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27화 (911/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27화 >

디아나에게 걸린 성자 스킬 효과를 풀어주는 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깔끔하게 끝났다.

얘 성벽이 성벽이다 보니 도중에 주체를 못 하고 날 덮친다든가 투명화 마법이 풀린다든가 하는 사고라도 터질 줄 알았지만, 아무리 우리 노출증 대마법사님이라도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까지 이성을 잃고 성욕에 지배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뭐, 내 생각보다 깔끔하게 끝났다는 거지, 고생을 아예 안 했다는 건 아니지만.

"흐에······흐에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디아나.

"괜찮아? 이 마법, 조금 더 유지하고 있을 수 있겠어?"

그런 디아나의 흐트러진 옷을 정돈해주면서 묻자, 디아나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 그럼."

디아나와 같이 투명화 마법이 걸린 공간을 빠져나오자, 여기는 여기대로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성자 스킬의 효과가 풀려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사라와 레이아, 실비아 그리고 앨리시아는 각각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대치한 채 서로를 보고 있었던 거다.

미리엘이 내게 검을 향한 시점에서 아라크네 클랜은 적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앨리시아는 날 구해준 은인이다.

하지만 그 앨리시아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라크네 클랜원들은 전원 내 스킬에 당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적대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해서 앨리시아와 화기애애하게 있는 것도 또 이상하고 말이다.

날 구해줬다고 해서 앨리시아가 아라크네를 완전히 배신했다고 판단하는 건 너무 성급하니까.

그리고 앨리시아는 앨리시아 대로 머릿속이 복잡한 거겠지.

날 구해줬을 당시의 상황을 보면, 앨리시아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움직였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머리보다는 몸에 따라서 자기도 모르게 움직여버린 거겠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앨리시아 자신도 자신의 스탠스를 확실히 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게다가 치료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나하고 섹스까지 하는 바람에 더욱 머리가 복잡할 테니까 더더욱.

"아······그 뭐냐. 일단 미리엘을 제외하고는 스킬 효과를 풀어주려고 하는데, 괜찮을까?"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깨고 입을 여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건, 역시 나밖에 없었다.

"음······저대로 둘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구먼. 대장인 미리엘양을 저 상태로 두거나 데려갈 수도 없으니, 전투 의지도 없을 터이고."

절정의 여운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는 못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우리 대마법사님은 머리를 굴려서 상황을 짚어줬다.

뭐, 전투 의지는 아까 대치하고 있었을 때부터 별로 느껴지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잠깐 기다려."

대마법사님의 동의도 얻었으니 아라크네 클랜원들도 하나씩 데려다가 스킬 효과를 풀어주려던 순간, 갑자기 사라가 내 행동을 제지했다.

"왜 그래?"

"······조금 기다려."

먼저 할 게 있다는 듯 그렇게 말하고 나서, 사라는 쓰러져서 숨을 몰아쉬는 아라크네 클랜원들을 들어다가 하나하나 투명화 마법이 걸린 장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리엘과 앨리시아를 제외한 전원을 옮긴 다음, 사라는 그 투명화 공간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우리 용사님······.

"디아나. 레이아. 실비아. 조금 도와줘요."

엄한 생각을 하려던 찰나, 투명화 공간에서 머리만 내민 사라가 날 제외한 전원을 불렀다.

잠깐만. 진짜로 여자들끼리만 모여서 뭘 하려는 건데? 왜 하필 얼굴만 내밀고 있는 거지? 설마 진짜로······.

"그리고 구원."

"으, 응?"

"구원이 생각하는 이상한 짓 하고 있는 거 아니니까 변태 같은 표정 그만 지어."

"그, 그런 표정 안 지었잖아?"

"지었거든, 변태야."

그렇게 말하고, 다시 투명화 공간으로 모습을 감추는 사라.

그러니까 쟤는 맨날 어떻게 내 머릿속을 저렇게 꿰뚫어 보는 거야.

"앨리시아."

다들 사라를 따라 투명화 공간으로 사라지고 나서, 나는 같이 밖에 남겨진 앨리시아를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리엘도 같이 밖에 남겨져 있지만, 미리엘은 지금 바닥에서 경련만 하고 있는 중이니까.

"무, 뭐야?"

안 그래도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앨리시아는 내가 진지하게 부르자 묘하게 경계하는 것처럼 자세를 다잡았다.

아니. 저건 날 경계한다기보다, 무슨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게 긴장하고 있는 거라고 봐야 하나?

표정도 곤혹스러움과 기대감이 반반씩 섞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고.

이거 곤란하게 됐네. 딱히 진지한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진짜 진지한 얘기로 방향 전환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려던 말이나 계속하기로 했다.

"나 진짜 변태 같은 표정 짓고 있었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새끼야!"

결국 나는 앨리시아에게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봐지는 처지가 됐다.

야. 나도 너한테 이런저런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지금이 그런 얘기를 하기에 적당한 때는 아니잖아.

일단 너희 동료부터 처리해야 하고, 아직도 7계층 한복판에 있는 거니까 나 빠져나갈 방법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마치······.

아니. 잠깐만. 앨리시아랑 할 얘기라는 게, 꼭 그런 얘기만 있는 건 아니잖아.

나라는 놈은 진짜 한가지 생각에 꽂히면 다른 생각을 잘 못하게 되는 게 단점이라니까.

"방금 건 장난이고, 진지한 얘기를 하자면."

"무, 뭐야 또."

앨리시아도 나랑 마찬가지로 핑크빛 얘기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 살짝 몸을 긴장시키고 표정을 굳혔다, 아쉽게도 난 그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다.

"결국 너희 목적은 뭐였던 거야?"

"······."

내가 그렇게 묻자, 앨리시아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 입으로는 말 못 해."

아주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앨리시아는 결국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거부했다.

"그렇게나 심각한 목적이야?"

"그 이전의 문제야. 미리엘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멋대로 말할 수는 없어."

"즉, 이 일련의 소동은 전부 미리엘이 주도해서 미리엘 혼자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거라고."

"그렇게는 말 안 했잖아!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미리엘한테 떠넘길 생각은······!"

"그래그래."

하여간 얘도 참 의리파라니까.

미리엘을 위해서 함부로 말은 못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엘 혼자에게만 죄를 뒤집어씌울 생각은 없다는 건가.

뭐, 그 성격 때문에 나도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아무튼 결국 얘들의 목적을 알기 위해서는, 미리엘의 입을 어떻게든 열게 해야 하는 모양이다.

물론 아라크네의 다른 멤버들이 입을 열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아마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 왠지 모르게 그런 예감이 들었다.

"다 했어. 자."

앨리시아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 애들이 다 같이 투명화 공간에서 빠져나왔다. 품에 짐을 한가득 들고.

과연. 저러느라 기다리라고 했던 거였군.

우리 애들이 품에 들고나온 건, 바로 아라크네 클랜 사람들의 장비였다.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서 위험한 물건은 전부 벗겨 낸 건지, 개중에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비수 같은 무기도 있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안에서 므흣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했던 아까 내 상상도 마냥 틀린 건 아니잖아. 샅샅이 뒤지느라 다 벗겨놓고 여기저기 만졌을 테니까.

"그럼 잽싸게 끝내고 올게."

그 장비들을 전부 인벤토리에 넣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투명화 공간에 발을 내디뎠다.

아라크네 클랜 사람들에게 걸린 스킬 효과를 풀어주는 건, 잽싸게라는 표정이 딱 어울릴 정도로 정말 순식간에 끝났다.

방치하는 동안 다들 상당히 몰려있어서, 그냥 성자의 손길로 몇 번 만져주면 끝이었으니까 말이다.

뭐, 루티아 누님 같은 경우는 그래도 자존심을 세우려는 건지 숨을 헐떡이면서도 최대한 여유로운 척하는 목소리로 날 도발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어머, 누나도 만져주게? 누나는 이왕 할 거면 손이 아니라 아까 본 그 늠름한······흐아으응?!" 같은 식으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아라크네 클랜 사람들에게 걸린 스킬 효과를 차례차례 풀어주고 나서, 우리는 심문을 시작했다.

아까 내가 앨리시아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조금 험악한 느낌까지 감도는 심문이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심지어 쌍둥이 마법사조차도 디아나를 상대로 입을 열지 않았으니, 아라크네의 결속력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런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미리엘 저 녀석, 이렇게 서로 목적이 충돌하지만 않았으면 정말 좋은 녀석이고. 인망이 있는 성격이라고 할까? 괜히 내가 무협지 주인공 같은 성격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고.

저 녀석의 칼에 찔릴 뻔한 내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좋다.

아무튼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얘들이 말하는 투로 보아하니, 7계층에 온 목적이 미리엘에게 있다는 우리의 예상은 확실한 모양이니까.

결국 이 일련의 소동은 전부 미리엘을 어떻게든 해야지 해결이 될 거라는 얘기였다.

"······그럼 우선, 여기부터 빠져나가도록 할까."

아직 미리엘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정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처리하든 이런 곳에서 간단하게 해결될 만큼 쉬운 일은 아닐 거다.

원래는 처음 발을 디딘 이 7계층을 이곳저곳 살펴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 돌아갈까.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가 지나왔던 통로는, 아라크네 멤버들이 전원 빠져나온 시점에서 완전히 닫혀버리고 말았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다시 열쇠가 필요하지만, 열쇠 구멍 앞에 있는 갑옷은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6계층의 주인과 생사를 함께하는 걸지도 모른다. 언데드한테 생사라는 표현을 하는 건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부활 쿨타임도 똑같이 돌아간다는 얘기고, 그 말은 즉 여기서 족히 한 달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여기서 한 달이나 기다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아라크네 멤버들도 우리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한 달이나 지내는 동안 틈을 보이면, 또 무슨 짓을 해올지 모른다.

그리고 애초에 한 달이나 방치해두면, 미리엘은 말 그대로 쾌락에 미쳐서 제정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거다.

그러니 우리는 위로 돌아갈 하나 남은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이것을 일회용으로 쓰는 것은 아쉽네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구먼."

바로 내가 인벤토리에 챙겨온 마나 변환기와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는 방법 말이다.

디아나 말대로 일회용으로 소모하는 건 아쉽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뭐, 다음에 올 때까지 손상 없이 남아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잖아."

다행히 여기는 상당히 산세가 험악해 보이는 산속.

게다가 6계층의 주인과 똑같은 놈이 근처에 있으니, 일종의 보스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 위치만 잘 숨겨두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면 좋겠네만······."

주위를 조금 탐색해서 적당한 동굴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고, 우리는 일단 다 같이 지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다들 저택으로 가주실까. 앨리시아. 미안하지만 너도 같이 가줘야겠어."

"······그래."

지상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미리엘을 제외한 나머지 아라크네 멤버들을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너무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 겉으로 보기에는 다 같이 파티를 맺고 돌아온 것처럼 길드를 빠져나와 저택으로 향했지만, 실상은 우리가 아라크네 멤버들을 연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머지 멤버들을 지하 연무장에 감금하고 나서, 우리는 드디어 미리엘을 심문할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선 스킬 효과부터 풀어줘야 하겠지만.

"후으읏······후으읏······."

제일 스킬 효과가 강하게 걸린 주제에 제일 오래 방치된 미리엘은, 이제는 눈에 핏발까지 세우면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태의 여자를 절정에 달하게 만드는 건, 내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흐으으읏?!"

미리엘의 몸에 걸린 절정 속박을 풀고 내가 성자의 손길이 걸린 손으로 그 이마를 가볍게 튕겨주자, 미리엘은 브릿지 자세를 하는 것처럼 허리를 들고 무서운 기세로 몸을 경련하며 절정에 달해버렸다.

드디어 느껴버린 절정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라고.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27화 > 끝

ⓒ CurtainCall#p5k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