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908화 (892/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8화 >

    다음날부터 우리는 아라크네 클랜과 함께 귀환길에 올랐다.

    적과의 동침 같은 상황이라 처음에는 살짝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그런 기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차 사라져갔다.

    이렇게 같이 얘기해보면 진짜로 나쁜 녀석들로는 안 보인단 말이지.

    다들 한군데씩 특이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좋은 녀석들이다.

    "무, 뭐야. 괜히 빤히 쳐다보기나 하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살짝 특이하지만 좋은 녀석의 대표 격인 앨리시아가 미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표정과 함께 말을 걸어왔다.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빤히 쳐다보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냥 주변을 넓게 둘러보다가 너한테도 잠깐 시선이 갔던 것뿐이잖아.

    하여간 자의식과잉이라고 할까······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어제는 머리가 복잡하다 보니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지만, 그러고 보니 얘는 아직도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겠지?

    "아니. 슬슬 내가 널 병아리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적당히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넘어가려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진심이 섞여 있기도 했고.

    물론 아무리 그래도 앨리시아를 병아리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너무 나간 얘기겠지만, 진심으로 이젠 얘랑 나랑 실력 차이 별로 안 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앨리시아, 아니. 앨리시아뿐만 아니라 아라크네 클랜 전체의 전투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만큼 내가 성장했다는 걸까? 아니. 하지만······.

    "뭐 새끼야?!"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찰나에, 앨리시아가 내 머리를 팔로 휘감고는 단단히 헤드락을 걸어왔다.

    "야. 잠깐. 타임! 타임!"

    "흥. 이렇게 간단하게 제압당하는 새끼가 건방지게. 순순히 병아리라는 걸 인정하면 놔주지."

    내가 그 팔을 손바닥으로 탭 하며 항복하자, 앨리시아는 기고만장해져서 더욱 내 머리를 조여왔다.

    야.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진짜로 내가 아파서 이러는 것 같아? 네 힘이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네 헤드락은 전혀 아프지 않다고!

    그도 그럴 것이.

    "그게 아니고 가슴! 가슴!"

    괜히 우리 애들한테 눈총 사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속삭여주자, 앨리시아는 곧장 내 머리를 해방해줬다.

    내가 속삭인 보람은 전혀 없었지만.

    "?! 뭐, 뭘 의식하는 거야 새끼야?!"

    아니. 아무리 우리가 남녀 관계 상관없는 친구 사이로 돌아가기로 했다고는 해도 그렇지. 그걸 의식 안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오히려 가슴이 닿을 걸 생각 안 하고 헤드락을 걸어버린 네 대범함이 더 어처구니없을 정도라고.

    최근 들어서 아주 살짝 자신이 여자인 걸 의식하는 것 같더니 조금만 장난치면 바로 이렇게······아니. 이렇게 지적하자마자 바로 팔을 푸는 것부터가 많이 여자다워진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다워진 것도 생각 없이 헤드락을 걸었던 것도 전부 나 때문이니까.

    "그러면 쿠션 때문에 아프지도 않은걸 아픈 척하고 있어야 하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상황이 미묘한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도록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것뿐이었다.

    "쿠······이 새끼 진짜 죽여버린다?!"

    "죽일 거면 적어도 방금처럼 헤드락으로······끄아악?! 진짜로 때렸어?! 아빠한테도 맞은 적 없는······잠깐! 타임! 타임! 진정해! 여기 던전이니까!"

    이번에는 진심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낀 내가 우리 애들에게 눈짓으로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아무도 날 도와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끼어들 거면 앨리시아가 나한테 헤드락을 걸었을 때 이미 끼어들었을 테니까.

    앨리시아가 나한테 어떻게 차였는지 아는 만큼, 우리 애들은 앨리시아를 대하는 것이 조금 어색한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네가 그렇게 좋아했던 남자랑 나는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지낸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될 테니까 말이다.

    "끄어어어······!"

    아무튼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나는, 그렇게 앨리시아의 아이언 클로를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흑. 아까 비슷한 실력이라고 했던 거 취소다. 취소!

    얜 여자애가 뭔 악력이 이렇게 센 거야?

    진짜 완전 말만 할 줄 아는 몬스터나 다름 없······.

    "이 새끼 너 지금 이상한 생각 했지?!"

    "끄아우으으······."

    뭐, 아무튼 그런 느낌으로, 도중부터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느낌도 사라져서 아라크네 사람들과도 화기애애하게 지내며 같이 마을로 귀환하게 됐다.

    "설마 직접 데리고 돌아와 줄 줄이야. 고맙다. 이렇게까지 해줘서."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고는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지니가 곧장 우리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얘네들이 위기에 처했을까 봐 구해주러 간 거였지.

    도중부터 목적이 180도 바뀌는 바람에 완전히 잊고 있었어.

    "응? 무슨 일이야?"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미리엘 파티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런 지니를 바라봤다.

    "5.5계층의 분위기만 파악하고 돌아오기로 했던 너희가 너무 늦어서 부탁했다. 만약 보게 되면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주지 않겠냐고."

    "뭐? 너희 그럼 우리가 걱정돼서 거기까지 쫓아왔던 거야?!"

    그리고 지니가 사정을 설명해주자, 앨리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살짝 감동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감동한 표정으로 보면 찔리는데.

    "뭐······그렇지. 진짜 거기서 위기에 처한 거면 도와줄 수 있는 건 우리뿐이고."

    하지만 부정하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라, 나는 대충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뭐, 어차피 눈치 빠른 미리엘이나 루티아 같은 애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지만.

    실제로 6계층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우리가 뭣 때문에 쫓아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반응이었고.

    "너, 너······."

    하지만 단순한 앨리시아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건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반응이 뒤에 있는 미리엘이나 루티아와 너무 대조돼서, 살짝······아니. 아무튼.

    "아무튼 고생했다. 그러면 약속대로, 최대한 빨리 6계층 아래를 확인해보고 안전한 것 같으면 너희한테도 연락을 줄게."

    지금의 앨리시아에게 반응을 해주면 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 것이 뻔했다.

    괜히 희망의 불씨를 남겨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냉정하게 그렇게 말하고는 아라크네 클랜과 헤어지기로 했다.

    "아······ 응. 그래."

    야. 사람 마음 아프게 그런 시무룩한 표정 짓지 말라고.

    괜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살짝 마음이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에 휘둘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할 일도 많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멍! 멍!"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위로 돌아가자마자, 지금까지 충실히 우리의 후위진을 지켜주던 케르베로스가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야! 천천히 가! 네 덩치를 생각······!"

    그런 케르베로스의 뒤를 쫓아서 황급히 안내 데스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자, 거기에는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더니 손바닥 사이즈로 작아져서 레이첼 누님에게 안겨드는 케르베로스의 모습이 있었다.

    "······작아질 수 있었던 거냐."

    어쩐지 이상하더라. 아니. 레이첼 누님도 디아나도 켈비라고 애칭으로 부르면서 귀엽다 귀엽다 했었는데, 막상 만나보니까 덩치가 산만 한 놈이었으니까 말이야.

    저러면 귀엽다 귀엽다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

    "흐윽······흒······켈비······켈비이······."

    처음에 켈비가 안겼을 때는 무슨 일인지 이해를 못 한 듯 얼어있던 레이첼 누님은, 점점 켈비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머리로 이해하기 시작한 건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켈비의 몸에 얼굴을 비벼댔다.

    일 할 때는 그렇게 성실한 누님이, 다른 모험가의 안내도 도중에 내팽개치고 말이다.

    "죄송합니다. 안내는 잠시 다른 데스크를 이용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런 누님을 대신해서 내가 누님의 앞에 줄 서 있던 모험가들을 다른 쪽으로 인도해주자, 누님은 그제야 내 귀환을 깨달은 듯 새빨개진 눈으로 날 쳐다봤다.

    "구, 구원아······흑······켈비······."

    "응. 그래."

    "흐윽······!"

    "우왓?!"

    "흐아아앙!"

    내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누님은 팔을 뻗어서 내 목을 확 끌어안고는 켈비를 사이에 끼운 채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셨다.

    그리고 내가 그런 누님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가만히 그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미안. 나 너무······."

    레이첼 누님은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야 겨우 눈물을 멈출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더 이상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레이첼 누님을 데리고 온 거다.

    다른 안내원 누님들도 사정을 이해해주고는 조퇴 처리를 대신 해주셨기 때문에, 누님을 데리고 오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니. 괜찮아. 그러는 게 당연하지. 오히려 그 상황에서 레이첼이 냉정하게 대응했으면 그게 더 충격적이었을 거야."

    눈물을 멈췄다고는 하지만 눈가에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고여있는 것이 언제든지 다시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처럼 느껴져서, 나는 누님이 더이상 울지 않도록 있는 힘껏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리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라고는 하지만, 내 여자가 우는 꼴은 못 보는 멋진 남자거든. 나라는 녀석은.

    "얘, 얘는 정말······!"

    다행히도 내 장난이 먹혀들었는지, 누님은 눈가를 훔치던 손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톡 치면서 입가에 미소를 띄워 주셨다.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그렇게 눈물이 멈추고 나자 겨우 사정을 들어볼 생각이 들었는지, 누님은 켈비를 가슴에 꼬옥 껴안은 채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사정이라고 해도 켈비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나도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충 정황을 설명해주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소계층에 파고 들어가 있었으니, 아마 땅의 정령을 이용해서 땅을 파고 다니며 숨어 지내다가 거기까지 들어가 버린 것 같다는 점.

    그리고 만났을 당시에 몸에 묻은 피로 보아서 상당히 고생하고 지냈던 것 같다는 점까지.

    "흐으윽. 켈비······누나가 그때 널 버리고 가서······!"

    "멍! 멍!"

    하지만 그런 설명만으로 충분했는지, 누님은 다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물론 켈비도 아니라는 듯 짖어줘서,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지만 말이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훈훈한 광경에 누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같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 광경을 보면서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상하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건 아니고. 뭔가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누님, 평소에는 존댓말 캐릭터면서 나랑 서로 반말하기로 했을 때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적응했지. 본인을 누나라고 하면서······어? 잠깐만.

    "컹."

    내 머릿속에 깨달음이 내려온 순간, 켈비가 날 바라보면서 가볍게 한 번 짖었다.

    "응. 켈비. 구원 형아한테도 고맙다고 해야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누님! 그 개새······그 똥강아지 녀석! 지금 저한테 감사 인사를 한 게 아니라고요!

    "내가 없는 동안 내 빈자리를 메꿔주느라 수고했다. 하지만 이제 네 역할은 끝났어. 앞으로는 내 시대다." 라는 의미로 짖은 거라고요!

    어떻게 아냐고? 왠지 모르게 알아!

    저 개새······! 던전에서는 지가 불리하니까 고분고분 있더니 위로 올라오자마자 본색을 드러내?!

    "너 당장 우리 레이첼 누님 가슴에서 떨어져! 그 가슴은 내 꺼야!"

    "크응······."

    "후훗. 구원이도 참. 괜찮아요. 켈비. 형아가 장난치는 거예요."

    레이첼 누님은 내가 장난으로 그런다고 생각하는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누님. 죄송한데 전 지금 무지막지하게 진지해요.

    저 개새······지금 사람 말 이해하고 가슴에 얼굴까지 더 파묻고 있잖아요!

    "뭘 질투하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하는 짓이 강아지와 동급이구먼."

    동급이라고 하지 마! 내가 저놈 하는 짓을 이해하는 바람에 괜히 더 그럴듯하게 들리잖아!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아니. 원래 강아지를 들일 때는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야 해! 알았어! 어디까지 이건 내꺼!"

    나는 확실히 서열정리를 하기 위해 놈의 얼굴과 누님의 가슴 사이에 손을 끼워 넣고 그 가슴을 주물렀고.

    "꺄악?!"

    "뭐 하는 거야, 이 바보가 진짜!"

    결국 사라한테 등짝 스매시를 맞는 처지가 됐다.

    억울해.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908화 > 끝

    ⓒ CurtainCall#o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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