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40화 (924/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40화 >

이런 세계에서 가상현실의 개념을 이해시키는 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결국 우리 애들이 내가 진짜 이 세계로 오기 전까지 동정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는 이미 내 등짝은 성한 곳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아픈 건 등짝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그 나이 먹도록 진짜 못 해봤다고 열변을 토하고 난 후, 나는 하얗게 재가 돼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지만 그런 내게 우리 애들은 아랑곳하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가상 현실에서의 경험이었다고 하더라도, 질투가 안 나는 건 아니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원래 세계에서 친구 새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자 친구가 야동만 봐도 화내서 딸도 제대로 못 치겠다고.

그때는 모쏠 앞에서 자랑이냐고 욕을 바가지로 퍼부어줬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놈도 이런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내 등을 어루만지며 치료해주고 계시는 천사님만이 유일하게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주셨다.

평소보다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서 상처가 찌릿찌릿한 느낌이 드는 건, 분명 내 기분 탓이겠지.

"하지만 전쟁을 멈춰야 한다라······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 몸으로서도 감이 잡히지 않는구먼."

아무튼 드디어 내 사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 거다. 디아나는 앞으로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방법은 여신님이 다 알려줬잖아.

그야 사소한 트러블 때문에 끝까지 듣지는 못했지만, 여신님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전쟁밖에 모르는 저 밑에 놈들한테 섹스의 멋짐을 알려서 전쟁을 멈추라고.

사라네 할아버지가 사라네 할머니한테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담아 설득해도 되고, 내가 미리엘한테 했던 것처럼 강압적인 방법으로 섹스의 멋짐을 알려줘도 된다.

중요한 건 "싸우지 말고 섹스해! 섹스!"가 통하면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디아나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려고 했지만.

"아니. 섹······."

"그러네요. 전 전쟁 같은 걸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좋을지······. 하지만 다 같이 고민하면 분명 좋은 방안이 생길 거에요."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불끈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씀하시는 천사님에게 말이 잘리고 말았다.

여신님의 마지막 말이 중간에 잘렸던 게 생각나는 건, 내 기분 탓일까?

하지만 여신님과 다르게 나는 이 세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있지 않다. 말이 끊겨도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다는 얘기지!

"그러니까 얘들아? 섹······."

"구원은 좀 조용히 해!"

"네······."

여신님의 말을 그대로 전하려 했던 것뿐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억울해······.

아무리 필요하면 다른 여자랑 해도 좋다고 허락했던 우리 애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다.

하긴 대규모 전쟁을 멈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섹스를 해대야 할지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도 아니다.

게다가 얘들은 내가 미리엘을 섹스로 굴복시키고 난 결과물을 봐버렸으니까 말이야. 분명 그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겠지.

결국 나는 구석에 찌그러져서 우리 애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봐도, 당장 뾰족한 수가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신님이 대충 상황 설명을 해주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전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든가, 파벌은 얼마나 있다든가, 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된다든가 하는 자세한 정보 말이다.

"우선은 정보부터 수집해야 할 것 같구먼."

결국 우리가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역시······거기서 전쟁하는 분들을 만나야 하는 거겠죠?"

전쟁을 겪어본 적 없는 레이아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막연한 두려움이 느껴지는 건지, 레이아는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실 여신님의 얘기만 들어보면, 마신 쪽 사람들은 전부 전쟁밖에 모르는 사이코패스 같이 느껴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아니. 꼭 전쟁 중인 애들을 찾아서 전쟁 한복판에 뛰어들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마신의 떠받드는 세계라고 할지라도, 개중에는 전쟁을 피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할 거야. 목숨 아까운 건 그쪽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이야. 일단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

서 얘기를 들어보는 게 어때?"

그런 말을 하면서, 나는 머릿속에 아까 만났던 그 구미호 아가씨를 떠올렸다.

적어도 그 여자는 마신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는 전투광 같은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날 제압하고도 덤벼들 생각은 안 했었고, 오히려 내가 무서운 표정을 짓자마자 꼬리를 말고 도망가버렸으니까.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릴까?"

"풀릴 거야."

사라 역시도 아래쪽에는 전쟁광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흠. 뭔가 근거가 있는 모양이구먼."

"뭐,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밑에서 만난 구미호 아가씨 얘기를 해줬다.

당연히 우리 애들은 그 얘기를 듣고 일단 전쟁 한복판에 뛰어들지 않게 되어서 안도한다든가, 아래쪽 세계에도 전쟁광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희망을 본다든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 바보가 진짜! 갑자기 어딜 다녀왔나 했더니 혼자 거길 다녀왔다고?!"

"자네가 내려가 있는 동안 마법진이 망가졌으면 뻔했나?!"

제일 먼저 돌아온 반응은 제대로 화나신 용사님과 대마법사님의 꾸중이었다.

뭐, 날 걱정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저 화난 표정도 마냥 귀엽게만 보이기는 했지만.

"구원 씨. 왜 저희하고 같이 가려고 하지 않으신 건가요?"

심지어 우리 성녀님마저도 이런 반응이었으니까 말이야.

사실은 누구보다도 아래쪽에 구미호가 있었다는 말에 반응했어야 하는 사람인데.

"아니. 미안. 머리에 피가 몰려서."

"반성하고 계시나요?"

내 팔을 꽉 안아서 그 커다란 가슴 사이에 끼우고는, 옆에서 날 올려다보며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이시는 천사님.

화났다는 걸 뿜뿜 어필하고 있을 생각이겠지만, 천사님은 저런 표정이 너무 안 어울려서 오히려 흐뭇한 미소만 자아낼 뿐이었다.

"네."

뭐, 그렇다고 진짜로 웃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안면 근육에 힘을 주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여줬지만.

그리고 우리 성녀님은 그 대답만으로도 만족하셨는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하지만 성녀님과 달리, 용사님은 아직 그 정도 대답으로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정말 반성하고 있는 거겠지? 다음에 또 이러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저, 정말이라니까."

계속해서 화난 표정으로 날 몰아붙이는 사라에게, 나는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해줬다.

그런데 그게 또 사라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라.

"야! 구원! 왜 레이아가 할 때랑 반응이 다른데?!"

"아니. 넌 진짜 무섭다고!"

"뭐야?!"

"아, 아뇨.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이씨······."

레이아 때와는 너무도 다른 반응에 등짝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또 내가 겁먹을 테니까 함부로 손댈 수도 없다.

그런 느낌으로 손을 바르르 떨면서, 사라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위험해. 너무 놀렸나.

"하지만 구미호라니. 예상했던 일이지만, 역시 전쟁신 시대의 종족이었구먼."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내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준 것이, 바로 디아나였다.

평소에는 자기도 가세해서 나랑 장난을 쳐대도 이상하지 않은 디아나지만, 그래도 최연장자인 만큼 진지한 얘기를 해야 할 때는 진지해지려는 모양이다.

"네······아! 구원 씨, 그럼 혹시 돌아오셨을 때 그렇게 화나셨던 이유도······?"

그리고 그제야 구미호라는 말에 제대로 반응하신 천사님은, 갑자기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촉촉한 눈으로 날 바라보셨다.

"화, 화난 거 그렇게 티 났었어?"

"네."

······즉답이라니. 티 안 내려고 엄청 표정 관리하고 왔었는데 말이야.

아니. 다 좋게 끝났으니 상관은 없지만.

"······뭐, 그렇지."

"구원 씨······."

핑크빛 모드의 마틸다가 생각날 정도로 달콤한 시선을 내게 보내면서, 레이아는 감싸 안고 있던 내 팔을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 역시도 그런 레이아에게 이끌리듯이 눈을 마주치고 자연스럽게 얼굴을 레이아 쪽으로 가져가서······.

"코홈! 코홈! 그러면 그 구미호 처자를 다시 한번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내 입술과 레이아의 입술이 맞닿기 직전, 디아나의 귀여운 헛기침 소리에 우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응. 그렇지."

알았어. 디아나야. 진지한 얘기하는 도중에 자꾸 딴 길로 안 빠질 테니까 그만 좀 노려봐.

뭐, 자기도 나랑 붙어있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면서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내가 자꾸 딴 애들이랑 이러니까 토라지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그리고 텔레포트 마법진 근처에서 그 처자를 만났다는 것은, 어쩌면 텔레포트 마법진이 무사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먼."

아, 그런가.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마신의 종족 중에서도 과격파가 아닌 사람들이 텔레포트 마법진 근처에 자리 잡고 살고 있기 때문에 텔레포트 마법진이 무사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거구나.

그런 생각은 또 안 해봤었네.

그렇다는 건 과격파가 아닌 사람들을 그 근처에서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건가.

"그래서, 어떻게 하겠는가? 바로 가볼 생각인가?"

"아니. 너무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아?"

혼자서 멋대로 아래에 내려갔다 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때는 진짜로 머리에 피가 몰려서 그랬던 거고.

여신님의 사명이 뭔지도 정확히 알아냈으니, 이제는 마음 편하게 먹고 느긋하게 사명을 완수해나가려고 하면 된다.

"그렇지만도 않네. 여신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은가. 이대로 두면 마신이 부활할 힘을 얻을지도 모른다고."

"아······."

그러고 보니 또 그게 있었지. 여전히 시간제한은 있다는 건가.

당연한 얘기지만, "마신 따위 부활하면 어때. 다시 쓰러뜨리고 봉인하면 그만이지." 같은 멍청한 소리는 할 생각도 없었다.

아까 우리 여신님이 강림했을 때 봤잖아?

그렇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였는데도, 여신님이 오해부터 풀자고 한마디 하자마자 곧장 기분이 풀려서 농담 따먹기까지 하고 있었다고.

그때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청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아니. 분명 여신님이 날 진정시키기 위해 내 정신 쪽에 뭔가 힘을 썼던 거겠지.

펠리시아가 폭주했을 때 내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던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여신님과 직접 마주친 것도 아니고 그냥 레이아의 몸에 강림한 것뿐이었는데도 그 정도 영향력을 끼쳤던 거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이란 그런 존재라는 거겠지.

그러니 아무리 우리 여신님한테 졌다고는 하지만, 마신이라는 것도 만만히 볼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애초에 우리가 마신을 때려잡을 수 있으면 여신님께서 마신이 부활하기 전에 전쟁을 종식시키라는 말도 하지 않았겠지.

그런 이유로 서두르기는 서둘러야 하지만······.

"그래도 당장은 아니야. 조금 쉬었다가 가자. 여러모로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일단 미리엘도 아직 저택에 있을 테니 그 녀석 문제도 제대로 매듭을 지어야 하고, 펠리시아도 슬슬 풀어주지 않으면 폭주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며칠 동안 미리엘하고만 붙어있느라 너희 얼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조금 정도는 너희랑 같이 있다가 가도 되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비어있는 팔로 사라와 디아나의 몸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응긋."

물론 사라도, 그리고 지금까지 나랑 알콩달콩 거리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던 디아나도 아무런 저항 없이 내 품에 포옥 안겨 왔다.

뭐, 그냥 순순히 안기는 게 부끄러웠는지, 사라는 괜히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소리 하기는 했지만.

"흥. 실은 우리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즐겼던······햐응?! 바, 바보! 어딜 만······으응!"

그 멋진 엉덩이를 꽉 잡아주자 바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일단 저항하는 것처럼 내 손등 위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때리는 사라였지만, 아까 등짝을 때려댈 때보다 명백하게 힘이 덜 들어가 있어서 가벼운 앙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애들 셋과 동시에 몸을 밀착시킨 채로, 나는 방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실비아야."

"네, 네힛?!"

"뭘 분위기 봐서 빠져주려는 것처럼 슬금슬금 도망가냐. 너도 이리로 안 와?"

실비아 얘는 너무 눈치를 본다니까.

누가 보면 처음부터 자리에도 없는 줄 알았겠네.

"하, 하지마안······."

"실비아는 나 안 보고 싶었나 봐?!"

내 명령에도 실비아는 망설이는 눈치로 문 쪽을 힐끔힐끔 바라봤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결국 항복하고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우, 우으으으······!"

그래. 그래. 언제나 그렇게 실비아 테라피를 해주는 게 네 정위치라고.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40화 > 끝

ⓒ CurtainCall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