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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910화 (894/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10화 >

    "미리엘양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일세."

    아, 그렇지. 그러고 보니 걔도 그 문양을 해석하자마자 내 고간부터 쳐다봤지.

    "이방인에 대해 제법 잘 아는 것 같았던 미리엘양이 그건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했네만, 조금 전 대화로 의문이 풀렸네. 사라양의 할아버지가 이방인. 그리고 할머니가 용사였던 것이라면, 미리엘양은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와 용사에 관한 이야기 모두를 자신의 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것뿐이었구먼. 그리고 이야기를 전해준 사우론 아우덴 역시 당사자가 아닌 만큼 어중간 지식밖에 전해줄 수 없었을 걸세."

    그렇군. 6계층에서 대화를 나눌 때 디아나가 잠깐 미간을 찡그리며 멈칫했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하지만 지금 당장 미리엘이 모른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그렇게 6계층 아래로 가는 것에 집념을 불태웠던 미리엘이다.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내려고 할 거고, 그러다 보면 이방인 중에 여자도 있었다는 것쯤은 눈치를 채겠지.

    "역시 최대한 서둘러야겠네."

    물론 보험이 그것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릇 이전에, 일단 그릇에 담을 사념을 얻어야 하니까.

    그리고 아마 그 방법은 6계층의 주인에게 내 성자 스킬을 날리는 것.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불안하단 말이지.

    아래에서 미리엘이 농담 식으로 던졌던, 성자님 같은 능력은 자신에게 없다고 했던 말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그 녀석, 실은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건 아닐까?

    내가 그냥 감만으로 이런 의심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근거는 바로 미리엘이 용사가 아니라는 점.

    결국 사라와 미리엘 둘 다 혈통은 똑같다.

    어머니는 다를지라도 아마 그쪽은 둘 다 평범한 사람일 테고, 결국 주목할 점은 용사와 이방인의 피를 반반씩 가지고 있는 사우론 아우덴의 핏줄이다.

    하지만 똑같은 핏줄을 타고도, 사라는 용사고 미리엘은 아니다.

    전에 들은 바에 따르면, 쓰레온의 집안은 대대손손 전원이 용사였다고 한다.

    즉, 원래라면 미리엘 또한 용사가 돼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혹시 미리엘은 이방인의 피를 더 진하게 물려받은 것 아닐까?

    용사라는 마신의 힘을, 그와는 상극이라고 할 수 있는 여신님의 힘, 그러니까 이방인의 피가 막아버린 거다.

    그리고 그렇다는 말은, 미리엘은 여신님이 주신 이방인의 힘을 다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내 성자 스킬이 6계층 몬스터한테 먹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었지.

    혹시 자기도 비슷한 걸 쓸 수 있기 때문에, 써보고 나서 그런 말을 했던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무서울 정도로 용의주도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그 녀석들, 자기들끼리는 성기를 못 얻는다는 이유로 옛날에 날 데리고 5계층 투어까지 시켰었잖아.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굳이 그런 옛날일 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바로 얼마 전에 거북이 성기를 얻을 때도 날 데리고 갔었는데.

    설마 그게 전부 다 이쪽을 방심시키기 위한,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와 동맹을 맺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 던전을 헤쳐나가는지 알아보기 위한 술수였다는 얘기야?

    젠장. 그러면 6계층의 주인한테 사념인지 뭔지도 벌써 얻어버린 게······아니. 그건 아닐 거야.

    그 녀석들도 문양을 해석한 건 6계층의 주인을 잡은 다음이었고, 그때 마석을 캐면서 드랍된 아이템을 정리하는 것도 우리 앞에서 당당하게 했었다.

    아마 그때는 아직 6계층의 아래로 가는 조건을 모르고 그냥 잡았겠지.

    그렇다는 말은 즉, 다음번에 6계층의 주인이 부활했을 때가 제일 중요한 갈림길이 될 거라는 얘기다.

    그때 6계층의 주인을 우리가 먼저 잡냐 걔들이 먼저 잡냐에 따라서 승부가 갈린다.

    이번에 6계층의 주인을 잡고 여기까지 돌아오는데 대충 2주가 조금 덜 걸렸으니까······넉넉히 잡아서 2, 3일 이내로는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

    "얘들아 미안한데. 며칠 쉬지 못하고 다시 출발해야 할 것 같아. 괜찮을까?"

    "그럼요. 구원씨야 말로 괜찮으신가요? 무리하시는 건 아닌가요?"

    그렇게 양해를 구하는 내게, 제일 먼저 대답해주신 것은 바로 천사님이었다.

    천사님. 오히려 절 걱정해주시는 그 마음 씀씀이에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뭘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어느샌가 다시 쿨한 표정을 되찾은 사라도.

    "이런 일은 얼른 끝마쳐버리는 것이 속 편하고 말일세."

    대마법사님답게 이런 때마저도 그다지 긴장감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디아나도.

    "저, 전 당장에라도 갈 수 있습니다아!"

    그리고 얼마 전에 내게 안겨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다가 승천할뻔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에는 저 멀리 구석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실비아도.

    전부 날 든든하게 받쳐줬다.

    "좋아. 그러면 다들 마지막 던전행이 될 수 있으니까 준비 단단히 해! 이번에야말로 진짜 클라이맥스야!"

    라고 오랜만에 주인공다운 기합을 넣어 본 나였지만.

    "지금 당장 갈 것도 아닌데 너무 기합이 들어간 것 아닌가?"

    "시, 시끄러워! 나도 잠깐 말하던 도중에 깨달았으니까!"

    디아나의 일침에 바로 기합이 빠지고 말았다.

    하여간 얘들은 내가 멋진 모습을 보일 틈을 안 줘요.

    아무튼 그렇게 얘기를 마치고, 우리는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고는 하지만, 우리도 기계가 아니니까 지금 당장 다시 던전으로 돌아가거나 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출발한다고 해서 6계층의 주인이 일찍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우리는 그동안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서 해산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내가 제일 먼저 하기로 한 일은 바로······.

    "늦지 않았겠지?"

    "조, 조금······위험할 것 같습니다아······."

    기어코 잡아서 무릎 위에 앉힌 실비아에게 묻자, 실비아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해줬다.

    여기는 지금 바넷사가 운전하고 있는 마차 안.

    마차를 타고 실비아와 함께하고 있다고 하면, 어디로 가는지 대충 알겠지?

    그래. 바로 제일 최근에 내 여자가 된, 우리 공주님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이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대모험을 하고 오는 바람에 엄청나게 시간이 걸렸으니까 말이야.

    나조차도 5계층을 넘어서 6계층까지 다녀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위험하다니. 네 목숨이?"

    "그, 그것도 위험합니다아······."

    아니. 실비아야.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치지 말라고.

    누가 들으면 진짜로 죽는 줄 알겠다.

    아무튼 그렇게 실비아를 무릎 위에 앉힌 채로 힐끔 밖을 보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경비를 서고 있는 경비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저 모습을 보니, 일단 안심해도 될 것 같네. 전에 펠리시아가 제대로 폭주했을 때는 경비원들부터 뭔가 상태가 이상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실비아나 계속 가지고 놀······장난이나 주고받기로 했다.

    "그것도 조금?"

    "이, 이건······조금 마니······위험합니댜아······."

    "구체적으로는?"

    "이, 이대료 28분만 더 이쓰며언······."

    "있으면?"

    "죽슙니댜아······."

    아니. 엄청 위험하잖아.

    그리고 28분이라니. 묘하게 구체적이잖아.

    그야 구체적으로 물어본 건 나지만 말이야.

    "진짜로? 그렇게 되기 전에 얼른 힐링 섹스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마부석으로 이어진 창문을 힐끔 쳐다본 나였지만, 웬일인지 마부석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상하다? 창문도 열려있으니까 안 들릴 리가 없는데?

    "바넷사씨?"

    "······뭡니까?"

    저거 봐. 들리잖아.

    "안 말리십니까?"

    "······."

    야. 잠깐만. 뭔데 그 반응은?

    뭐야? 뭐야? 진짜로 뭔 일 있나? 아, 설마······.

    "너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하도록 묵인해주려는 거야?"

    "······."

    정답인가. 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겁잖아.

    그러면 괜히 더 심각한 것 같다고. 아니. 그야 심각한 일이 맞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러면······."

    "······뭡니까? 마차를 멈추고 저도 끼라는 말이라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야. 너무 나갔어. 너무 나갔다고.

    넌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야 분명 그런 플레이도 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네가 그러면 더 장난치기 힘들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고."

    아무리 그래도 저런 바넷사를 상대로 더 장난을 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실비아를 내 무릎 위에서 치워 옆으로 놔뒀다.

    "흐헤읏······흐얏······햐으읏······."

    그러자 실비아는 생명의 위기를 겨우 빠져나온 사람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반대편 좌석 구석으로 가버렸다.

    실비아야. 언제나 한결같은 그 모습이 힐링 되는구나.

    언제까지나 그 자세 잃지 말렴.

    뭐,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바넷사. 네가 한가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뭡니까?"

    "확실히 여신님의 사명은 힘들겠지만, 난 딱히 죽거나 할 생각 없어. 아까는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명이 끝날 거라는 얘기지, 내가 끝날 거라는 얘기가 아니야. 너랑 내가 얼굴 보는 것도 이걸로 끝이라는 얘기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너도 괜히 신경 써주려고 하지 말고 평소대로······."

    "디아나님의 마차에서 이상한 짓이라도 하시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전환이 너무 빠르잖아! 모처럼 폼 잡고 말했으니까 감동 받은 척이라도 좀 해라!"

    내가 그렇게 외친 순간, 바넷사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서 창문 너머로 날 쳐다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완벽하게 무뚝뚝한 얼굴로.

    "뭐, 뭐야?"

    "감.동.했.습.니.다."

    "전혀 감동한 것처럼 안 보이거든?! 너 지금 일부러 끊어서 말했지?"

    "말 걸지 마십시오. 운전에 방해됩니다."

    아오! 저걸 콱 그냥!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운전에 집중하는 바넷사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마침 또 성문에 진입에서 입성 절차를 밟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도 그 이상 농담 따먹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저건 언젠가 진짜로 한 번 날 잡아서······.

    "어차피 이번에 제 차례는 오지 않습니다. 벌주고 싶으시면 돌아와서 주시지요."

    "아니. 벌을 주고 싶은 게 아니라 조교를 하고 싶은 건데."

    "······."

    이번엔 자기가 먼저 말 걸어 놓고 또 무시하기냐!

    "죄송합니다. 실비아 님은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성으로 들어왔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 펠리시아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메이드는 도중에 멈춰 서서, 갑자기 실비아의 접근을 제지했다.

    즉, 인사 같은 건 뒤로 제쳐놓고 일단 나만 만나러 가라는 얘기인가.

    이거 상당히 절박한 상황인 모양이네.

    메이드가 방까지 따라가려는 걸 보니, 폭주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럼 구원 님.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실비아도 대충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곧바로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마치 펠리시아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실비아야. 네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이제 펠리시아도 내 여자니까 책임지고 제대로 해줄 거라고.

    "어머, 자기. 흐읏······와, 왔어?"

    그렇게 실비아와도 헤어져서 방에 들어가니, 거기에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로 가쁜 숨을 토해내며 몸을 베베 꼬고 있는 펠리시아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평범하게 내게 인사를 하려고 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오냐. 네 자기 오셨다."

    "아하핫. 뭐야. 그 말투. 대단한 사람처럼."

    "아니. 일단 대단한 사람 맞거든."

    "아핫. 그랬지."

    일단 쾌활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펠리시아는 계속해서 허벅지 안쪽을 맞대어 문지르고 있었다.

    어느샌가 메이드도 방을 빠져나가서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인사보다는 일단 본론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참을 필요 없으니까 긴장 풀어도 돼."

    "싫어."

    그렇게 말하면서 옷부터 벗은 나였지만, 의외로 펠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니.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응? 아니. 야. 너 혹시 너무 절박해서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기억도 안 나는 거 아니지? 나 이제 네 자기 맞다니까? 이젠 네가 그 기운 풀어봤자······."

    "하는 건 똑같다는 거잖아?"

    "뭐야. 잘 아네."

    "잊을 리가 없잖아? 다만······."

    거기까지 말하고, 펠리시아는 입을 다문 다음 아래로 눈을 깔았다.

    얼굴은 처음부터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빨개지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부끄러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저러지?

    "다만 뭔데?"

    "······아무리 결과가 똑같아도, 이왕이면 강제보다는 자기가 직접 해주는 게······그게······기쁘잖아······."

    ······야. 발랑 까진 공주님. 너 그런 캐릭터였냐?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 한구석의 냉정한 부분은 태클을 걸었지만, 내 몸은 본능에 따라 펠리시아를 향해 다이빙했다.

    너무 귀엽잖아!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10화 > 끝

    ⓒ CurtainCall#o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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