다는 얘기인가.

    그럼 적당히 어울려주도록 하실까.

    "그래. 최근 바프라에서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 많다고 들어서 말이지."

    나중에 플리투스에서 침략해 왔으면서 고작 사람 수가 이것뿐이냐고 의심할 수도 있으니, 나는 그에 대한 당위성까지 부여하면서 그렇게 대답해줬다.

    우리 파티의 목적은 전쟁의 선발대가 아니라, 너희처럼 사랑을 위해 도망쳐오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구해주러 왔다는 건가?! 아무 일면식도 없는 적국의 사람을?!"

    "딱히 선의로만 구해주러 온 건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해서 전투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말이지. 오히려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사람은 더 강해질 수도 있어. 그러니 당신들과 같은 사람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결과적으로 우리의

    전력도 자연스레 강화된다는 얘기지. 게다가 댁들의 경우 어느 정도 높으신 분의 자제 같으니, 우리한테 넘겨줄 수 있는 정보도 꽤 많지 않겠어?"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나도 나 자신의 순발력이 두렵다.

    이렇게 청산유수처럼 따박따박 그럴듯한 말이 흘러나오다니.

    그야말로 악마의 재능! 아니. 여신님의 재능이 아닐 수 없어!

    "배, 배신하라는 건가? 조국을?"

    "그 조국의 잘못된 사상이 너희를 죽이려고 들었는데도 아직 그런 소리가 나오는 모양이군. 사랑 하나만 있으면 뭐든 버릴 준비가 되어있으니 같이 도망쳐 나온 것 아니었나?"

    게다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는 이 냉철한 연기까지.

    내가 표정을 바꿔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커플의 표정이 더더욱 고뇌로 물들었다.

    귀찮기는. 이런 세계에서 사랑을 바라고 뛰쳐나온 거다. 적어도 홧김에 저지른 건 아닐 거 아니야? 좀 더 각오를 다지라고.

    "보아하니 당신들도 처음부터 우리 플리투스에 올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설마 자신들의 발로 뛰쳐나온 곳과 맞서 싸울 각오도 없이 뛰쳐나온 거였나? 우리가 그런 자들을 오냐오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거고? 우리는 너희의 사랑을 그저 곱게 지켜주기만 하

    는 보금자리가 아니야. 그런 걸 바라는 거면 만년 발정기의 음란 여신의 땅에라도 찾아 가."

    여신님! 죄송해요! 이거 전부 연기에요!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 이러는 거라고요! 아시죠?! 제 맘 아시죠?!

    아무리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여신님은 공공의 적일 테고, 당연히 그에 관한 욕을 내뱉는 건 이 이상 없을 치욕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일부러 충격을 줘서라도 마음을 다잡고 우리한테 충성하도록 하려는 수작이었어요!

    계획대로 내 말이 상당히 충격이었던 건지, 눈앞에 있는 커플이 이 이상 없을 정도로 표정을 구기며 날 노려봤다.

    문제는.

    "허업······!"

    이 철없는 커플뿐만 아니라 내 뒤나 양옆에서까지 진심으로 놀라서는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는 점이지만.

    야. 이것들아. 왜 너희까지 놀라는데?!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겠냐?! 나 여신님의 사자야!

    "뭘 너희까지 같이 놀라고 그러냐. 나도 말이 너무 심했다는 것쯤은 알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는 것도. 그래도 이 망할 것들은 이쯤은 말해주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잖아."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눈짓으로 필사적으로 실비아와 찌꺼기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니까 일단 내가 하는 말에 맞춰달라고.

    다행히도 내 눈짓이 통하기는 통했는지,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표정을 다시 다잡아줬다.

    실비아랑 눈빛 대화가 통하는 건 당연하지만, 세 쓰레기하고도 이런 게 통하다니.

    내가 해놓고도 조금, 아니. 상당히 기분 나빴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럼 다시 한번 묻지. 각오는 있나? 우리와 힘을 합쳐서 바프라와 맞서 싸울 각오가."

    "······그래. 그래! 있어!"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내던진 내 질문에, 남자는 검을 꽉 움켜쥐며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

    "유리! 난 널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그게 설령 조국을 배신하고, 아버지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직 여자 쪽은 망설이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남자의 결심은 굳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신이랑 유리라니. 너희 혹시 유파가 남두······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신·········"

    "유리·········."

    그리고 그런 남자의 모습에 감동 받았다는 듯, 여자는 촉촉한 눈길을 남자에게 보냈다.

    남자 역시도 여자와 눈을 마주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줘서, 잠시 그렇게 둘만의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주 둘이서 그냥 꼴값이라는 꼴값은 다 떨고 있네.

    너희만 커플인 줄 아냐? 여기 너희 말고도 커플 있거든!?

    "크흠! 크흠!"

    무심코 실비아의 허리를 찾아 끌어안을 뻔했지만, 나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대신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경을 잔뜩 내비쳤다.

    진짜 필요하지만 않았으면 바로 버리고 가는 건데.

    "앗, 그, 그래요! 저도! 저도 각오는 됐어요!"

    그제야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빠져나온 여자는, 표정을 다잡고 굳게 결심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자신의 결심을 들려줬다.

    "좋아. 그러면 당장 할 일이 있어."

    "다, 당장? 지금부터 말인가?!"

    "그럼 뭐 우리가 너희 각오만 듣고 곧장 플리투스로 데려가 줄 거라 생각한 건가?"

    남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플리투스에 가기 앞서서 각오를 시험하겠다는 건가······."

    아니. 솔직히 말해서 플리투스가 어딘지도 모르고, 데려가 달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대충 여기서 뭔가 일을 벌이고 싶을 뿐이었는데.

    뭐,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땡큐지.

    "그래.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6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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