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52화 (936/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52화 >

    "오늘은 상당히 빠르시군요."

    펠리시아의 방에서 나와 바넷사가 기다리고 있다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귀에 익은 무뚝뚝한 목소리가 날 반겨줬다.

    "아니. 딱히 빠르다고 할 정도는······."

    시간은 벌써 3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성에 찾아왔었으니, 빈말로도 빨리 돌아왔다고 할 시간은 아니었다.

    "아, 혹시 모처럼 네 차례가 돌아왔는데, 너랑 있을 시간이 짧아질까 봐 걱정했어?"

    "······용무가 끝났다면 돌아가시죠."

    아무래도 정답이었는지, 바넷사는 대답을 회피하고 딴소리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는 꼭 자기가 불리해지면 말을 안 해버리더라.

    "이 시간부터 벌써?! 아무리 기대했어도 그렇지, 밤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아?!"

    "······."

    이렇게 장난치면 최소한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기라도 할 줄 알았지만, 그러면 괜히 내 분위기에 말려들기만 한다는 걸 잘 안다는 듯, 바넷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크흑. 대답조차 안 하다니. 사랑이 식었어······."

    "그런 적 없습니다."

    "응?!"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도 못한 대답을 들어버려서, 나는 아주 잠깐이지만 장난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이런 건 분위기를 계속 이어나가면서 몰아붙이는 게 중요한 건데.

    "바넷사씨. 지금 뭐라고 하셨죠?"

    한박자 늦게 다시 시동을 걸어봤지만, 바넷사는 대답 대신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 놓칠 내가 아니지! 어딜 도망가려고!

    "바넷사. 방금 한 말······."

    나는 황급히 바넷사의 뒤를 쫓아가서는, 그대로 뒤에서부터 그 몸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바넷사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서 내 팔을 피해버렸다.

    "지금은 집사입니다."

    응. 그래. 그래 보여. 하여간 틈이 없다니까. 틈이.

    뭐, 그게 우리 완벽 집사님의 매력이지만.

    "그래. 지금은 집사인 바넷사씨. 바넷사씨가 집사 신분으로 말씀하신 그런 적 없다는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 말투가 거슬렸던 건지, 아니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대답을 들어내려는 태도가 거슬렸던 건지, 바넷사는 한쪽 눈썹을 살짝 찌푸리면서 날 바라봤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도망가봤자 결국 마차에서 돌아가는 내내 내게 시달릴 거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바넷사는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노리고 한 건지 반사적으로 내뱉어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말을 해버린 자기 자신을 탓하라고.

    뭐, 반응을 봐서는 무심코 한 말 같지만.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만."

    드디어 내 질문에 대답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은근슬쩍 피해 가려는 의도가 보였다.

    "대답도 안 한 적 없다는 뜻이었다고?"

    "······."

    하지만 그래도 거짓말은 못 하겠는지, 내가 일부러 엉뚱한 곳을 찌르자 또다시 침묵해버렸지만.

    뭐, 실제로 대답을 안 했었으니까, 저런 뜻이었을 리가 없지.

    잠깐동안 대답을 기다려서 바넷사가 끝까지 침묵하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호라. 바넷사씨. 지금은 집사이시면서 저에 대한 사랑이 식은 적이 없다고 뜨거운······."

    "딱히. 제 감정과 지금 집사인 것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응?"

    내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제대로 바넷사를 놀리려고 한 순간, 바넷사가 먼저 선수를 쳐서 그런 말을 해왔다.

    "집사 일을 하는 중에는 그에 따른 태도를 보이는 것뿐, 감정이 변하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전히 특유의 무표정으로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은 바넷사였지만, 말투와는 달리 부끄럽기는 하다는 듯 그 귀 끝은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야 그렇겠지. 지금 저 무뚝뚝한 말을 평범한 말투로 해석하자면, "제가 지금 이렇게 무뚝뚝한 태도로 구원 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 님을 향한 제 사랑이 식었다는 뜻은 아닙니다!"라는 의미가 되어버리니까.

    뭐, 조금 신파조로 해석해버린 감이 없잖아 있지만, 대충 저런 뜻이라는 얘기다.

    바넷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드물게 귀까지 붉히면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

    하지만 바넷사야. 답지 않게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구나.

    "아니.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지적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당연히 집사일 때도 날 좋아해야지. 그게 아니라, 집사일 하는 중이면서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열변해도 되냐고."

    "······."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바넷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내 회복해서는 다시 성큼성큼 빠르게 걸어 나갔지만.

    "바넷사."

    "시끄럽습니다."

    아직 이름밖에 안 불렀는데 너무하지 않냐?

    시끄럽다고 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듣고 시끄럽다고 해야지.

    "겉으로는 차갑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그 커다란 가슴 안에는 언제나 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고 있는······왜, 왜요?"

    위험해. 너무 놀렸나.

    이제는 아예 대놓고 빨개진 귀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춘 바넷사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노려봤다.

    "성희롱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날 쫄게······아니. 딱히 쫄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위압감을 뿜어내고는 한다는 말이 고작 저런 말이어서, 나도 순간적으로 굳었던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으, 응? 거기?! 태클 걸 부분이 거기뿐이야?! 역시 뜨거운 사랑을 불태운다는 건 부정할 수 없······."

    "시끄럽습니다."

    역시 부정 못 하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네 말대로 넌 지금 집사. 일단 날 모시는 입장이니까, 너무 그렇게 시끄럽다고 면박을 주는 건 어떨까 싶은데."

    "면박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충고입니다."

    "충고? 어떤? 난 좀 닥치고 있는 편이 더 멋있을 거라고?"

    "네."

    ······야. 집사님. 방금 그건 부정해야 할 타이밍이잖아. 그렇게 곧바로 긍정해버리면 어떡해?

    하지만, 닥치라는 말을 들어도 기죽지 않는 게 나라는 남자지.

    "내가 여기서 더 멋있어지면 너만 손해 아니야?"

    "······."

    벌써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았다는 듯, 바넷사는 부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앞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인정해주기는 싫은지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이 이상 멋있어지면 다른 여자가 더 꼬여버릴 수도 있다고. 잘 봐. 아가씨······우왓?!"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 메이드가 있었기에 추파라도 던져보려고 한 순간, 바넷사가 조금 거친 동작으로 내 팔을 잡고 앞으로 확 당겼다.

    "······야."

    "전 기본적으로 구원 님의 집사가 아닌 디아나 님의 집사입니다."

    지금은 집사니까 질투에 몸을 맡겨서 내 행동을 방해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능글맞게 웃으며 그런 말을 하려 했던 내게, 갑자기 바넷사가 엉뚱한 말을 꺼내왔다.

    "으, 응? 그야 그렇지."

    "그러니 디아나 님이 슬퍼할 만한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집사로서?"

    "그렇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눈이 많이 무서운데.

    방금 메이드를 꼬시는 척했던 게,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방금 행동에 네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지?"

    "······."

    또 대답 안 하기냐. 뭐, 그 침묵이 대답이나 마찬가지니까 상관없지만.

    게다가 아직도 불안하다는 듯 내 팔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뺄 생각도 안 하고 있고.

    "하아······바넷사의 사랑이 너무 무거워."

    "자업자득입니다."

    아까 대기실에서 했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내뱉으면서 똑같이 탄식하는 내게, 바넷사는 또 툭 내뱉듯이 그렇게 대답했다.

    사랑이 무겁다는 걸 부정하지 않고 쿨하게 넘어가는 건 멋졌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

    바넷사야. 아마 "그러길래 누가 아무 여자나 잡고 꼬시라고 했습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만, 네가 방금 한 그 말,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거 알아?

    "그야. 바넷사가 내게 반하게 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큿?! 제 말은 그런 뜻이······!"

    설마하니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줄은 몰랐다는 듯, 바넷사는 낮은 침음성과 함께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면서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리 무표정으로 눈에 힘을 주고 날 노려봐도, 그렇게 뺨까지 새빨개져 있어서야 아무런 압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넷사 자신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차나 타십시오."

    거의 억지로 밀어 넣는 것처럼 내 팔을 잡아끌어 마차 안에다 던져놓고, 바넷사는 곧바로 마부석으로 모습을 감춰버렸다.

    "바넷사."

    하지만 나로서는 이대로 대화를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부석 쪽에 난 창문을 열고 계속해서 바넷사와 대화를 시도했다.

    "······뭡니까."

    또 시끄럽다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넷사는 내 부름에 답해줬다.

    "아까 그렇게 말해놓고 이런 말 하기 조금 무안하지만, 돌아가자마자 바로 내 방에 가자."

    "······아직 밤을 시작하기엔 이른 것 아니었습니까?"

    억지로 태연한 말투를 가장하면서, 바넷사는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물론, 나한테는 아무런 데미지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잖아. 어차피 바넷사도 시간 여유는 충분할 거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 실망할 거야."

    던전에 가서 7계층까지 도달하고, 아라크네와의 트러블로 올라온 후 미리엘의 조교가 끝날 때까지. 바넷사가 나와 단둘이 있을 여유 시간을 만들기에는 충분히 시간이 있었다.

    물론 따로 시간을 만들어두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완벽 집사님이 그 정도 준비도 해놓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얘도 날 엄청 좋아한다니까.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역시나, 바넷사는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

    "자, 난 여기에 있어."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나랑 같이 내 방에 온 바넷사는, 내가 곧바로 섹스부터 하자고 덤벼들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분위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두 팔을 벌리자, 바넷사는 조금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아무리 그래도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건 너무하지 않냐.

    나라고 언제나 성욕에 가득 차 있는 건······아, 아무튼 지금은 그럴 생각으로 부른 게 아니었다고.

    "내가 던전에 가기 전에 바넷사가 그렇게 말했잖아? 자기 차례는 아직이니까 돌아와서 제대로 안아달라고. 아라크네 때문에 돌아오자마자 어수선해서 조금 늦어버렸지만, 이렇게 7계층도 멀쩡히 다녀왔으니까 이제 약속대로 감동의 포옹을 할 차례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바넷사의 몸을 끌어안자, 바넷사도 이번에는 딱히 피하려고 하지 않고 순순히 내 품 안에 안겨들어 왔다.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게다가 고작 이런 걸로 조금 감동까지 받은 모양이었다.

    물론 무표정에 무뚝뚝한 말투는 여전해서 잘 티는 나지 않았지만, 난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둘밖에 없는 데다가 집사로 있는 것도 아니니까, 감동했으면 조금은 그런 내색을 해도 좋을 텐데.

    "그럼 설마 까먹고 있을 줄 알았어?"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바넷사의 입술에 입술을 맞추려고 한 순간, 갑자기 바넷사가 움찔하고 몸을 떨면서 시선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렸다. 정확히는 자신의 하복부 쪽으로.

    "······닿고 있습니다만."

    "신경 쓰지 마."

    어쩔 수 없잖아. 너 같은 여자랑 이렇게 밀착하고 있는 거니까.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이라고.

    "······이걸 말입니까?"

    그런 게 가능하겠냐는 듯이, 바넷사는 자신의 하복부를 찌르고 있는 내 물건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하긴, 존재감이 조금 남다르기는 하지. 그러면 하는 수 없나. 원래는 저녁때까지 바넷사랑 섹스 없이 그냥 알콩달콩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조금만 계획을 수정하자. 아주 조금만.

    "응읍······으응······."

    나는 바넷사의 몸을 끌어안고, 그대로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몸이 더욱 밀착되는 바람에 바넷사는 하복부에 닿은 내 물건이 더욱 신경 쓰인다는 듯 하반신을 가볍게 비틀었지만, 그래도 이내 나와의 키스에 신경을 집중시키고 할짝할짝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괜히 더 달콤하게 느껴지네."

    "······네."

    서로의 혀가 맞닿으며 간질이기는 했지만, 결코 끈적한 느낌은 아닌 달달한 키스.

    그렇게 키스를 주고받은 후 바넷사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말하자, 바넷사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바넷사도 나랑 이런 분위기로 둘만 있는 게 오랜만이어서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 슬슬 조금씩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52화 > 끝

    ⓒ CurtainCall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