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39화 (923/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39화 >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우선 오해부터 풀죠."

그 다 알고 있다는 느낌을 깔보는 것처럼 느낀 나였지만, 그래도 여신은 여신.

그 목소리에 담긴 신성함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성자 구원. 당신은 제가 어떤 여신인지 알고 계시지요?"

"그야 섹······대지의 여신이죠."

위험해. 하마터면 섹스의 여신이라고 할 뻔했어.

뭐, 다 들켰는지 입가의 미소가 살짝 애매한 느낌으로 변했지만.

전에 강림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제발 그런 안 어울리는 표정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우리 천사님 얼굴로 신성한 기운을 풀풀 내면서 애매한 미소로 바라보시면 느낌 진짜 이상하다고요.

"그래요. 저는 적극적으로 섹스를 권장하고 있죠."

아니. 이봐요 여신님! 그러기에요?! 그걸 인정해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천사님 목소리에 신성함을 담아서 섹스라는 단어를 함부로 내뱉지 말아 주실래요?!

"그러면 제가 왜 섹스를 그렇게나 권장하는지도 아시지요?"

또 말했어! 또 말했다고 이 사람! 아니. 이 여신!

"이종간······다양한 가능성을 보기 위해서죠."

아니. 여신님. 이번에는 인정할게요. 맞아요. 제가 말실수한 건 맞아요.

그런데 댁이 자꾸 우리 천사님 몸으로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져서 말이 헛나오는 거잖아요!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건 그만둬주세요!

"그래요. 다양한 가능성을 위해서죠."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여신님이라도, 이번에 내가 말할뻔했던 단어까지 입에 담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안도하는 날 보며 내게 못 말리겠다는 듯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면서 미소를 한 번 지어주시고, 여신님은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 제가, 아무리 전쟁신의 아이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가능성을 품을 아이들을 해치려 할 것 같나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 사명이 뭘지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봤을 때, 그런 얘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에 피가 올라서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즉, 때려잡는 게 제 사명이 아니라고요?"

"네."

"으, 으하. 으하하하하! 역시 여신님! 이 여신님의 충실한 사자 구원! 믿고 있었습니다!"

"아까 저한테 야라고······."

"이야아아아! 여신님은 두 번째 뵙게 되는데도 여전히 신성하시구나! 아니. 세 번째로 뵙게 되는 거였나요?! 그, 그래서! 아까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군요. 우선······."

손을 뻗어서 그 고운 손끝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가 싶더니, 뺨 한가운데를 가볍게 꼬집고는 흔들어주시는 여신님.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내 귀여운 오해를 용서해주시는 건지, 여신님은 곧바로 손을 내리고 내 말을 받아주셨다.

정말로, 마음이 넓으신 분이라 저도 여신님의 사자로서 활동하는 보람이 납니다.

"절 부를 때는, 레온 플리투스도 같이 있을 때 부르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그것 때문에 일부러 기다리고 있었는데······."

뒷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지만, 여신님의 말은 여전히 신성한 느낌으로 공간 전체에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다 들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강림하셨을 때는 내가 스킬 포인트를 투자하기 무섭게 곧장 임의로 강림하셨지.

이번에는 쿨이 돌아오자마자 임의로 강림하지 않으셨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하늘에서 우리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언제 강림하면 좋을지 타이밍을 엿보고 있으셨다고 생각하면, 이런 생각을 하면 불경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여신님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레온 플리투스가 누구······아, 아아! 용사! 용사 말이죠!"

매일 쓰레온이라고 부르고 있어서 풀네임 같은 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약속은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또다시 못 말리겠다는 미소를 지어 보이시면서, 여신님은 날 타이르듯 그렇게 말해주셨다.

우리 천사님 몸을 빌리고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여신님. 우리 천사님하고 은근히 성격이 비슷한 것 같지 않아?

역시 그건가. 천사님은 진짜로 여신님의 곁을 지키던 진짜 천사님의 환생이라는 건가.

"레온 플리투스에게는 이렇게 전해주세요. 성자의 사명이 끝날 때, 플리투스의 피에 내려진 저주도 풀릴 것이라고."

그 말은 즉, 앞으로 쓰레온을 더욱 합법적으로 부려 먹을 수 있다는 얘기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뭐, 여신님이 그런 의도로 말했을 리는 절대 없지만.

"그러면 오해도 풀린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당신의 사명에 관해 얘기를 해보고 싶지만, 그 전에."

"네?"

"우선 이 아이를 성녀로 하죠. 지난번처럼 시간이 없어서 도중에 얘기가 끊기면 안 되니까요."

내게 가볍게 윙크를 한 번 해주시고, 여신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레이아의 몸에 무리가 간다면서 빨리 강림을 풀어버렸지.

여신 강림을 제대로 쓰려면 성녀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던 건가.

하지만 레이아는 아직 대사제 레벨이 부족할 텐데? 레벨은 250을 다 찍었지만, 아까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 확인했을 때도 대사제 레벨은 아직 249였다. 여신님 파워로 성직자 레벨 1 정도는 커버가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스테이터스 창을 열어보니, 어느새 레이아의 대사제 레벨은 250이 되어있었다.

아, 그런가. 직업 레벨이라는 것은 그 직업과 관련이 있는 행동을 하면 오른다.

대사제는 당연히 성직을 수행하는 것으로 레벨이 오르게 되고, 그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이 바로 여신 강림이겠지. 그래서 레벨이 오른 건가.

여신님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두 팔로 그 몸을 감싸 안았고, 그 순간 레이아의 몸이 빛에 감싸이며 더욱 신성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원래 성직자들이 전직할 때는 기도를 통해서 전직한다는 모양이니, 여신님이 직접 강림하신 지금 전직을 시켜주는 것쯤은 쉬운 일이겠지.

애초에 사도 임명을 한 사람의 스테이터스 창을 관리하고 전직을 간편하게 시켜주는 내 능력도 여신님이 주신 거고.

"후우······. 이제 시간에 쫓기지 않고 차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겠네요."

조금 섹시한 느낌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뜨신 후, 여신님은 다시 내게 방긋하고 웃어 보이셨다.

"조금 긴 얘기가 될 거예요. 제대로 들어주셔야 해요?"

"물론이죠. 계약서도 제대로 안 읽었는데 얘기까지 제대로 안 들을 수는 없죠."

"후훗."

다행히 여신님한테도 내 농담이 먹히기는 했는지, 여신님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천천히 얘기를 해주셨다.

"신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신앙심으로 힘을 얻고 존재하는 거예요. 바꿔 말하자면, 신앙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신은 불멸이라는 얘기죠."

갑자기 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당황했지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여신님이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전쟁신이 지금 그런 상황이어서요. 수천 년 전, 저와의 대립 이후 전쟁신은 대부분의 힘을 잃고 봉인되었죠. 저는 전쟁신의 아이들을 천천히 제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며 자연히 교화되기를 기대했지만, 지금까지 전쟁신의 교리를 따라왔던 아이들은 제 아이들

과도 전쟁을 벌이려고 했죠. 저는 눈물을 머금고 일단 전쟁신의 아이들을 제 아이들과 닿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 가둬둘 수밖에 없었답니다."

"과연. 그리고 아래에서 놈들은 계속 마신을 믿으며 전쟁을 일으켜대는 바람에, 마신의 힘은 그 이상 약해질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는 얘기군요."

"그래요. 제 아이들이 모험가라는 직업을 얻고 전쟁신의 힘으로 탄생한 몬스터들에게서 마석을 가지고 나오는 것으로 그 힘을 약화시켜준 덕분에 전쟁신이 부활할 힘까지는 얻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 이상 힘이 약해지지도 않은 채 전쟁신은 계속해서 소멸하

지 않고 잠들어있었죠."

마석을 가지고 나오는 게 그런 의미가 있었다니.

던전이라는 게 단순히 7계층으로 엄한 사람이 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 역할만 했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런 것치고는 너무 공을 들이기는 했지.

"전쟁신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 아래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을 멈춰야만 했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전쟁의 주축이 되는 용사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럼 저 이전에 왔던 이방인들은······."

"그래요. 이 세계는 전쟁다운 전쟁이 없는 세계니까요. 저는 다른 세계에서 역전의 용사들을 불러 조금씩 제 힘을 나눠준 후 아래에 있는 용사를 설득하도록 했어요.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후, 여신님은 시선을 사라에게 돌렸다.

"사라 아우덴. 당신의 할아버지 사무엘 아우덴이 무사히 사명을 완수했죠. 그것도 제가 원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용사를 감화해서, 같이 데리고 나와 위에서 살게 됐죠."

역시나 사라의 할아버지는,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사라의 할아버지는 이방인이었다.

다만 여신님이 내려준 사명 완수에 실패했을 거라는 우리의 추측과 다르게, 사라의 할아버지는 제대로 사명을 완수했다는 모양이다.

설득이라든가 감화라든가 하는 단어가 조금 신경 쓰이지만······혹시 진짜로 내가 상상하는 그런 식으로 데려왔다는 의미인가? 사라네 할아버지, 꽤 하잖아.

"문제는, 사명을 완수하는 게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죠."

"네?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요?"

하긴. 그러니까 이방인들의 사명이 끝났는데도 날 불러온 거겠지만.

"네. 제가 이방인들을 불러오기 시작했을 당시에는 용사들이 여러 파벌로 나뉘어서, 서로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전 용사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아래쪽에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제가 상황을 엿보기도 힘들어졌을

때,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리리안 플리투스. 전쟁신을 섬기는 마지막 남은 용사이자 거기 있는 사라 아우덴의 할머니가 모든 용사 파벌을 물리치고 전쟁을 끝내버린 거죠."

······한 마디로 최강의 용사였다는 거 아니야. 엄청나게 위험한 사람이었잖아.

사라가 레벨이 부족할 때부터 무식하게 강했던 것도, 미리엘이 용사가 아닌데도 무식하게 강한 것도 한 방에 이해가 됐다. 최강 용사의 손녀들이었다니. 어쩐지

진짜 사라네 할아버지는 잘도 그런 사람을 설득해서 위로 데리고 나왔네. 대체 어떻게 설득을······응? 잠깐만.

"전쟁이 끝났는데 그 위에 군림하는 용사를 데리고 왔다는 건······."

"그래요. 타이밍이 안 좋았죠. 모처럼 잠잠해지려고 했던 아래쪽은 서로가 서로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과연. 그래서······.

"사무엘 아우덴이 제 사명을 완수했는데도, 제가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용사라는 억제력이 사라진 지금, 아래쪽에서는 용사들이 있을 때보다 더 거센 피바람이 불고 있어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전쟁신이 부활할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에요. 성자 구원. 당신의 사명은 바로 전쟁신이 부활하기 전에 아래쪽에서 부는 피바람을 멈추는 것이에요."

역시 이렇게 되나.

아까 오해한 게 미안할 정도로, 우리 여신님은 착하신 성격이었다.

물론 낙관할 상황은 아니지만.

내 손에, 그리고 우리 애들의 손에 무수히 많은 피를 묻혀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명의 위험성이 낮아진 건 아니다.

그 넓은 대륙에서 피바람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격하게 벌어지고 있는 전쟁을 멈추라니.

"아, 물론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당신들이 예상한 대로 던전은 이방인들이 힘을 기르는 구조로 되어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힘을 기르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것도 저런 패널티를 가지고.

"그 말은 역시나."

"네. 사무엘 아우덴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저 불쌍한 전쟁신의 아이들을 구원해주세요. 제가 만든 게임을 전부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섹스만으로 클리어한 당신이라면, 분명 저 아이들에게도 섹스의 멋짐을······자, 잠깐만! 아이야?! 아직 얘기가 안 끝······!"

절 성자로 발탁된 이유가 그런 거였습니까?!

아니. 확실히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을 벌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설마 진짜로 그런 이유로 데려온 거였어요?!

그것도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우리 애들 앞에서 폭로해버리다니!

우리 애들은 아직도 가상 현실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 못 했단 말이에요!

여신님 때문에 완전히 절 색정광을 보는 눈으로 보고 있잖아요!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여신님은 말하던 도중 가슴을 출렁출렁 흔들면서 귀엽섹시하게 당황하시더니 그대로 강림을 풀고 말았다.

아니. 여신님이 강림을 풀었다기보다는······.

"어머. 시간이 다 됐나 봐요."

여신님이 그 몸을 떠나셔도 여전히 자애롭고 신성한 우리 천사님께서는, 조금 덤덤한 느낌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셨다.

아니. 천사님.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지금 것은 좀······방금 여신님 반응을 봐서는 명백히 시간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야. 구원. 뭐? 여기 오기 전에는 동정이었어?"

하지만 내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잠깐만. 우선 내 말을 들어줘. 오해야."

"시끄러워!"

짜악!

"끄아아악!"

등짝이 후끈거리는 감각을 맞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 아니. 설명을 시작했다.

그 나이 먹도록 못 해봤던 것도 서러운데 진짜 동정이었다고 설명까지 해야 한다니. 억울해.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39화 > 끝

ⓒ Curtain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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