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21화 (905/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21화 >

    지니의 호의 덕분에 굳이 가고일을 찾는 수고를 들이지 않게 된 우리는, 편하게 5.5계층을 지나 6계층까지 올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야 더러운 놈들이 더러운 물건을 세우고 더럽게 엉겨 붙는 5.5계층은 이번에도 역시나 지옥이었지만, 거긴 지옥인 게 일반적인 곳이기 때문에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고 말해도 별문제는 없겠지.

    "아라크네 녀석들, 조용하네."

    그렇기 때문에 내 경계심을 더욱 깊어져만 갔다.

    우리의 예상이 맞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아래로 내려가서 사명을 완수하고 나면 미리엘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 무조건 우리보다 먼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와 동시에 밑으로 잠입할 필요가 있을 거다.

    하지만 미행이라도 할 줄 알았던 아라크네 클랜은 여전히 등장할 기색이 없었다.

    사라의 귀에도, 레이아의 코에도, 디아나의 마나 감지에도 걸리지 않는다니.

    물론 사라의 귀나 레이아의 코는 한계가 있다.

    레이아가 아무리 코가 좋아도 한참 멀리 떨어져서 따라오는 사람의 냄새를 맡는 건 한계가 있고, 사라의 귀 역시도 주변을 시끄럽게 메우는 몬스터들의 소리가 방해되고 있을 거다.

    하지만 디아나의 마나 감지까지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여기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건, 진짜로 미행은 안 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어쩌면 저희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수상한 점이 워낙 많았으니, 의심을 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뭐, 일단은 계속 경계하면서 가보자고."

    그렇게 들어간 6계층도 처음에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래도 전에 한 번 상대해본 덕분에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익숙해지니 모든 공격을 범위 공격으로 뿜어대던 5계층 몬스터들 보다 상대하기 쉽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우리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6계층을 중간쯤 지나온 다음부터였다.

    "어째 전에 왔을 때랑 몬스터 수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

    "음. 이번에도 이 몸들보다 한발 앞서 몬스터를 정리하는 파티가 있는 모양이구먼."

    혹시 내가 착각하고 있나 싶어서 디아나를 향해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몬스터를 정리하는 파티라.

    물론 6계층을 우리랑 아라크네 클랜만 다니는 건 아니다. 전에 그 정의 로리콘도 6계층에 다녔던 모험가라고 했었잖아. 그러니 그 수가 적기는 해도 6계층에 다니는 모험가 파티가 우리 말고 없는 건 절대 아니다.

    절대 아니지만, 합리적 의심이라는 게 있잖아.

    이렇게 같은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면, 그런 생각이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설마 뒤에서 몰래 쫓아오는 게 아니라, 앞에서 당당하게 먼저 지나갔을 줄이야.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수법이 대담하다고 해야 할지.

    어차피 계층의 주인이 부활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그러니 아라크네 클랜이 먼저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

    하지만 아라크네 클랜이 몬스터를 정리하고 지나가 버린 덕분에 몬스터와 만나는 빈도가 줄은 우리의 이동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결국 예상보다 훨씬 빨리 6계층의 최심부. 계층의 주인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역시 너희였냐."

    "여어. 왔군."

    거기에는 역시나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5계층의 마을을 지켜야 하는 지니를 제외한 풀 파티로.

    "너희는 또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데?"

    쟤들이 저렇게 당당하게 행동하니 이쪽도 뭔가 조심스럽게 경계할 생각이 없어져서, 나는 대놓고 핀잔을 주듯 그렇게 말했다.

    "응? 당연한 소리를 묻는군. 미리 와서 지키고 있었지. 드디어 성자님의 사명을 이룰 때가 왔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계층의 주인을 처리해버리면 곤란하잖아?"

    하지만 역시나 미리엘이 그런 걸로 눈 하나 깜짝할 리가 없어서, 미리엘은 당연한 얘기를 당연하게 한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냐······."

    그 대답이 또 일단 말은 맞는 말이라, 나는 그렇게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얘도 은근히 대화할 때 사람 지치게 하는 스타일이란 말이지. 예전에 시도 때도 없이 농담 따먹기만 하던 펠리시아하고는 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이야.

    "그거 고맙네요. 그러면 이제 저희가 왔으니 용무는 끝난 건가요?"

    나는 대충 얘기를 끝마치려고 했지만, 사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미리엘이 자기 이복동생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미리엘 앞에서는 유독 더 말이 없어졌던 사라였지만, 그래도 우리 용사님은 할 말은 하는 성격이셨다.

    저렇게 당당하게 일 없으면 가라는 얘기를 하다니.

    "아니. 우리는 여기서 계속 대기할 생각이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성자님 일행이 계층의 주인에게 고전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아래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성자님 일행이라도 돌아왔을 때는 온전치 못한 상황일 수도 있으니, 여기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귀환하는 게 좋지 않겠어?"

    과연 거대 클랜의 클랜장. 말은 아주 청산유수네.

    진짜 말하는 것만 보면 이상적인 동맹원으로 밖에 안 보이잖아.

    그리고 먼저 딴죽을 걸었던 사라도, 역시나 저 말에는 할 말이 없던 모양이다.

    "······그렇군요."

    결국 우리는 아라크네 클랜과 함께 보스룸에 둥지를 틀고 계층의 주인이 부활하기를 기다렸다.

    물론 며칠이나 되는 시간 동안 마냥 그 장소에 가만히 있는 것도 시간 낭비니, 우리는 그 시간을 이용해서 주변을 돌아다니며 몬스터와 전투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착실히 직업 레벨을 올려두는 것도 아래에서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으니, 바로 아라크네 클랜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쟤들만 여기 남겨두고 우리 파티끼리 딴 데 다닐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특히 미리엘은 직업 레벨까지 한계치에 도달해있는 만큼 몬스터와 싸워서 레벨을 올릴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쭉 보스룸에 대기하고 있겠다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파티를 쪼개서 교대로 레벨을 올리고 오기로 했고, 미리엘을 제외한 나머지 아라크네 간부들도 그런 우리에 맞춰서 같이 사냥을 나서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같이 사냥에 나서게 된 건 바로 나와 레이아, 똥개. 그리고 앨리시아였다.

    이 멤버로 6계층을 다니기에는 살짝 화력이 부족한 느낌도 있었고, 하필 아라크네에서 앨리시아만 날 따라간다는 걸 다른 애들이 엄청나게 경계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스룸의 경계 인원을 더 빼 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었다.

    사라와 디아나, 그리고 실비아. 적어도 이 셋 정도는 되어야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끌던 아라크네 클랜의 방해를 하던 할 것 아니겠어?

    어차피 우리도 멀리까지 갈 생각은 없으니, 이 파티로도 별문제는 없겠지.

    "하앗! 야! 병아리! 방심하지 말라고!"

    내 옆에서 검을 휘두르려던 데스나이트의 머리를 대검으로 뭉개버리며 내게 일갈하는 앨리시아.

    인원이 적은 만큼 기합이 들어가 있는 건지, 오늘의 앨리시아는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움직이며 적을 쓸어 담았다.

    그리고 그 용맹한 모습을 보며, 나는 전부터 해왔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역시 이 녀석들은······.

    "너야말로 너무 무리하다가 다치지나 말라고. 이게 뭐냐. 벌써 생채기나 생기고."

    "으하읏?! 이, 이 새끼가 어딜 만져!?"

    아니. 어딜 만지냐니. 그냥 어깨 쪽에 상처 나서 쓰다듬어준 것뿐이잖아.

    뭘 이제 와서 어깨 한번 만진 거 가지고 그런 반응을 보이냐.

    "가서 레이아한테 치료나 받아."

    방금 그 데스나이트로 적은 전멸했기 때문에, 나는 앨리시아의 등을 떠밀었다.

    "겨우 이런 걸로 무슨 치료야. 이런 건 침 발라두면 나아!"

    하지만 앨리시아는 내 손이 등에 닿는 것마저 민감하게 반응해서는, 황급히 내게서 멀리 떨어졌다.

    "아니. 침 발라두면 낫는다니······."

    "뭐 새끼야? 뭐 할 말 있어?!"

    "······여자니까 상처 정도는 제대로 신경 써라."

    이런 말을 해도 될지 살짝 고민했지만, 나는 결국 말하기로 했다.

    원래대로 친구처럼 지내자고 하고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이런 건 또 사양하는 건 괜히 더 어색해질 뿐이라고 생각한 거다.

    "어차피 여자답게 행동해봤자······."

    그 결과 앨리시아한테 원망 가득한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말이 통하기는 했는지, 앨리시아는 뒤에서 거대화한 똥개와 같이 있던 레이아에게 다가가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

    "구원 씨 말이 맞아요. 이렇게 피부가 예쁘신데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는 건 아까워요. 혹시 오래된 상처 같은 게 남아있으시다면 봐 드릴까요?"

    그리고 우리 천사님의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순수한 호의에, 앨리시아는 기겁하면서 몸을 뺐다.

    이 녀석, 우리 천사님 같은 타입에 약해 보이는 성격이긴 하지.

    아니.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누구든 우리 천사님 같은 타입에 약하겠지만.

    "돼, 됐어! 내가 미리엘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아."

    "아······."

    "······야. 새끼야. 지금 그 이해한다는 듯한 ‘아······.’는 뭐냐?"

    "으, 응? 아니. 별로."

    "구원 씨?"

    "아니야. 진짜 별거 아니니까."

    난 그냥 단순히 그러고 보니 미리엘 걔 몸에 상처 엄청 많았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절대 걔가 예전에 내 앞에서 보였던 스트립쇼를 생각해낸 게 아니라고.

    "누가 봐도 수상한 태도로 부정하지 마. 새끼야. 너 지금 무슨 생각 했어?"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수상한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는지, 결국 나는 앨리시아에게 헤드락을 걸리고 말았다.

    야. 그러니까 네가 헤드락을 걸면 머리에 가슴이 닿는다고.

    그야 갑옷을 입고 있으니까 말랑말랑한 느낌은 전혀 안 나고, 오히려 갑옷 때문에 아프기만 하지만!

    "그러니까 별거 아니라고! 그냥 안 보이는 오래된 상처를 보여주려면 여기서 벗어야······쿠하으윽!"

    당연히 미리엘의 알몸을 봤다는 얘기를 꺼낼 수 있을 리도 없고, 나는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앨리시아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별게 아니야, 이 새끼야!"

    하지만 그게 또 앨리시아의 심기를 건드려서, 내 머리를 조이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아프다고! 쪼개져! 쪼개진다니까?!

    "맞아. 별거 맞아! 네 알몸은 중요하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새끼야!"

    "끄아아악! 남자가 여자 알몸이 중요하다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하다고!"

    "이······! 큭······! 치료도 끝났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다음 가자고! 다음!"

    지나친 격통에 나는 결국 앨리시아와의 관계도 신경 못 쓰고 되는대로 마구 말을 내뱉어버렸고, 앨리시아는 그제야 내 머리를 놔주면서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아니. 이젠 너 때문에 내가 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

    "앨리시아! 위험해!"

    머리를 어루만지며 앨리시아쪽을 바라봤던 그 순간, 갑자기 벽을 통과하고 튀어나온 스펙터가 앨리시아의 등 뒤를 노리는 게 보였다.

    게다가 앨리시아는 흥분해서 뒤쪽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모습.

    나는 생각보다 빨리 몸을 움직여서, 그림자 이동으로 앨리시아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바로 스펙터의 공격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여기서 또 그림자 이동의 단점이 드러났다. 그림자를 이동할 때는 내가 보고 있는 방향 그대로 이동한다는 단점이.

    앨리시아의 등 뒤로 이동한 나 역시도 스펙터에게 뒤를 보이고 있는 상태가 됐고, 재빠르게 뒤를 돌아 공격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아주 살짝 타이밍이 늦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녀석이 무기를 이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공격하는 타입의 몬스터라는 점이었다.

    막아내는 타이밍은 늦었지만 몸에 성자의 전력을 두르는 데 성공한 나는 어깨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스펙터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고, 그 상태로 주먹을 몇 번 더 휘둘러서 녀석을 완전히 처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보면, 딱히 그림자 이동의 단점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어깨를 다치기는 했지만 심각한 상처는 아니었고, 레이아한테 치료받으면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읏?! 야! 너, 어깨가!"

    한 박자 늦게 자신의 위기 상황을 캐치하고 뒤를 돈 앨리시아가, 내 어깨를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고는 반사적으로 내 어깨를 잡아버린 거다.

    아직 성자의 전력을 두르고 있는 내 어깨를.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21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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