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38화 (922/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38화 >

    전에 여기서 태양을 봤을 때, 나는 제일 먼저 지구 평면설을 떠올렸었다.

    황당한 얘기지만 이 세계의 지구는 얇고 평평한 종이 같은 구조로 되어있고, 우리는 그 한쪽 면에만 살다가 던전을 통해서 반대쪽 면으로 나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이쪽 세계 역시도 지구는 둥글었다.

    그리고 내가 떠올려야 했던 건 지구 평면설이 아니라, 지구 공동설이었다.

    지구의 안쪽은 텅 비어있고 그 안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소설이나 만화, 게임 같은 창작물에서 많이 쓰이는 바로 그 이야기 말이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던 걸까.

    푸른 하늘 너머로 신기루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육지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나는 스스로 꾸짖고 싶어졌다.

    그렇다는 말은 역시, 미리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건가.

    나는 지금부터 여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나는 자기도 모르게 몸이 떨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차피 지구 평면설을 떠올렸을 때도 이쪽 세계가 넓으리라 생각한 건 변함이 없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그냥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일 뿐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직접 눈으로 이쪽 세계의 크기를 확인하는 것과 막연하게 넓겠다고 추측만 하는 건, 피부에 와닿는 감각이 천지 차이였다.

    그림자 이동으로 근처에 있는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자, 산이라는 지형 덕분에 땅 전체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평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로 올라가는 신기한 느낌의 구조.

    대체 이 넓은 세계에 몇 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 걸까?

    수백만 명? 수천만 명? 아니. 그래선 고작 원래 세계에서 살던 나라의 인구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이 넓은 땅덩어리는 그 정도 인구수로 끝날 수준이 전혀 아니었다.

    물론 원래 세계에서도 전 세계의 땅 넓이를 눈으로 확인해본 경험은 없으니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최소 억대. 수십억 인구까지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땅 넓이였다.

    그리고 그 많은 수의 인간을, 지금부터 내가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쁜 놈을 때려죽이는 것에 크게 거리낌이 없고, 필요하다면 몇 명 정도는 죽여야 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여신의 사명이 정말로 같은 인간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라도 나는 전혀 문제없고, 오히려 우리 애들이 걱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수준의 얘기다.

    상대해야 하는 숫자가 이렇게 많아지면, 아무리 그렇게 정신 무장을 하고 있던 나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미리엘의 말처럼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전쟁이라도 벌이지 않으면 안 되는 스케일이다.

    아니. 만약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이 넓은 땅에 있는 사람을 몰살하려면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야 하는 걸까?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한 걸까?

    디아나와 이어져 영원의 생명을 보장받은 나라고 하더라도,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더라도, 그럼 우리 애들도 날 따라서 그 예쁜 손에 잔뜩 피를 묻히며 살아가야 하는 거야?

    심지어 디아나는······.

    잠깐만. 디아나? 그래. 디아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 번 여신을 소환했을 때, 여신은 분명 내 행보를 칭찬했었다.

    그리고 칭찬의 내용에는, 분명 디아나와 이어진 것에 대한 칭찬도 있었을 거다.

    그럼 뭐야? 여신은 처음부터 내가 영원한 생명을 필요로 할 정도로 오랜 기간동안 살육이나 벌이며 살기를 원했다는 얘기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분노? 배신감?

    어차피 여신도 처음부터 계약서를 제시하고 날 데려온 거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건 부당할지도 모른다.

    비록 그 존재를 몰랐다고는 하나,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내 책임이 큰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여신에게 뭐라도 따지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레이아의 여신 강림 쿨타임이 얼마나 남았더라? 슬슬 쿨이 돌아올 때 아니었나? 그게 아니더라도 성녀로의 전직을 서두르면 된다.

    얼마 전의 3P로 사라도 레이아도 250레벨은 찍었으니, 대사제 레벨만 조금 더 올리면 됐을 거다.

    당장 가서 그 망할 여신에게 따져주겠어.

    재빨리 생각을 실현으로 옮기기 위해, 나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땅으로 착지했다.

    "히잇?!"

    "윽?!"

    그리고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나는 바로 앞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겨우 눈치챌 수 있었다.

    젠장. 이렇게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니. 설마 이쪽 세계의 주민?! 어떻게 하지? 처리해야 하나?!

    당황하기는 했지만, 나도 이제 모험가 경력이 짧지 않은 베테랑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몸이 움직여서, 나는 순식간에 자세를 다잡고 손에 성자의 손길까지 발동시켜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거기까지 완벽하게 움직여놓고도, 나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등장한 인물의 용모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색이 진한 금발에 머리 위로 쫑긋하고 솟은 세모난 귀.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는 눈동자. 그리고 그 등 뒤로 부채처럼 펼쳐진 보랏빛 꼬리까지.

    내 눈앞에 있는 건, 다름 아닌 구미호였다.

    일순간 레이아가 내 뒤를 쫓아서 7계층에 온 걸까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제대로 살펴보니 눈앞의 상대는 레이아와는 전혀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더 어려 보이는 인상에 조금 날카로운 눈매. 중요한 부분도 레이아에게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내게 상당히 놀랐는지, 상대방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만큼 놀라지는 않았겠지.

    갑자기 구미호가 왜 여기에?

    잠깐만. 설마 여기 7계층에는 용사만 있는 게 아니라, 마신 시대의 종족이 모두 모여있는 건······?

    그럼 뭐야. 눈앞에 있는 이 구미호도 토벌 대상이고, 더 나아가서는 레이아까지······.

    으드득.

    "힛?!"

    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갈아버렸다.

    거울이 없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아마 내 얼굴은 보는 사람이 두려움에 떨 정도로 험악하게 구겨져 있겠지.

    눈앞에 있는 저 구미호처럼.

    "오, 오지 마!"

    구미호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꿎은 상대한테 화풀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이상한 오해까지 불러일으키면서.

    눈앞에 있는 구미호도 여신의 사명을 위해 처리해야 하는 대상 아니냐고? 알 게 뭐야. 여신의 사명 따위 개나 주라지.

    "아니. 잠깐만 기다······."

    일단 상대를 안심시키고 뭐라도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자신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미호 특유의 속박 기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깨는 건 어렵지 않다.

    레이아의 속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때와는 다르다는 거다.

    그냥 성역 선포를 사용해서 상대를 발정시키고, 상대가 참지 못해 날 덮치면 그대로 게임 끝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버리면 괜히 더 경계하는 게 아닐까?

    "오해하지 마. 진정해. 난 수상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한 말이지만 수상하기 그지없는 대사였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날 경계한 자세 그대로 슬금슬금 발을 움직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지 마. 그대로 있어. 오지 마."

    경고한다기보다는 두려움에 떠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점점 멀어져가는 구미호.

    "아니. 야. 잠깐만. 그러니까 나는······!"

    여신의 사자라고.

    습관적으로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생각해보니 이런 곳에서 그런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 말이 만능의 주문처럼 통하는 건 위쪽 세계뿐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구미호는 슬금슬금 더 멀어져 갔고, 결국 내 몸이 움직이게 됐을 때는 구미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이었다.

    물론 내게는 이동기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그림자 이동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쫓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만두자.

    지금은 그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다.

    다시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구겨지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심호흡하면서 안면 근육을 진정시켰다.

    침착하자.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런 얼굴을 다른 사람한테 보일 수는 없어.

    게다가 나가자마자 레이첼 누님부터 봐야 할 텐데.

    원래부터 감정적인 성격이라 아무리 감정 컨트롤을 하려고 해도 쉽게 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우리 애들을 생각하면서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갈까."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감정을 추스른 다음, 나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텔레포트 마법진에 올라탔다.

    "구원아! 그렇게 혼자 던전에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하니?!"

    길드에 돌아오자마자 날 맞이한 건, 역시나 레이첼 누님의 걱정 섞인 꾸중이었다.

    "죄송합니다."

    물론 나는 곧바로 누님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어디 다친 덴 없고?"

    "괜찮아. 그냥 잠깐 하늘만 보고 온 거니까. 몬스터 같은 건 만나지도 못했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두려움에 떨던 구미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몬스터라고 해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5.5계층에서 상대한 놈들도 거의 인간과 흡사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여신이 5.5계층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에는 분명 5.5계층에서의 경험이 도움 될 거라고 했었지.

    그건 역시 인간을 상대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졌을 거라는 걸 의미하는 거였나?

    "구원아?"

    "아, 아니. 미안.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미안. 나 급한 일이 있어서 가볼게."

    "아······. 응. 집에서 봐."

    내 태도를 보고, 레이첼 누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여기는 비밀 얘기를 하기에는 모험가의 눈과 귀가 너무 많다.

    결국 누님은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날 배웅해줄 수밖에 없었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서 순식간에 저택으로 돌아갔다.

    목적은 물론, 여신을 강림시켜 따지기 위함이다.

    "다녀왔어."

    "구원!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이 변······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돌아오자마자 들려온 건, 사라의 핀잔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섹스로 미리엘의 진을 빼두고 그대로 방치하고 나왔지.

    미리엘이 하반신이 벗겨진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다들 보게 됐을 테니, 사라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나 사라는 취향이 살짝 그쪽이니까.

    하지만 그런 사라조차도, 내 얼굴을 보고 뭔가 심각한 일이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곧장 핀잔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던져왔다.

    이상하다. 아래에서 심호흡하면서 안면 근육을 진정시키고 왔는데.

    레이첼 누님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어떻게 내 표정만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아니. 그 둘에게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구원씨? 무슨 일이신가요?"

    "미리엘양에게 대체 무슨 얘기를 들은 겐가?"

    레이아도 디아나도. 그리고 그 뒤를 따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실비아도 내 표정을 읽어내는 건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미리엘은 얘들한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내 심각한 반응을 보고 배려해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평생 손에 무수히 많은 피를 묻히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얘들한테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일단 얘기를 회피하고, 레이아에게 시선을 돌려 세부 스테이터스 창부터 확인했다.

    여신 강림의 쿨 타임은······타이밍 좋게도 내가 확인하는 그 순간 1초에서 0초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깐 아래로 가자."

    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레이아의 손을 잡고 그대로 디아나의 마법 연구장으로 향했다.

    전에 여신을 강림시켰을 때도 멀리까지 목소리가 퍼져 나갔다는 모양이니까.

    모든 마법을 막아주는 그곳이라면 우리끼리만 여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이미 미리엘의 모습은 없었다.

    설마 그냥 해방해줬을 리는 없고, 위에 있는 방 중 한 곳에 가둬두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뭐, 아무튼 그런 것보다 지금은.

    "레이아. 여신을 강림시켜 줘."

    "네? 아, 넷!"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여신 강림의 쿨 타임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는 듯, 레이아는 황급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뜬 순간, 레이아는 레이아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입가에는 레이아 답지 않은,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미소를 띠고 날 지그시 바라보는 레이아. 아니. 여신.

    전에는 그냥 천사님은 안 그래도 신성하신데 괜히 더 신성해 보이시는구나 같은 바보 같은 감상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저 시선이 왠지 날 깔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야. 여······."

    나는 곧장 여신에게 따지려고 했지만, 그보다 여신이 입을 여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38화 > 끝

    ⓒ CurtainCall#p5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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