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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60화 (944/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0화 >

디아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라도 누군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손에 들고 있던 화살을 만지작거렸다.

"하아······."

위협해서 강제로라도 모습을 드러내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한 모양이지만, 사라는 이내 포기한 듯 한숨과 함께 내게 화살을 건넸다.

뭐, 그야 그렇겠지. 경계심을 부추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결계도 안 깨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굳이 강압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화살이 상대방에게 닿기 전에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와 버릴 가능성도 있고.

하지만, 좋게 말로 한다고 해서 과연 상대방이 모습을 드러낼까?

"이 몸들은 자네들을 해치러 온 것이 아닐세.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네만."

디아나가 연륜이 흘러넘치는 인자한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그렇게 말해봤지만, 역시나 반응은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이런 진법 안에서 우리를 엿보고 있는 거다. 상대방은 십중팔구 구미호라고 봐야겠지. 전에 내가 봤던 그 구미호인지, 아니면 다른 구미호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리고 우리 예측대로라면 구미호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이 싸움 광인 이 세계와는 맞지 않는 성격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은 피하며 살아왔을 테고, 지금 우리가 갇혀있는 이 진법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런 상대가, 과연 모르는 사람이 부른다고 곧이곧대로 모습을 드러낼까? 나는 아니라고 봤다.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한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흠. 역시 순순히 믿기는 어려운 모양이구먼. 레이아 양."

그리고 디아나도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말 한마디에 모습을 보여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디아나는 곧바로 레이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네."

부름을 받은 레이아도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알고 있다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찰랑거리는 금발을 틀어 올려서 한데 묶자, 레이아의 눈이 보랏빛으로 빛나며 엉덩이에 여덟 개의 꼬리가 돋아났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도 저와 같은 구미호······맞으시죠? 저희는 정말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어요. 조금이라도 좋으니 얘기를 들어주실 수 없을까요?"

그야말로 성녀와도 같은 자애로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건네는 레이아.

게다가 구미호의 모습이 상당히 먹혀들었는지, 저쪽 수풀 너머가 잠깐 소란스러워진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안 돼."

그리고 겨우 자기들끼리 대화가 끝났는지, 어딘지 조금 앳되게 들리는 목소리가 그런 말을 해왔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전에 내가 만났던 그 구미호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뭐, 그때는 겁에 질려서 도망가며 위협하는 목소리만 잠깐 들은 것뿐이니까, 정말로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네?"

"남자는 믿을 수 없어. 그쪽의 네가 제압해."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하는 명령이었지만, 상대방이 말하는 그쪽이 누구고, 어떻게 제압하라는 건지는 명확했다.

레이아에게 구미호 특유의 기술인 속박을 써서 날 제압하라는 얘기겠지.

하지만 말이지······.

"네? 하, 하지만 구원 씨는······."

머리를 묶는 방법을 개발하기 전, 그러니까 "전 섹스가 너무 좋아요!"라고 외치는 것으로 변신할 수 있게 됐을 때부터, 레이아는 서서히 구미호의 힘에 눈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속박을 사용하는 것으로 도움을 준 적도 몇 차례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의 레이아에게, 속박을 쓰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려운 주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상대가 나라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구미호의 힘이라는 건, 매력 스탯에 좌우되는 모양이라서 말이야.

얼마 전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매력에 투자한 내게, 레이아의 속박이 걸릴 리가 없었다.

"척이라도 해볼까?"

"하지만······저분들도 저와 같은 구미호일 텐데 속으실까요?"

레이아에게 귓속말을 해봤지만, 레이아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것도 그런가. 그럼 하는 수 없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희도 눈이 있으면 이 얼굴이 보일 거 아니야. 나 같이 잘생긴 놈한테 속박이 걸리겠냐?"

나는 그냥 뻔뻔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매력 스탯 같은 존재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쟤들도 구미호인 만큼 너무 잘생긴 사람한테는 속박이 안 걸린다는 것쯤은 경험으로 알고 있겠지.

옆에서 사라가 "진짜 뻔뻔하기는······."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뻔뻔한 게 왜! 뭐가 어때서! 딱히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난 진짜로 잘생겼다고! 여신님 만만세다!

"너, 너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남자!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내 뻔뻔한 말을, 구미호는 더욱 경계심이 커진 목소리로 받아쳤다.

뭔가 반응이 이상한데. 저래서는 마치······.

"아니. 진짠데. 너 혹시 나만큼 멋있는 남자를 못 만나봐서 너무 멋있으면 속박도 안 걸린다는 걸 모르는 거 아니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무시하지 마라, 남자! 그리고 쉽게 말 걸지 마라, 남자!"

진짜냐. 아무래도 진짜로 몰랐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말끝마다 남자, 남자라니. 저거 혹시, 잘생긴 남자는커녕 남자 자체를 만나본 적 없는 거 아니야?

그게 진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진짜라니까? 못 믿겠으면 네가 와서 직접 걸어보던가."

말 걸지 말라고 하기는 했지만, 목소리에 가시가 돋기는 해도 착실히 대답해주는 걸 보니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나는 뻔뻔하게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끼고 있던 건틀렛을 벗어다가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아예 갑옷까지 벗어서 가벼운 옷차림이 된 다음, 두 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 올렸다.

"자, 이러면 딱히 무서울 것도 없잖아?"

"으윽!"

그러자 구미호는 당황한 건지, 또 한 번 저 멀리에 있는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도 거리라면 내 성자 스킬로도 제압이 가능할 것 같기는 한데.

성자의 파동 같은 평범한 원거리 스킬은 아까 사라가 쐈던 화살처럼 되돌아올지도 모르겠지만, 범위 스킬인 성역 선포라면 제대로 통하지 않을까?

뭐, 그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겠지만.

"거, 거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라, 남자!"

오, 뭐야. 진짜로 오는 건가?

그렇게 기대했던 나였지만, 방금 들렸던 으름장과 달리 멀리서 느껴졌던 기척은 점점 멀어져만 가기 시작했다.

"저거, 도망가는 거지?"

"도망가네."

"도망가는구먼."

혹시 내 착각인가?

미약한 희망을 담아서 사라와 디아나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둘 다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내 착각이 아니라고 확인해줄 뿐이었다.

"이상하다. 분명 잘 돼 가는 것 같았는데."

"막상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니까 두려워진 게 아닐까요? 왠지 남성분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확실히 뭔가 유독 남자를 강조하면서 태도가 이상하기는 했지.

하지만 구미호가 남자를 무서워한다니······.

옛날에 날 만나기 전, 자신이 구미호인지도 몰랐던 레이아조차도 남자 자체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었는데.

뭐, 우리 천사님은 성격이 워낙 좋으시니 특이 케이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어쩌지. 아무래도 순순히 얼굴 맞대고 대화해줄 것 같지는 않으니, 일단 우리 힘으로 이 결계를 뚫고 갈 방법을 생각해볼까?"

"흠. 일단 잠시 그대로 기다려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런 말을 하고 가지 않았는가."

어차피 무작정 걸어봤자 또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될 뿐이니, 조금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손해 볼 건 없다는 계산도 깔린 거겠지.

나는 디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한동안 장비를 걸치지 않은 채 그대로 있기로 했다.

"그나저나 역시 우리 예상이 맞는 것 같지?"

그렇다고 해서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건 시간 낭비니, 우리는 이 시간을 이용해 의견을 교환하기로 했다.

"음. 적어도 이곳이 전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자들의 도피처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한 것 같구먼. 그렇다는 것은 역시 이곳은 구미호들이 모여 사는 곳일 가능성이 크겠구먼."

"이 세계에서 협력을 구하기에는 제일 좋은 상대라는 건가."

"음."

우리는 전쟁을 멈추기 위해 온 것이니, 처음부터 전쟁을 싫어한다면야 그보다 더 고마운 것도 없다.

"남자를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협력이 쉬워 보이지는 않지만."

사라 말대로 그게 문제란 말이지. 대체 남자를 왜 저렇게 경계하는 거지? 혹시 구미호족 전체가 남자한테 뭘 당하기라도 한 건가?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전쟁이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승자 독식이다. 전리품으로 약탈이나 강간 같은 것도 쉽게 연상이 되고,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전부 납득이 갔다.

남자들이 구미호를 전리품 취급했다는 건가.

확실히 구미호는 그 특성상 기교가 엄청나니, 정기가 빨려 죽지 않을 거라는 자신만 있으면 서로 앞다퉈 구미호를 가져가려고 했겠지.

"그런······너무해······."

내 추리를 들은 천사님은, 비통한 목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셨다.

하지만 그런 내 추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흠······이 몸은 그럴 것 같지는 않네만."

바로 우리 대마법사님이었다.

"응? 왜? 꽤 그럴듯한 추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해보게, 이곳에 있는 자들은 마신의 추종자. 바꿔말하면 여신님을 적대하는 자들이라는 말일세. 그런 자들이 과연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하려고 하겠는가?"

······어? 그, 그런가? 아니. 우리 여신님은 딱히 섹스의 여신이 아니니까······라는 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나.

"그래도 본능이라는 게 남아있을 거 아니야?"

"이성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라네. 너무 강해지면 가끔은 도가 지나쳐 생물로서의 본능을 억누르기까지 한다네."

아니. 대마법사님. 거기서 갑자기 철학적인 얘기를 꺼내지 마시라고요.

갑자기 확 나이 연륜이 느껴져서 멀게 느껴······아니. 아무리 그래도 멀게는 안 느껴지네. 역시 우리 디아나야. 언제 봐도 귀엽다니까.

"하지만 그······하지 않으면 자식도 낳지 못하는 게 아닐까요?"

"음. 그래서 어디까지나 이 몸의 추측이네만, 이곳의 사람들은 필요 최소한의 섹스밖에 하고 있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네. 아까 이 몸이 이곳이 전쟁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라고 한 직후에 구미호들이 모여 사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 것 기억나는가?"

"응? 그야 기억나지만······구미호가 전쟁에 적합한 종족이 아니라서 한 얘기 아니었어?"

능력을 살리려면 정기를 빨아야 하는데, 전쟁 중에 거기까지 가기가 쉬운 게 아니니까 말이야.

"그런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네. 전쟁신의 세계에서 전쟁을 거부할 정도까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몸은 그 이유를 섹스에 대한 혐오로 보고 있네."

"즉, 마신의 추종자들은 여신님에 대한 반발심으로 섹스를 싫어하고, 구미호들은 성적인 행위가 특기인 종족이니까 혐오의 대상이 되어있다고?"

게다가 이 세계는 전쟁을 사랑하는 세계.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건 다시 말해 언제 누구한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몸이 된다는 뜻으로, 그렇기 때문에 구미호들은 이런 산속에 이런 결계까지 치고 숨어 살게 됐다는 뜻인가.

"음. 바로 그걸세."

바로 알아들은 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디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러면 남자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거야 이 몸도 모르네."

야. 그 좋은 머리를 살려서 거기까지 추리해놓고, 그건 또 딱 잘라 모른다고 하기냐.

"그건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겠네."

"직접 물어본다고 해도, 그러려면 일단 이 결계를 뚫고 가야······."

"당신인 모양이군요. 이 아이가 말한 남자는."

사라의 말에 한숨 섞인 대답을 늘어놓으려고 했던 내 등 뒤로, 갑자기 묘하게 색기 있는 성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라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등 뒤로 꽂혀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듯 나도 고개를 돌려서 등 뒤로 눈길을 돌리니, 거기에는 약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구미호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아······잠시 가만히 있어 볼까요."

무르익은 몸매를 자랑하듯 내게 다가온 구미호는, 농염한 색기를 내뿜으면서 내 턱에 사뿐히 손을 가져다 댔다.

그 부드러운 손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턱이 살짝 들리게 되고 눈과 눈이 제대로 마주친 순간, 그 눈에서 요사로운 보랏빛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60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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