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25화 (909/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25화 >

    "······미안······."

    그 말은 과연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생명력 넘치던 평소와 달리 꺼져갈 듯 힘없는 목소리로 미리엘을 향한 것인지 날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후, 앨리시아의 몸은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그 모습은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앨리시아가 피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를 나부끼며 아래로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너무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보였다.

    여러 감정이, 그것도 기분 좋지 않은 감정들이 뒤섞이는 그 장면은 느리게 보고 있기에는 너무도 괴로운 장면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남들보다 한발 앞서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레이아!"

    "네, 네엣!"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레이아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다가왔다.

    위험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되고 나서도 나는 아직 아라크네 클랜 녀석들이 다친 동료를 무시하고 이쪽을 공격할 정도로 비정한 녀석들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무너져 내리는 앨리시아의 몸 너머로 보이는 미리엘의 얼굴이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큭!"

    촤악!

    주저앉아서 앨리시아의 배에 박힌 검을 잡고 뽑아내자, 다시 한번 터져 나온 핏물이 내 얼굴을 적셨다.

    기분 나쁜 축축한 감촉이었지만, 나는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두 손으로 앨리시아의 상처 부위를 억눌렀다.

    하지만 미리엘의 검은 앨리시아의 몸을 완전히 관통했었다. 배로 들어가서 등에서 튀어나온 거다.

    나 혼자 상처 부위를 틀어막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 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서 아까부터 딱딱하게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미리엘에게 일갈했다.

    "뭐해! 너도 와서 막아!"

    "······응? 아, 아아!"

    그제서야 미리엘은 끼긱끼긱 하고 고장 난 로봇처럼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쓰러져있는 앨리시아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는 황급히 주저앉아서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앨리시아의 상처 부위를 억눌렀다.

    "레이아. 우선 겉에만 치료하면 충분해. 조금 흔들려도 피가 안 흘러나올 수준이면 되니까 빠르게 치료해줘."

    흔들려서 피가 나오는 수준이면, 힐링 섹스를 시작하더라도 제대로 효과를 보기 전에 쇼크사할 우려가 있었다.

    아무리 상대방을 빠르게 느끼게 할 자신이 있는 나라도, 그런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네!"

    힐링 섹스를 전제로 한 말이었고 레이아도 분명 알아들었을 테지만, 우리 천사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해주셨다.

    천사님 성격이라면, 이런 때에 자기들 눈치 본다고 힐링 섹스를 꺼리면 오히려 그걸 비난할지도 모르지. 아니. 천사님뿐만 아니라 착해 빠진 우리 애들이라면 다들 그럴 거다.

    아무튼 천사님은 힐링 마법으로 최대한 빠르게 앨리시아를 치료했고, 앨리시아의 상처 부위는 일단 겉보기로는 큰 상처로 보이지 않을 수준까지 메꿔졌다.

    물론 겉보기만 그런 것일 뿐, 혈색이 돌아왔다든가 정신을 차렸다든가 하지는 않은 만큼 여전히 위험한 상태겠지만.

    "레이아. 이 정도면 충분해. 그럼 조금 떨어져서 기다려줘. 너도. 아, 그 전에 잠깐."

    "응?"

    힐링 섹스를 위해 레이아와 미리엘을 우리에게서 멀어지도록 지시하려다가, 나는 미리엘의 팔을 잡아서 불러세웠다.

    손에 성자의 손길을 두르고.

    "흐으으읏?!"

    내가 갑자기 이럴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미리엘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 성자의 손길에 당해버렸다.

    완전히 다리가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미리엘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성자의 손길이 걸린 손으로 미리엘의 몸을 몇 번 더 만졌다.

    쾌감 수준을 적당히 조절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몸에 절정 속박까지 걸고서.

    아까 성역 선포에 당하고도 몸을 움직여 날 찌르려고 했던 녀석이다. 이 녀석에게 적당히 해줄 필요는 전혀 없어.

    "흣! 아앙?! 크흣?!"

    뭔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며 흐느끼는 미리엘.

    그 몸이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수준이 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조금 난폭하게 미리엘의 몸을 밀어냈다.

    "크흐응!"

    힘없이 밀려나며 완전히 쓰러져버린 미리엘이었지만, 몸 안에 감도는 극심한 쾌감 때문인지 미리엘은 쓰러지며 바닥에 몸에 부딪히는 순간까지도 높은 콧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져서 몸을 움찔움찔 떠는 미리엘을 완전히 무시하고, 나는 디아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디아나! 부탁해!"

    "알겠네!"

    부탁한다는 것은, 지금부터 앨리시아한테 힐링 섹스를 해줄 거니까 우리 모습이 안 보이게 마법이라도 써달라는 뜻이었다.

    시간이 촉박해서 짧게 말했지만, 우리 대마법사님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마법을 시전해줬다.

    뭐, 밖에서 우리 모습이 안 보이게 한다고 해서 이쪽에서도 밖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게 아니어서, 마법이 걸렸다는 실감은 안 들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미리엘 녀석 때문에 쓸데없이 몇 초나 되는 시간을 더 허비하고 말았다.

    나는 황급히 앨리시아의 하반신 갑옷을 벗겨나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앨리시아의 갑옷 하의를 어떻게 벗겨야 하는지는 이미 파악한 상태였다.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재빨리 앨리시아의 하반신을 전라로 만들 수 있었고, 나 자신도 대충 하의를 벗고 물건을 세워서 앨리시아의 음부에 재빨리 삽입했다.

    내 동정을 뺏었던 여자고, 내가 차버리기까지 했던 여자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감상에 푹 젖어버릴 만한 섹스였겠지만, 이번만큼은 제아무리 나라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물건도 제대로 서지 않아서 스킬로 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얘 배가 관통된 걸 본 직후라고. 응급조치로 상처는 틀어막았다고 하지만, 흘러나온 피는 여전히 그 몸을 적시고 있는 거라고. 흥분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도, 앨리시아가 절정을 느끼도록 하는 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성자의 손길을 두른 손으로, 앨리시아의 성감대를 차례차례 만져갔다.

    "······."

    의식이 없는 상태라도 내가 스킬로 장난을 치면 보통은 반응을 하기 마련이지만, 앨리시아는 죽은······아니. 불길하니까 이 비유는 그만두자. 아무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 내가 매력에 보너스 스탯을 할애하기 전에도 어렵지 않게 절정을 이끌어냈던 앨리시아다.

    그러니 내 스킬이 통하지 않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오랜만에 가지고 있는 성자 스킬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성자의 손길이나 성자의 성수는 물론, 성역 선포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물론.

    바이브레이터 스킬을 응용해서 허리를 진동시키는 것으로 빠르게 섹스 부스트 효과를 쌓고, 그러면서 동시에 허리를 앞으로 내미는 타이밍에 맞춰서 페니스 스매시라든가 하는 스킬들까지 계속해서 퍼부었다.

    제대로 의식이 있는 상태라면 그야말로 복상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스킬 난무였지만, 그럼에도 앨리시아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반응이 없을 뿐 변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완전히 혈색을 잃고 창백했던 그 얼굴이, 점점 혈색을 되찾으며 건강한 밀크 커피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던 거다.

    좋아. 할 수 있어.

    희망을 본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스킬을 퍼부어댔다.

    섹스를 즐길 여유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된 심정으로, 나는 그저 열심히 앨리시아의 안색만 살피며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

    내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는지, 앨리시아의 입이 벌어지면서 나지막하게나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됐어! 할 수 있어!

    환희에 찬 나는 더욱 열심히 몸을 움직였고, 그에 따라 앨리시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오는 빈도도 점점 더 잦아졌다.

    그리고 결국.

    "으으으읏?!"

    높은 신음성과 함께, 앨리시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다만 여기서 살짝 계산 미스가 있었으니.

    "크흐으응?! 하아응?! 흐읏!?"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스킬을 퍼부은 반동을, 앨리시아가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는 점일까?

    뭐, 힐링 섹스가 있는 만큼 진짜로 복상사할 리도 없고, 저렇게 느낄수록 몸의 부상은 급속도로 회복될 테니까 나쁜 건 아니겠지만.

    "아. 미안."

    하지마 앨리시아가 몸을 뒤트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서, 나는 일단 스킬을 전부 멈추고 허리를 뒤로 빼서 삽입을 풀었다.

    뭐, 섹스 부스트의 중첩을 초기화하기 위해서 삽입을 푼 것뿐이고, 힐링 섹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곧바로 다시 삽입했지만.

    "야. 괜찮냐?"

    앨리시아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렇게 묻자, 앨리시아는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듯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야 그렇겠지. 배에 칼빵을 맞아서 정신을 잃고, 정신 차려보니 기절한 사이에 자기를 찼던 놈이랑 섹스를 하고 있었던 거니까. 나 같아도 정신이 없을 거다.

    "하앗······하앗······무······여기······뭘······큭?! 으읏?!"

    넘쳐나는 의문을 두서없이 중얼거리던 앨리시아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려다가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쾌감 때문인지 아니면 통증 때문인지,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풀썩 누워버렸지만.

    "일어나지 마. 아직 다 나은 건 아닐 테니까."

    또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지 못하도록 그 어깨를 지그시 누르면서 조용히 주의를 시켰지만, 앨리시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다, 다들 보는 앞에서 뭐하는 거야 새끼야?!"

    다들? 아······그런 건가.

    마법이 걸렸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다른 애들이 모르는 건 아닐 거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 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뭐, 확실히 이렇게 보니 묘한 기분이기는 하네. 디아나였으면 아마 좋아죽었을 거야.

    그리고 마법에 걸렸다는 걸 모르는 앨리시아는 더욱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 쟤들 눈에는 우리 모습이 안 보일 테니까. 잘 봐. 야! 사라 바보!"

    "······."

    뒤를 돌아서 사라를 향해 그렇게 외쳐봤지만, 역시나 반응은 없었다.

    다행이다. 솔직히 나도 말하면서 살짝, 아주 사아알짝 걱정했는데.

    우리 용사님이 아무 반응도 안 해주셔서 정말 다행이야.

    "봤지?"

    "······그래서, 이, 이건 뭔데?"

    하지만 나는 그런 속마음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장난스럽게 앨리시아를 바라봤고, 앨리시아도 사라가 아무런 반응도 없는 걸 보고 한 방에 알아준 모양이었다.

    뭐, 어디까지나 마법에 걸렸다는 걸 알아준 거지, 우리가 왜 섹스하고 있는지는 아직 이유를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지만.

    "너 쓰러지기 전 상황은 기억나냐?"

    "쓰러져? 내가?"

    "그래. 미리엘이 나한테 칼을 들고 돌진해와서."

    "아······."

    거기까지 대화하고 나서야, 앨리시아는 겨우 쓰러지기 이전 상황이 기억난 모양이었다.

    "그런 거지. 그래서 널 치료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다는 말씀. 그러니까 날뛰지 말고 가만히 있어. 아직 치료 안 끝났으니까. 가만히 성자님의 은총을 받드는 거다. 자기가 병아리라고 불렀던 남자에게 철저하게 쾌락을 주입 당해 무너져 내리는 거다. 음화하."

    사실 앨리시아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했겠지만, 나는 방금까지 앨리시아를 살리려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움직였던 게 괜히 부끄러워져서 반사적으로 장난부터 쳐버리고 말았다.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병아······흐으응?!"

    상황이 다 파악됐어도 좋아하는 사람이랑 섹스하고 있다는 이 상황에 여전히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앨리시아였지만, 그래도 일단 내 장난에 맞춰서 자기도 평소처럼 행동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뭐, 허세를 부리기도 전에 내 허리 움직임 한방으로 다시 흐느끼게 됐지만.

    섹스 부스트는 초기화됐어도, 무수히 많은 절정을 느끼면서 민감해진 몸은 어디로 간 게 아닌 모양이다.

    "응? 이 병아······뭐라고?"

    "이, 이 새······하으응?!"

    "새하으응?"

    그래도 오기가 생겼는지 계속 센 척을 하려고 했던 앨리시아였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허리를 움직여서 앨리시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이, 이, 이······!"

    결국 앨리시아는 분한 듯이 주먹만 바르르 떨면서 아무 말도 못 하게 되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입을 여는 순간 다시 자기답지 않은 높은 신음만 흘리게 될 거라고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크크큭. 조교라는 게 다른 게 아니야. 바로 그렇게 시작되는 거지.

    뭐, 딱히 얘를 조교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고마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앨리시아를 능글맞은 표정으로 내려보다가, 나는 표정을 바꿔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앨리시아의 몸을 꽉 껴안았다.

    "아······으, 응······별로······하으읏?!"

    앨리시아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해주며, 자기도 두 팔로 내 몸을 안아줬다.

    그리고 앨리시아가 내 몸을 안은 타이밍에 맞춰서, 나는 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야 이······흐읏······새끼야!"

    갑자기 생겨난 분위기가 또 갑자기 깨져버린 것에 앨리시아는 분통을 터트리는 듯했지만, 어쩔 수 없잖아. 치료는 해야지.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25화 > 끝

    ⓒ CurtainCall#p5k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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