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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59화 (943/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59화 >

    "역시 아직 살아있군."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7계층에 도착한 나는, 여전히 부서지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웬 7계층이냐고? 같이 밤을 보낸 주인님과 집사 사이가 무척이나 어색해져 버렸거든.

    디아나뿐만 아니라 바넷사까지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당히 부끄러워진 모양인지, 둘은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어색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수백 년이나 이어져 온 둘의 관계가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잠깐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어차피 위에서 꼭 해야 할 일은 전부 마쳤고 아라크네 클랜의 감시 같은 경우는 단기간 내에 해결될 일도 아니니, 이렇게 다시 던전 탐험을 재개하기로 했다는 얘기다.

    그나저나 텔레포트 마법진이 아직도 이렇게 멀쩡하다는 건, 역시나 우리 예상이 맞아 들었다는 얘기일까?

    뭐, 그건 지금부터 확인하면 그만이지.

    "그때 내가 만났다는 구미호가 도망간 방향은 저쪽이었어."

    "음. 알겠네."

    며칠 전에 내 허벅지 위에서 만들었던 탐색 마법 증폭기를 착용하고, 디아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흠. 으음? 으으음······이 느낌은······."

    탐색 마법을 마치면 언제나처럼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결과를 말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건지 디아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대마법사님이 마법을 쓰고나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게다가 지난밤의 3P로 드디어 레벨 250에 도달한 디아나가 말이다.

    물론 이 세계는 레벨 보정이 큰 만큼 아직 전성기의 디아나보다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스탯만 놓고 보면 전성기 시절의 스탯을 되찾은 디아나였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도 해야 하는데.

    디아나가 고민하고 있던 레벨 500의 벽. 레벨 250에 도달하고 원래의 스탯을 되찾은 것으로 그 원인도 드디어 밝혀졌지만, 나나 디아나나 지난밤의 경험이 너무 강렬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그렇게나 500레벨의 돌파를 원하던 디아나마저도 깜빡하다니.

    그만큼 바넷사와의 플레이가 디아나의 머리를 혼란케 했다는 것이겠지.

    "왜 그래?"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레벨 업 돌파로 한층 더 강력해지신 우리 대마법사님이 마법을 쓰고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점이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

    나는 혹시나 싶어서 황급히 디아나의 등 뒤를 받치며 질문을 던졌지만, 다행히 디아나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음. 조금만 기다려보게. 레이아 양."

    "네?"

    내게 괜찮다는 손짓을 한 후, 디아나는 곧바로 시선을 레이아에게 옮겼다.

    "잠시 구미호로 변해줄 수 있겠는가?"

    갑자기 이름이 불려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아에게, 디아나는 뭔가 확인할 것이 있다는 듯 그런 부탁을 했다.

    "네에?! 지, 지금, 여기서 말인가요?!"

    아니. 레이아. 왜 그렇게 놀라?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안 되는가?"

    디아나도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레이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파티원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주목된 것을 느낀 레이아는 얼굴을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아, 안 되는 건 아니지만요······그, 그게······저, 저······으읏······전 섹스가 너무 좋아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어째선지 옛날 방식으로 구미호로 변해주셨다.

    손으로 가려져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옆으로 축 늘어진 귀나 뒤에서 열심히 흔들리는 그 꼬리가 지금 레이아가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아, 대체 왜?

    "머리 묶는 방법으로는 다시 변신 못 하게 됐어?"

    "네······? 아, 아앗······!"

    그냥 잠깐 깜빡했던 것뿐이구나······.

    하긴 디아나가 아무런 맥락도 없이 갑자기 변신 요청을 해서 당황스러웠겠지. 난 충분히 이해해.

    그런 의미로 레이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어 줬지만, 어째선지 레이아는 괜히 더 부끄러워졌다는 듯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버렸다.

    그리고 그런 레이아에게 디아나의 냉정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흠······역시나 그렇구먼······."

    처음에는 쪼그려 앉은 자세에서 무릎 부분에 짓눌리며 강조되는 레이아의 가슴에 차갑게 분노를 불태우는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대마법사님다운 진지한 표정으로, 디아나는 자신의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뭐가?"

    "음. 던전이라는 곳은 언제나 묘한 마력에 둘러싸여 있는 곳이니 지난번 방문했을 때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었네만, 이 몸들이 지금 있는 이곳은 구미호의 마력이 충만 해있네. 아마도 뭔가의 결계 안쪽이라고 생각되네만······이 몸이 쓰는 마법과는 전혀 다른

    구조로 되어있어서 어떠한 종류의 결계인지는 파악하기 어렵구먼."

    "정체 모를 결계 안이라니······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아마 괜찮을 걸세. 위험한 징조가 보이면 이 몸이 마나의 움직임을 읽고 사전에 파훼할 수 있네. 사실 이 결계를 힘으로 깨는 것도 가능하네만, 그렇게 하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를 일이지 않은가. 이 몸들의 목적은 구미호를 찾아내어 상대하는 것

    이 아니니 말일세. 정말로 구미호가 다른 마신의 종족들과 달리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협력하는 것이 제일일세. 되도록 자극하는 일은 피하고 싶구먼."

    과연. 그런 건가. 위험 징조가 보이면 마나를 읽어서 미리 파훼할 수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역시 대마법사님. 모르는 마법이 상대라도, 일단 마나를 쓰는 것이면 다 상대할 방법이 있다는 얘기겠지.

    그렇다는 말은 아까 잠깐 눈썹을 찌푸렸던 것도, 이 상황이 위험해서가 아니라 미지의 마법을 만나서 잠깐 진지해졌던 것뿐이라는 건가. 헷갈리게 하기는.

    "하긴. 게다가 텔레포트 마법진이 무사한 이유도 이 결계 때문일지도 모르고 말이지?"

    "음. 바로 그걸세."

    내 말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디아나는 까치발을 들고 팔을 위로 쭉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지만 디아나, 주변이 전부 구미호의 마나로 뒤덮여있으면, 구원이 봤다는 그 구미호를 찾을 방법도 없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이어지는 사라의 질문에도, 디아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도 문제없네. 구조가 달라도 그 쓰임새까지는 다르지 않을 터이니. 결계라는 것은 외부에서 안쪽으로 침입해오는 것을 막거나, 안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결계는 구미호가 친 것일세. 그런데 이

    자가 이 안에서 구미호 처자의 모습을 봤다고 했으니······."

    "이 결계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결계라는 얘기네요."

    "음. 결계의 중심부로 향하다 보면 자연히 구미호 처자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걸세."

    역시 우리 파티의 두뇌. 무서울 정도로 상황 판단이 빠르다.

    사라의 의문에도 아무렇지 않게 해결해준 후, 디아나는 척하고 손가락으로 산 정상을 가리켰다.

    "자, 저쪽일세. 결계의 중심부는 산꼭대기에 있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때아닌 등산을 하는 처지가 됐다.

    물론 등산이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산은 지금까지 지나온 던전 안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큰 산이었지만, 우리가 등산 조금 한다고 해서 지칠 만큼 체력이 약한 것도 아니니까.

    그나마 체력적으로 제일 문제가 되는 디아나는 마나의 변동을 세심히 관찰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내 등에 업혀있었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이 체력을 빼는 건 문제가 되잖아?

    "디아나."

    "자네."

    걷기 시작한 지 대략 1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 나와 디아나는 거의 동시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결계의 중심부에 조금도 다가간 것 같지 않네만."

    "응. 계속 비슷한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네."

    우리는 분명 위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맵에서 보이는 위치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젠장. 언제부턴가 자욱하게 낀 안개 때문에 눈치채는 게 늦었어.

    아니. 수시로 맵을 확인만 했었어도 금방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목적지가 눈에 보이는데 굳이 맵을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으로 생각해 맵 리딩을 소홀히 했던 게 실책이었다.

    "비슷한 자리에서요? 계속 위를 향해 걸었는데 어떻게······."

    "아무래도 이것이 이 결계의 효과였던 모양이구먼."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이아에게, 디아나는 결계의 정체를 깨달아서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 지금 그런 표정 지을 때가 아니잖아. 네 말대로라면, 우리 지금 미로에 빠진 거라고.

    나무는 울창하다고는 하지만, 벽 하나 없는 곳에서 미로에 빠지다니.

    결계, 아니. 결계라기 보다는 진법이라고 해야 하나? 분명 삼국지에서도 제갈량이 비슷한 걸 썼었지?

    어차피 구미호도 동양 느낌 물씬 나는 종족이니, 어울리는 건지도 모른다.

    뭐, 지금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구원. 화살 가지고 있지?"

    "응? 그야 네가 예전에 쓰던 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넌 이제 화살 필요 없잖아?"

    5계층의 주인을 잡고 그 소재로 강화한 이후로, 사라의 활은 화살이 필요 없는 활이 되었으니까.

    "아무튼 줘봐."

    하지만 사라는 뭔가 생각이 있는 건지, 내게서 화살을 건네받아 자신의 활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활을 정면에서 비스듬하게 위로, 그러니까 일자로 날아가면 산꼭대기에 도착할 각도로 겨누고는, 그대로 화살을 발사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도발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결계도 안 깼는데."

    "괜찮아. 저기 꼭대기에 보이는 저 나무를 노리고 쐈으니까. 누가 맞을 일은 없을 거야."

    아니. 저기 보이는 저 나무라고 해도, 내 눈에는 너처럼 꼭대기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데.

    "뭐어······괜히 신경 쓸 필요 없었던 것 같지만."

    내 애매한 표정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사라는 이어서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화살을 눈으로 보지도 않고 손으로 덥석 낚아챘다.

    ······뭐야 이 용사. 여러 의미로 무서워.

    그러고 보니 사라 얘, 어느샌가 용사 레벨도 250을 넘어서 레벨 한계를 돌파했구나.

    이러다 나중에는 레벨 한계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하는 게 아닌가 몰라.

    "사람뿐만 아니라 물건의 침입도 막는 모양이네. 화살이 제대로 날아갔으면 끈이라도 연결해서 따라가려고 했는데."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라는 자기 아이디어가 통하지 않은 게 아쉽다는 듯 가볍게 입술을 삐죽였다.

    뭐, 확실히 아쉬울 만한 좋은 아이디어이기는 했네.

    하지만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면, 대체 여기를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 거지?

    제갈량의 팔진도에 들어간 육손이라도 된 것처럼 막막한 심정으로, 나는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맵을 보면서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전부 가보는 식으로 천천히 전진해봐?

    아니야. 그야 전에 만났던 그 구미호도 아래까지 내려왔었으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아까 결계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 삼국지가 문제였다. 거기 나오는 팔진도는 분명 계속해서 위치가 바뀌는 진법이었

    으니까 말이야.

    맵을 보면서 모든 방향으로 다 전진해봐도, 정답인 길이 계속 바뀌어서야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하지? 디아나, 혹시 마나의 흐름을 읽어서 정답인 길만 찾아낸다든가 할 수는 없어?"

    "아무리 이 몸이라도 그렇게 뭐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닐세. 며칠 넉넉히 시간을 잡고 이 결계의 구조를 분석한다면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네만."

    ······며칠만 시간 주면 할 수 있는 거구나.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까? 어쩔 수 없으니까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냥 결계를 힘으로 부숴버릴까?"

    "아니.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네."

    "어머, 그러네요."

    내 질문에, 디아나는 고개를 저으며 의미심장하게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 디아나가 그러는 이유를 바로 눈치챘다는 듯, 사라 역시도 그렇게 말하며 디아나와 같은 방향을 쳐다봤다.

    뭐야 이 대마법사 용사 콤비. 너희끼리만 알지 말고 우리도 알려달라고.

    평범······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성자, 성녀, 기사의 의문 어린 시선에, 디아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해줬다.

    "마중 나온 모양일세."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59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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