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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61화 (945/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1화 >

    이, 이거······걸린 척해줘야 하나?

    제일 처음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그런 실없는 것이었다.

    뭐, 내가 별다른 액션을 취하기도 전에 이미 상대방은 눈치챈 모양이어서, 딱히 의미는 없었지만.

    "읏!"

    새로 등장한 구미호 누님은 내 가슴을 손으로 밀치면서, 그 반동을 이용해 점프하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조금 전까지 보여줬던 부드러운 움직임과는 전혀 다른, 마치 동물을 연상케 하는 재빠른 몸놀림으로.

    "안녕하세요? 속박이 안 걸리는 몸이지만, 안심하세요. 저희는 딱히 당신들을 해치러 온 것이······."

    상당히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내가 이렇게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말을 건네면, 그 어떤 여자라도 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잘생겼다는 건 그런 거야.

    디아나도 예전에 말했잖아? 지나친 아름다움은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매혹하는 것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나도 아직 전성기 디아나의 매력 스탯이나 레벨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호감을 느끼게 하기에는 충분한 수준이었다.

    "큭······."

    그런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던 나였지만, 애석하게도 상대방에게는 그다지 통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외모에서 오는 호감은 분명 있었던 모양인지 아주 살짝 뺨이 붉어지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호감보다는 경계심이 더 큰 것 같아서 말이야.

    오히려 미약하게나마 호감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더욱 경계심을 굳히는 것처럼 표정을 다잡은 후, 구미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모습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그리고 뭔가 더 혼란스러워진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면서, 구미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무엘하고는 무슨 관계지?"

    ······응? 사무엘? 아, 사라네 할아버지?!

    갑자기 그 이름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무심코 사라의 얼굴을 엿봤다.

    "별로."

    하지만 사라는 의연한 표정으로,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딱 잘라 부정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이 구미호가 우호 관계였는지 적대 관계였는지 모르는 만큼, 일단 간을 보기 위해 저렇게 대답한 거겠지.

    하지만 사라야, 그렇게 말해버리면 우리가 사무엘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표정은 저래도, 내심 조금 동요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냥. 똑같이 여신님이 보내서 왔다는 관계?"

    어깨를 으쓱이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나는 사라의 말을 이어 그렇게 대답해줬다.

    딱히 생각 없이 내뱉은 대답은 아니다. 오히려 생각을 많이 하고 내뱉은 대답이었다.

    지금까지 우리의 추측을 종합하면 구미호는 다른 마신의 종족들과 달리 전쟁을 피하고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구미호가 마신의 종족인 건 변함이 없다.

    여신에 대한 생각은 다른 마신의 종족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라의 할아버지를 알고 있다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여신님의 말씀으로는, 사라네 할아버지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니까 말이야.

    사라네 할아버지가 현역 시절에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임무를 달성하는 건 불가능했을 거다.

    분명 곳곳에 조력자가 있었음이 틀림없고, 분명 7계층에서도 마찬가지로 조력자가 존재했을 거다.

    그렇다면 혹시 그 7계층의 조력자 중 하나가 여기 있는 구미호가 아닐까?

    머리를 굴리고 굴린 끝에, 나는 그런 결론에 도달한 거다.

    살고 있는 위치만 보더라도 6계층에서 7계층으로 이어지는 통로 바로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거니, 사라네 할아버지 역시도 여기 와서 제일 처음 만난 종족이 구미호였을 테고.

    "여신이······너희도 사무엘처럼 전쟁을 없애러 왔다는 바보 같은 말을 하러 온 건가? 어떻게? 용사는 더 이상 없어.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나.

    점점 구체적이 되어가는 구미호의 말에, 나는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조력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저렇게까지 구체적인 얘기는 알지 못할 테니까.

    "알고 있어. 용사를 빼가는 작전은 실패한 모양이니까. 그래서 우리가 온 거야."

    경계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풀릴 수도 있겠는데?

    "전쟁을 없애러?"

    "그래.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전쟁을 없애러."

    나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런 내 모습에 구미호는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떨리는 눈동자를 내게 향하며 다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정말로······정말로 전쟁을 없앨 수 있는 거죠?"

    경계심을 가득 담아 앙칼졌던 아까까지와는 달리, 촉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구미호라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마치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래. 나로 말하자면 그냥 여신님이 보낸······으읍?!"

    나는 성자라는 점을 내세워 더욱 구미호이 신임을 얻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다.

    내게 가까이 다가온 구미호는 그대로 내 목을 끌어안고, 입술까지 맞춰왔기 때문이다.

    아니. 그야 쉽게 믿어주면 나야 고맙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쟁을 멈추러 왔다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너무 쉽게 믿는 거 아니야? 그것도 사라네 할아버지가 한 번 실패하기까지 했는데.

    대체 여신님의 사자한테 얼마나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거야? 사라네 할아버지가 그만큼 믿음을 줬다는 건가?

    그 할아버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뭐, 그러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모두의 위에 군림했다는 용사의 마음마저 훔칠 수 있었던 거겠지만.

    하지만, 이 키스는 위험해. 구미호씨. 구원이 와서, 혹시나 해서 말해두지만 내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아무튼 구원이 와서 기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임자 있는 남자한테 갑자기 키스는 아니잖아. 너무 갑자기 입술을 맞춰버리는 바람에 제지를 못 했지만, 슬

    슬 우리 애들이 폭발할 거라고.

    "야! 구원!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저거 봐. 사라가 폭발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구미호의 몸을 밀어내려고 한 순간, 나는 드디어 자신의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속박에 걸린 건 아니다. 속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까.

    이건 속박에 걸린 느낌이 아니라······말 그대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몸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은 아니고, 마치 섹스 후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탈력감과도 비슷하다고 할까? 기분 좋게 기가 빨린 것 같은······잠깐. 설마 이거?!

    "흐아응?!"

    상태 창을 열어서 자신의 생명력이 줄어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나는 성자의 전력을 써서 내 몸에 밀착해있는 구미호의 전신에 쾌감을 때려 박았다.

    "하앗······하앗······이런 미······전쟁을 멈출 수 있다고 기뻐하는 거 아니었어?!"

    하마터면 우리 애들 앞에서 욕지거리까지 할 뻔했네!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뻔했어! 그나마 내 생명력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높기에 망정이지!

    입술을 훔치며 구미호를 향해 윽박질렀지만, 물론 구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말에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 내 말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겠지.

    "흐읏······! 하으읏?! 크흣······!"

    아슬아슬하게 절정에 달하기 직전에 내게서 몸을 떨어뜨린 건지, 구미호는 바닥에 엎드려 몸을 뒤척이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구미호의 모습을 보고 초조해졌는지, 저 멀리 수풀에서 또 한 명의 구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모!"

    조금 앳된 느낌의, 처음에 우리보고 기다리라고 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조금 어린. 뭐, 어리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로, 고등학생쯤은 되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아무튼 그 정도 나이대로 보이는 구미호 소녀가,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허튼짓하면 이 여자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그리고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구미호를 가리키며 협박을 가했다.

    음. 역시 난 착한 척하는 것보다 이런 게 더 어울려.

    "구원 씨······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악당 같아요······."

    "아니. 일단 이렇게라도 해서 얘기를 듣는 게 우선이잖아. 난데없이 공격당했으니까 사정이라도 알아야지."

    천사님과는 그런 귓속말을 주고받으면서도, 나는 구미호 소녀에게 험악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럼 우선 천천히 이쪽으로 와 주실까?"

    "······으읏!"

    바닥에 쓰러진 구미호를 보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구미호 소녀는 선뜻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았다.

    뭐, 그야 그렇겠지. 처음부터 엄청 경계하는 눈치였고.

    "빨리 안 오면 이 여자가 위험해진다는 것만 알아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도 딱히 사정을 봐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갑자기 기습당해서 놀라기는 했지만, 그다지 위험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이왕 협박을 시작한 거다. 이렇게 사정 안 봐주고 화난 척을 해야지,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지 않겠어?

    "······으으으. 빠, 빨리 오라는 거야 천천히 오라는 거야······."

    하지만 그런 내 협박을, 구미호 소녀는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말로 응수해줬다.

    아니. 그야 생각해보니까 처음에는 천천히 오라고 하고 나중에는 빨리 오라고 하기는 했지만······지금 그게 중요하냐?!

    "시, 시끄러워! 빨리 와!"

    "정곡을 찔려놓고 애한테 화내기는."

    사라야! 일침을 가하는 건 좋지만 넌 내 편이잖아! 타겟이 잘못됐다고! 혹시 방심하다가 키스를 허락했다고 화났니?

    "우, 우리를 어쩔 셈이냐, 남자."

    아무튼 바닥에 쓰러져서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구미호를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는지, 결국 구미호 소녀는 쭈뼛쭈뼛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울상인 눈으로 날 노려봤다.

    "어쩔 생각이기는. 이럴 생각이지."

    나는 성자의 손길로 구미호 소녀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줬다.

    "흐으읏?! 아, 아아······뭐야 이거······뭐야 이거어······."

    그리고 그 즉시, 구미호 소녀도 자신의 이모와 같은 처지가 되어 바닥에서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구미호 소녀는 물론 우리 애들도 갑자기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한 목소리로 날 다그쳤다.

    걱정하지 않아도, 다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고.

    "아니. 어차피 이 꼬맹이는 사정도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 이왕이면 사정을 잘 아는 사람한테 얘기를 듣는 게 좋잖아? 그러니까 인질을 교환하려고. 이렇게."

    "흐아으으응?!"

    그렇게 말하고 나는 성자의 손길이 걸린 손을 이번에는 먼저 쓰러진 성숙한 구미호에게 뻗어서 절정에 달하도록 해줬다.

    그리고 그 턱을 잡고 고개를 들어 올리게 하면서, 반대로 나 자신은 무릎을 꿇어서 눈높이를 맞춘 다음, 나는 이번에는 구미호 누님께 협박을 가했다.

    "자, 그럼. 그 몸으로 직접 겪어봤으니 저대로 놔두면 저 애가 어떻게 될지는 정도는 쉽게 상상할 수 있겠지? 자초지종을 들려주실까. 갑자기 날 공격한 이유가 뭐야?"

    "흐읏······큿······."

    내 협박에도, 구미호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말해두지만, 저거 내가 풀어주지 않는 한 평생 안 풀려. 운 좋게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아. 애초에 이따위 결계, 얼마든지 산산조각 내줄 수 있거든. 도망가는 너희를 추적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음. 내가 생각해도 완벽한 악당의 대사다.

    크으. 이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 역시 난 이런 게 체질에 맞아.

    "자네. 아주 신이 났구먼······."

    그, 그러니까 너희는 조금 조용히 하라니까! 아까부터 돌아가면서 계속 분위기를 깨네!

    이래 봬도 지금 꽤나 심각한 얘기를 하려는 참이거든?!

    "크읏······이런 비겁한······."

    다행히도 분위기를 깨는 우리 애들과 달리, 구미호 누님은 착실히 분위기를 맞춰주셨다.

    아니. 이 누님으로서는 분위기를 맞춰줄 생각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겠지만.

    "당신들, 정말로 여신이 보낸 사람? 사무엘과는······."

    "그야 당연히 비교도 안 되죠."

    "사, 사라야?! 그거 좋은 의미로 말하는 거지?! 좋은 의미로 비교도 안 된다는 거지!?"

    결국 사라의 방해 공작에 말려든 나는, 애써 유지하고 있던 분위기를 스스로 깨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악당처럼 보이는 게 싫으면 싫다고 얘기를 하지!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방해하기냐?!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1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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