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45화 >
"아니. 디아나. 들어 봐. 이 녀석, 어려 보이는 여자를 좋아하는 변태라니까? 지금 디아나 정도의 외모면 충분히 스트라이크 존에······너 우리 디아나 무시하냐! 이렇게 예쁜데! 왜 그렇게 반응이 덤덤해!"
처음에는 저 녀석에게 디아나의 외모가 얼마나 취향 직격인지를 설명하려고 했던 나였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디아나한테 구박받을 거리만 쌓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방향을 바꿔서, 듀크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디아나도 갑자기 내가 자기 외모를 칭찬하면서 듀크한테 좀 더 반응을 보이라고 윽박지르자,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듀크 역시도 마찬가지여서.
"······제, 제가 지고의 대마법사님께 침이라도 흘리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죽여버린다."
"네, 네에······."
괜히 이상한 질문을 했다가 나한테 협박만 더 들었다.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듀크였지만, 사실 듀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만족스러울지 나 자신도 모르겠으니 당연한 일이다.
불합리하다고? 세상이 원래 그런 거야.
"그래서, 진짜로 왜 디아나한테 반응이 없는데? 너 옛날에 디아나한테 뭔 잘못이라도 했냐?"
"저, 저따위가 지고의 대마법사님께 어떻게 감히······전 그저······."
조금 주저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듀크는 왜 디아나한테 반응을 안 보이는지 설명해줬다.
그리 긴 설명도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거였다.
"그러니까, 예전에 레벨 높은 여자한테 들이댔다가 망신당한 기억이 있어서, 자기보다 강한 여자가 무섭다고?"
"······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원래는 6계층까지 다녔던 모험가였으면서 낮은 계층에서 레벨 낮은 여자들이랑 다니고 있었지.
게다가 일단은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인 주제에 묘하게 강자한테 설설 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이 녀석도 이 녀석 나름대로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뭐, 딱히 자세한 사정이 궁금한 것도 아니니 더 묻진 않겠지만.
"그럼 그렇지. 그런 게 아닌 이상 우리 디아나를 보고 반응이 없을 리가 없지."
"자네, 말실수를 덮어 보겠다고 필사적이구먼."
아까 내가 디아나의 나이나 외모 나이로 말실수했던 걸 잊지 않았는지, 디아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걸 보면, 그래도 칭찬해주는 게 좋기는 좋은 모양이지만.
"아, 아무튼 그래서. 왜 너희만 튀어나오냐? 여기 집주인은 어디 갔고?"
"······뭐냐."
개성 넘치는 놈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얘기가 새버렸지만, 우리 목적은 이 녀석들을 만나러 온 게 아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쓰레온을 찾자, 갑자기 그렉과 듀크의 뒤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오 씨! 깜짝이야. 있었냐?"
안 그래도 음침하게 생긴 놈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서 음침한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는 바람에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쓰레온은 확실히 거기에 있었다.
저 건 또 왜 저렇게······아니.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나. 나 같아도 이 녀석들이랑 같이 있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없으니까.
내가 저 지옥에 말려들어 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여신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사실 최대한 놀려먹으면서 밉살스럽게 얘기할 생각이었고, 디아나를 데려온 이유도 그런 밉살스러운 말에 신뢰성을 더하기 위함이었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무리 나라도 불쌍해져서 심하게 장난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동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뭐?! 설마 여신님이 강림하신 거냐?! 네 녀석······! 여신님을 부를 땐 나도 동석시켜 준다고 그렇게······흐어윽!"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쓰레온은 언제 피폐해져 있었냐는 듯 광기가 담긴 눈동자를 번득이면서 내게 덤벼들었다.
심지어 내 멱살까지 잡고 들어 올리려고 했던 쓰레온이었지만, 미리엘과의 대결로 민첩 스탯을 왕창 올린 내가 쓰레온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손이 내 옷에 닿기 직전에 내가 먼저 놈에게 성자의 손길을 먹일 수 있었고, 쓰레온은 그 한 방에 바로 다리를 오므리고 주저앉아 버렸다.
그거 한 방으로 싸버린 거냐.
뭐, 싸버리면 스킬 효과도 남지 않으니, 나로선 편해서 좋다만.
아무튼 그렇게 주저앉아버린 쓰레온을 내려다보며, 나는 최대한 뻐기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줬다.
"너무 그렇게 안달하지 마. 네 저주에 관한 것도 제대로 물어보고 왔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물어본 게 아니라 여신님이 먼저 알려주신 거지만, 일부러 발품 팔아서 여기까지 행차해준 거다. 이렇게 뻐기는 것 정도는 해도 되잖아?
"뭐? 그, 그래서?"
"내게 충성을 맹세해라."
"무, 뭐?"
"이 성자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그 앞길을 밝히기 위해 그 몸을 불태워라! 성자님이 가는 길이야말로 그 피에 내려진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니!"
쓰레온은 무슨 개뼈다귀 뜯는 소리를 하고 있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성자다운 말투로 그렇게 선언해줬다.
"······."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군. 하지만 그럴 줄 알고 디아나를 데려왔지! 내 말은 못 믿겠더라도 디아나의 말이라면 믿겠지?! 자, 디아나! 어서 내 말이 사실이라고 해줘!"
"너 같은 걸 좋아하는 시점에서 지고의 대마법사님도 항상 정상이라는 보장은······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디아나의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내밀며 외치자, 쓰레온이 마치 들으라는 듯 비아냥을 중얼거렸다.
저 녀석, 그동안 지옥에서 지내더니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어진 건가?
결국 디아나가 무섭기는 했는지 바로 눈을 내리깔며 얼버무렸지만.
그야말로 소인배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성자의 사명을 마치는 순간 자네의 저주가 풀리는 건 사실일세."
사이에 낀 디아나는 ‘이 몸이 왜 이런 역할을······.’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내 말을 쟤들 입맛에 맞게 통역해줬다.
쓰레온이 대놓고 우리를 비아냥거렸는데도 그냥 넘어가 주다니. 실로 마음이 넓은 대마법사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까 디아나가 그렇게 모든 사람한테 존경받고 사랑받는 거겠지.
뭐, 지금은 디아나가 아니더라도 웬만하면 넘어가 줄 상황이기는 했지만.
혹시 친구 사이의 흔한 장난 정도로 생각하는 걸까?
저런 녀석이랑 친구라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러면······."
아무튼 디아나까지 그렇게 말하니 쓰레온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좌그렉 우듀크를 번갈아 보더니, 쓰레온의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저 둘이랑 같이 지옥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인 모양이다.
그렇게나 원하던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일인데, 그런데도 고민하게 할 정도로 저 둘이랑 같이 던전에 가는 게 싫은 거냐. 음.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후하핫. 알았냐. 이제부터 네놈은 온 힘을 다해서 이 성자님의 발이 되어 움직이는 거다!"
물론 내가 알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디아나를 내민 자세 그대로 소리높여 웃으며 쓰레온을 조롱해줬다.
아까는 불쌍하니까 심한 장난은 못 치겠다고 하지 않았냐고?
아까 비꼬는 거 보니까 멀쩡해 보이던데 뭘.
하지만 그런 조롱에도 기뻐하는 놈은 있었으니, 슬슬 진짜 게이인 건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날 찬양해 마지않는 그렉이었다.
"오오오! 그러면 또다시 저희가 나설 차례가 온 겁니까?!"
"아니. 딱히."
또 달라붙으면 귀찮아지니, 나는 시작부터 녀석의 난입을 막았다.
"시킬 것도 없으면서 그런 말을 한 거냐?!"
저거 봐. 쓰레온 녀석. 아직 쟤들이랑 던전에 안 가도 된다는 걸 알고 바로 본모습을 되찾잖아. 쟤 아직 멀쩡하다니까.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잖아."
"이······후욱······후욱······그래서, 그 잘난 사명이라는 게 뭔데?"
"중간과정이 많이 까다롭지만, 요는 이 세상에 남은 마신의 마력을 모조리 지워버리는 거지."
"······지, 진짜로?"
내 밉살스러운 태도에 심호흡까지 해가면서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질문한 쓰레온이었지만, 이어지는 내 대답에 또 바로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쫄았냐?"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마신이라고! 마신!"
이건 또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하게 말하는 것 좀 봐.
솔직한 게 언제나 미덕인 건 아니라고.
"걱정 마라. 마신이랑 직접 싸워야 한다든가 그런 건 아니니까."
"그, 그럼 대체······."
"아직 비밀이야. 이런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비밀 유지가 잘 되는 법이니까. 뭐, 아무튼 네 저주를 어떻게 풀 수 있는지는 알려줬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까, 그때까지 최대한 실력을 갈고닦으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으라고. 크하하하!"
사실 이제는 아라크네 문제도 해결했으니, 던전 밖에서 경계할 사람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 아래에 있는 마신 종족들 사이의 전쟁을 멈추거나 교화를 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여기서 알려줘도 딱히 문제 될 건 없겠지만, 저렇게 말하는 게 더 무섭지 않겠어?
"자네······그래서는 마치 자네가 마신의 끄나풀 같지 않은가······."
황당해하는 디아나를 이끌고, 나는 호쾌하게 웃으면서 쓰레온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하여간 자네는······."
아무리 그래도 남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면 안 되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그런 꾸중을 들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디아나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만 짓고는 날 꾸짖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꾸짖기는커녕,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이 살짝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설마하니 진짜로 조금 전 대화를 친구끼리 장난식으로 투닥투닥 거리는 훈훈한 대화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진짜 아니라고. 방금 전 그건 일방적인 능욕이었다고. 혼나야 하는 일이었다고.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혹시 벌써부터 기대하고 있어?"
물론 스스로 나서서 혼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얘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음? 무얼 말인가?"
역시나 살짝 기뻐 보이는 표정으로, 디아나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얼 말하기는. 안 되잖아. 머리 좋은 애가 벌써 그 얘기를 까먹으면.
"저택에서 내가 어떤 요구를 할지. 돌아가면 뭐든 내 부탁을 들어주는 거였지?"
"아으! 아, 아닐세! 이 몸은 그저······!"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저택 도착 전에 나눴던 대화가 다시 떠오른 듯, 디아나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좌우로 세차게 붕붕 흔들었다.
"그저?"
"자네, 그 듀크라는 자를 앞에 두고 이 몸을 감싸지 않았는가······."
그래서 무척이나 기뻤는데, 지금 자네의 행동이 전부 망치고 있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디아나는 살짝 원망스러운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기분 좋아 보이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혹시 나 기껏 점수 벌어놓고 왕창 깎아 먹은 거야?"
"음. 마이너스일세."
"그런 대마법사님에게 제안이 있습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디아나였지만, 내게는 아직 기사회생의 패가 남아있었다.
"음?"
"원래는 저택에 가면 전에 디아나가 사 왔던 개목걸이를 목에 걸고 노출 산책 플레이를 할 생각이었지만, 그걸 안 하는 대신 다시 점수를······"
"그런 것을 하려고 했던 겐가아?!"
"아니. 뭐든 해준다고 하니까."
"뭐든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정도가!"
그렇게 말하면서, 디아나는 토닥토닥 어택을 내 몸에 무차별 난사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사지로 쓰기에도 약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내게는 데미지가 없었지만.
"막상 하면 디아나가 더 좋아할 거면서."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 이 몸이 어찌 그런 것을······! 애초에 이 몸이 이렇게 된 것도······! 우으으으!"
내가 일부러 들리도록 중얼거리자, 디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내 탓을 하려고 했다.
아마 나한테 조교 당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려던 거였겠지. 어제 미리엘이 있을 때 혼자서 머리를 감싸 쥐고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내 탓을 해버리면, 자기가 노출로 흥분하는 체질이 됐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꼴이 된다.
머리 좋은 디아나는 피가 머리에 쏠린 와중에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없이 내 몸을 토닥여댔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45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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