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32화 (916/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32화 >

"흐음. 그렇다면 역시 미리엘양은 마신의 축복을 받아 용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으로 봐야 하겠구먼."

미리엘을 그대로 방치하고 방으로 나온 나는,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지나있었기 때문에 이미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다들 자리에 남아서 식사 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시간이 나면 언제나 봉사 활동을 다니는 레이아나 원래는 신전에 교육을 가야 했을 마틸다나. 심지어는 워커 홀릭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레이첼 누님마저 일을 하루 쉬었는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밤에 날 찾아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역시 내가 자기 중 하나와 밤을 보내지 않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조금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어머, 구원 씨. 괜찮으세요? 잠을 못 주무신 것 같아요."

"수고했어. 괜찮아?"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기는커녕 미리엘과 뭘 하고 있었냐는 식의 추궁조차 하지 않고, 따뜻하게 날 맞이해줬다.

얘들도 분명 마음속으로는 나와 미리엘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게 싫겠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해주고 있는 거겠지.

오히려 내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안부를 물어주는 그 모습에, 나는 마음 한구석이 촉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애들에게 달려들어서 마구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여자와 섹스까지 하면서 얻은 귀중한 정보를 모두에게 공유하는 것이 먼저였다.

마침 다들 모여있기도 하니,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미리엘을 조교 하면서 들은 힌트가 될만한 발언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모두에게 들려줬다.

그리고 그 말을 전부 들은 후, 디아나가 내린 결론이 바로 처음의 저것이라는 얘기다.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구먼. 그래서, 그······자네는 미리엘양을 어떻게 할 생각인가?"

턱에 귀엽게 손을 대고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동의해준 디아나는 조금 주저하는 목소리로 그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까지 일부러 그 얘기만은 피하려는 기색이 있었지만, 그래도 얘기가 이렇게 된 이상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게 문제죠. 마신의 힘을 빌리려는 게 아니라도 위험한 여자니까,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하고."

일단 미리엘이 날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는 얘기도 했지만, 그래도 사라는 미리엘에 대한 경계심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걔 일단 네 이복동생인데 말이지.

뭐, 얼마 전까지 알지도 못했던 이복동생보다 사랑하는 남자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저대로 언제까지나 가둬둘 수도 없어서 더 곤란해요. 명색이 아라크네 클랜의 클랜장인데다가, 지금은 간부들까지 전부 가둬두고 있으니까요. 사실 이렇게 하룻밤 묶어둔 것만으로도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을 거예요. 물론 미리엘 씨가 마신과 손을 잡으려 했다는 사실을 밝히면 이쪽에 명분은 생기겠지만······구원이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거지?"

레이첼 누님은 길드 직원답게, 거대 클랜의 장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파급력을 생각하는 것 같은 의견을 말해주셨다.

누님 말대로, 난 딱히 미리엘이 마신의 힘을 빌리려 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이런 세계에서 그런 걸 공표해버리면, 진짜로 미리엘은 세상 모든 사람한테 매장당하게 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지.

나한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그거 말인데. 사실 그것 때문에 길게는 며칠 더 미리엘한테 붙어있어야 할 것 같아. 며칠 안에 반드시 안전하게 처리를 해두겠어."

마침 좋은 기회이니만큼, 나는 우리 애들한테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필요하면 다른 여자와 섹스는 해도 된다고 이미 한참 전에 허락해줬지만, 그래도 며칠 내내 아무 말 없이 다른 여자하고만 붙어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우리 애들은 분명 허락해줄 거다.

"저, 저기이······."

그렇게 생각했던 나였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견을 말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어 올리고 할 말이 있다는 듯 구석에서 빼꼼 고개만 내미는 실비아.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대화에 끼지 않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의 실비아였기 때문에, 그 실비아가 의견을 말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설마 다른 여자랑 내가 며칠 동안 붙어있는 꼴은 못 보겠다고 말하려는 건가?

만약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 무슨 일이야?"

나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몸을 배배 꼬면서도, 실비아는 이것만큼은 물어봐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만, 실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의 말이었다.

"그, 그게······저어······보, 복상사시키시려는 겁니까아?"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

"아으······하, 하지만······구원 님과 며칠······버, 버틸 수 있는 겁니까아?"

아니. 실비아야. 보통 사람을 네 기준에서 생각하면 안 돼.

보통 사람들은 너같이 나랑 붙어있다고 죽으려고 하거나 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해주려고 했던 나였지만, 아무래도 비단 실비아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설마 섹스밖에 모르는 폐인으로 만들 생각?"

답지 않게 살짝 겁먹은 표정까지 지으며 중얼거리는 사라.

게다가 실비아나 사라뿐만이 아니라, 다들 조금 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까지.

그야 며칠 동안 붙잡고 섹스만 하겠다고 선언한 거니까 저런 생각을 해도 이상한 건 아니지만, 괜히 억울해진 나는 있는 힘껏 딴죽을 걸었다.

"그러니까 아니거든?! 너희 진짜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여자 하나 망가뜨리는 건 손쉽게 할 수 있는 섹스 몬스터."

야. 어째 대답이 너무 빨리 술술 나오지 않냐?

하지만······.

"······훗.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슬프군."

"어째서 좋아하는 건데, 이 바보야."

내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짓자, 사라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 아니.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어쩔 수 없잖아. 남자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자연히 으쓱해지는 법이라고.

"아무튼 그런 거 아니야. 미리엘은 제대로 맨정신으로 살려둘 거라고. 그냥 조금 마신 같은 거랑 엮일 생각 못 하도록 하려는 것뿐이야."

"아무리 당신이라고 하더라도······그런 게 가능한가요?"

"가능해. 나만 믿어."

마틸다조차도 조금 의구심이 드는 눈치였지만, 나는 자신감 있게 대답해줬다.

사실 구체적인 계획을 말하면 확실하게 믿음을 심어줄 수 있겠지만, 안 그래도 지금 다들 날 섹스 몬스터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보고 있는 거다.

괜히 여기서 미리엘을 고통으로 발정하게 하는 체질로 바꿔서 앞으로 싸움 같은 건 생각도 못 하게 한다는 계획을 말했다가는, 날 바라보는 우리 애들의 시선이 더욱 두려움으로 물들지도 몰라.

우리 애들한테 그런 시선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굳이 구체적인 계획은 말하지 않고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러면 지하에 계신 분들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걔들은······."

확실히 처치 곤란이란 말이지.

미리엘은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잡아둔다고 치더라도, 아라크네 간부를 몽땅 다 잡아두고 있는 건 너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행위였다.

아라크네 클랜에서도 간부들이 아무런 연락도 없이 전원 우리 저택에서 잠수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고.

일단 주모자가 미리엘인 건 확실하니, 할 수만 있다면 걔들은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겠다는 확신을 얻은 다음 보내주는 게 제일이지만. 그 확신을 도대체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가 문제다.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

"자기들끼리 우정 하나는 거미줄처럼 끈끈한 모양이야. 누가 길드 마크도 거미 아니랄까 봐."

미리엘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자신들이 해줄 말은 없다는 태도는, 하루가 지나서도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가서 대화 좀 나누고 올게."

하지만 미리엘에게서 이것저것 정보를 캐낸 지금이라면 뭔가 대화에 진전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사지가 묶여있는 미리엘과는 달리, 지하에 감금되어있는 다른 아라크네 간부들은 딱히 결박되거나 한 곳도 없이 편안하게 있는 중이었다.

장비는 전부 압류해뒀고, 디아나의 마법 연구를 위해 만들어진 파괴 불가 공간의 장비도 없이 파손시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그냥 편하게 있으라고 놔둔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편하게 있는 거 아니냐?

다들 비스듬하게 기대고 앉아서 잡담하고 있거나 맘 편히 식사를 하고 있었고, 쌍둥이 마법사에 이르러서는 그 디아나 님의 연구실에 왔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벽을 만져대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아예 벽에다가 뺨까지 문지르겠네.

그리고 그중에는 물론 생글생글 웃는 루티아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앨리시아의 모습도 있었다.

"앨리시아."

"우와아앗?! 까, 깜짝이야! 노크라도 하고 들어와 새끼야!"

아니. 노크라니······. 너희 지금 내가 사는 곳에 감금당해있는 거라니까.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그 모습에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손짓으로 앨리시아를 따로 불러냈다.

"잠깐 둘이서 얘기 좀 하자."

"무, 무슨 말을 하려는 건데?"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앨리시아.

그 들뜬 모습은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얘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진짜 미안한데. 그런 얘기하려고 부르는 거 아니거든.

나도 너랑 다시 한번 제대로 그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미리엘한테서 전부 얘기 들었어."

그러면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해도 괜찮았을 텐데, 굳이 앨리시아를 선택한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단순히 앨리시아가 제일 상대하기 쉬울 것 같았거든.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날 좋아하니까 그 마음을 이용하려는 생각은 아니고, 얘는 생각이 얼굴에 너무 잘 드러나니까 말이야.

"······뭐?"

바로 지금처럼.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짓는 앨리시아.

그런 앨리시아에게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진짜로 마신의 힘에 손을 뻗으려고 하고 있었다니."

"······! 너 설마 미리엘한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새끼야?!"

내 말투에서 뭔가 불온한 기색을 느꼈는지, 앨리시아는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잡아챘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는 일 없이 앨리시아의 손을 자연스럽게 풀어버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진정해. 아직은 안 했으니까. 그리고 난 네 질문에 대답해주려고 온 게 아니야. 대답해야 할 건 너지. 그래서 질문인데. 미리엘은 아빠 쪽 사정이 있으니 마신의 힘을 탐내는 것도 이해가 돼."

"?! 미리엘이 그런 것까지······!"

이것도 이미 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역시 사우론 아우덴 관련으로 용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앨리시아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너희는? 너희는 왜 미리엘한테 협력하는 거지?"

"친구의 꿈을 같이 이뤄주려는 게 뭐 문제 있냐?!"

그래도 마신과 관련된 일이니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진짜로 그냥 의리로 어울려주고 있는 거였냐.

어쩐지 밑에서 우리랑 대치했을 때 다들 소극적이더라니.

물론 저 대답이 거짓말일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원래부터 감정적인 앨리시아를 이렇게 동요하게 한 다음 얻어낸 대답이다.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고 봐야겠지.

"아니. 문제 있잖아. 마신 관련된 일이라고. 진심으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마신의 힘이면 뭐 어때?! 레오인지 케온인지 하는 용사 놈도 아무 문제 없이 잘만 힘쓰고 다니잖아! 미리엘도 힘을 얻는다고 해서 딱히······!"

너무 단순하잖아. 그야 나도 미리엘이 용사가 된다고 해서 그 힘으로 뭘 어떻게 해보려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결국 너희는 딱히 마신의 힘이 탐나는 게 아니라는 거지?"

"애초에 우리는 용사 혈통도 아니니까 가능하지도 않잖아!"

아까 내가 한 말로 내가 모든 사정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앨리시아는 이제는 대놓고 미리엘이 용사의 피를 이었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냐."

용사의 피를 이은 게 아니면 용사로 만들지 못할 정도로 마신이라는 녀석은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던 거야?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내쉬기로 했다.

뭐, 아무튼 다행이다. 여기까지 들었으면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은 거니까.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32화 > 끝

ⓒ CurtainCall#p5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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